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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께서 廣州에서 탄생하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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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회 작성일06-10-28 12:01 조회1,55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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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3년 기해(1779, 건륭 44)

 

 

8월 7일(무오) 

수어사 서명응에게 남한 산성에 대해 물으시다

 

행궁(行宮)에 나아가 임금이 수어사(守禦使) 서명응(徐命膺)에게 이르기를, 

“이곳의 형승(形勝)은 천험(天險)이라 할 수 있다마는, 무비(武備)가 닦이지 않아서 한 번 전란(戰亂)을 당하면 수습하지 못하니, 어찌 지리(地利)가 부족한 것이겠는가? 이 성은 완풍 부원군(完豊府院君) 이서(李曙)가 쌓은 것인가? 

하매, 서명응이 말하기를, 

“인묘(仁廟) 갑자년에 쌓기 시작하여 병인년에 일을 끝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둘레가 몇 보(步)쯤인가?” 

하매, 서명응이 말하기를, 

“성 안쪽은 6천 2백 97 보이고 바깥은 7천 2백 95 보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고(故) 상신(相臣) 민응수(閔應洙)가 수어사이었을 때에 이 성을 중수(重修)하면서 돌벽돌을 철거하고 비로소 기와를 이었다 하는데, 그러한가?” 

하매, 서명응이 말하기를, 

“민응수가 비로소 성역(城役)을 하였으나 곧 갈리고 조관빈(趙觀彬)이 갈음하여 비로소 일을 끝냈으며 천신(賤臣)이 명을 받고 수개(修改)할 때에 기와를 철거하고 벽돌을 덮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사문(四門)의 편액(扁額)은 다 경이 쓴 것인가?” 

하매, 서명응이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한봉(汗峰)에 성을 쌓은 것은 어느 때인가?” 

하매, 서명응이 말하기를, 

“숙묘(肅廟) 계유년에 수어사 오시복(吳始復)이 쌓기 시작하였는데 을유년에 민진후(閔鎭厚)가 수어사이었을 때에 훼철(毁撤)하였다가 선조(先朝) 기미년에 조현명(趙顯命)이 개축(改築)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병자년에 노인(虜人)이 이 봉우리에 올라 대포(大砲)를 쏘았는가?” 

하매, 서명응이 말하기를, 

“그때 포환이 행궁의 전주(殿柱)를 치기까지 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 봉우리에 오르면 성 안을 굽어볼 수 있다 하니, 이곳에 성을 쌓아 적인(敵人)이 먼저 점거하는 것을 막는 것은 참으로 그만둘 수 없다. 남장대(南將臺)는 산성의 주봉(主峰)이고 그 요해(要害)가 되는 것이 한봉보다 심하므로 고 판서(判書) 민진후가 성을 쌓을 것을 건백(建白)하였으나 중간에 폐기되었고, 선조 임신년에 유수(留守) 이기진(李箕鎭)이 또 연중(筵中)에서 건백하여 이어서 두 돈대(墩臺)를 쌓았는데, 이제는 성은 없고 돈대가 있을 뿐인가?” 

하매, 서명응이 말하기를, 

“성은 이미 중간에 폐기되고 다만 돈대가 있을 뿐인데 한 돈대에 1백 인을 용납할 수 있으니, 이것을 전력(專力)하여 굳게 지키면 산성과 기각(犄角)의 형세가 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병자년에 묘당(廟堂)에서 의논하여 일부의 군사로 이 길을 막으려 하였으나 그러지 못하였다, 이어서 적인에게 점거되어 안팎이 단절되었다.” 

하매, 서명응이 말하기를, 

“그때 군사로 지켰다면 양남(兩南)에서 성원(聲援)하여 서로 통할 수 있었을 것인데, 마침내 적이 점유하였으므로 성 안과 성 밖의 소식이 오래 막혀 어찌할 수 없는 지경이 된 것을 유식(有識)한 자들이 지금까지도 한탄하고 아깝게 여깁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온조왕(溫祚王)의 옛 성터가 아직도 있는가?” 

하매, 서명응이 말하기를, 

“높은 봉우리와 가파른 재 위에 아직도 돌로 쌓은 자취가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옛사람이 지리(地利)가 인화(人和)만 못하다 하였다. 비록 이런 천참(天塹)의 성이 있더라도 인화가 없다면 어떻게 보존하여 지키겠는가? 군사와 식량 두 가지 일은 다 한쪽을 폐기할 수 없으나, 식량이 있고서야 군사를 모아서 성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병자년 때의 일로 말하면 이 서가 1만여 석을 미리 저축하였으나 겨우 40일의 식량을 대었을 뿐이고 마침내 성지(城池)를 지키지 못하였으니, 또한 식량을 잇지 못한 까닭이다. 지금 전란에 대비하는 것은 군사를 조련(操練)하는 것뿐이 아니라 양곡을 저축하는 방도도 각별히 더 유의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창고에 남겨 둔 군향(軍餉)은 얼마인가?” 

하매, 서명응이 말하기를, 

“군향은 조적(糶糴)하는 쌀 2만 5천 석과 각곡(各穀), 3만 석을 합하여 5만 7천 석 영(零)인데 이제는 다 절미(折米)가 되어 4만 4천 석 영에 지나지 않으며, 그 가운데에서 1만 5천 석은 민간에 나누어 주고 지금 창고에 남겨 둔 것은 다만 2만 9천 석 영이 있을 뿐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본영(本營)에 해마다 들어온 돈은 얼마인가?” 

하매, 서명응이 말하기를, 

“저서소(儲胥所)의 본전(本錢)은 1만 6천여 냥인데 선조 신사년 사이에 장신(將臣)이 연중(筵中)에서 아룀에 따라 이식(利息)을 면제하고 내청(內廳)·외청(外廳)에 대하(貸下)하였으며, 경영(京營)의 별비전(別備錢)은 2천 7백여 냥이고 그 밖에 각 항목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7천여 냥인데 한 해 경비(經費)의 나머지는 수천 냥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일찍이 들으니 동문(東門) 밖의 전토(田土)는 예전에 사옹원(司饔院)의 시장(柴場)에 붙였는데 효묘(孝廟) 때 수어사 이시방(李時昉)이 계청하여 면세(免稅)하고 성 안 민호(民戶)에 붙여서 경작하게 하였다 하는데 지금도 그러한가?” 

하매, 부윤(府尹) 송환억(宋煥億)이 말하기를, 

“선조 무오년에 부윤 심성희(沈聖希)가 다시 조세를 거두어 연말에 쌀 한 말을 성안 백성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군향을 저축하는 것은 몇 창고인가?” 

하매, 서명응이 말하기를, 

“합하여 여덟 창고이고 이 밖에 또한 숙창(稤倉)·승창(僧倉)·송파창(松坡倉) 세 곳이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른바 숙창·승창이라는 것에도 저축한 곡식이 있으며 그 수는 얼마인가?” 

하매, 서명응이 말하기를, 

“숙창을 설립한 뜻은 대개 호조(戶曹)·진휼청(賑恤廳)·상평청(常平廳)의 예(例)와 같습니다. 모든 제향(祭享)의 비용과 진휼의 비용과 인부·쇄마(刷馬)의 삯이 다 여기에서 나오는데 잡곡이 모두 4천여 석입니다. 승창은 고(故) 수어사 이세백(李世白)이 공명첩(空名帖)으로, 곡물을 운영하고 해마다 조적하여 모곡(耗穀)을 받았고, 그 뒤에는 창고를 지어 저축하여 또한 군향에 붙였는데 잡곡이 또한 2천여 석이 못되지는 않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열 집이 있는 고을[十室之邑]에도 또한 충신(忠信) 한 사람이 있는데, 이 고을로 말하면 경내(境內)의 호구를 통틀어 셈하면 1만 호의 고을[萬戶之邑]이라 할 수 있거니와 지령(地靈)·인걸(人傑)에는 본디 고금의 차이가 없으니, 또한 어찌 인재가 없겠는가? 병자란 때로 말하면 서흔남(徐欣男)은 사노(私奴)에 지나지 않는데 노병(虜兵)이 세 겹으로 에워 쌌을 때에 홀몸으로 빠져나가 능히 삼남(三南)의 여러 도(道)에 명을 전하였고, 맹원빈(孟元賓)은 한낱 한산(閑散)일 뿐인데 성조(聖祖)께서 행행(行幸)하셨을 때에 제 말을 바치기를 청하여 무사히 입성(入城)하실 수 있게 하였고, 여조(麗朝)의 김방경(金方慶)·조견(趙狷)이 다 이곳에서 났으니, 광주(廣州) 한 부(府)는 인재의 부고(府庫)라 할 수 있을 만하다. 요즈음에도 향당(鄕黨)에서 이행(異行)·기재(奇才)로 이름난 자가 있는가?” 

하매, 서명응이 말하기를, 

“신이 본주(本州)의 읍지(邑誌)를 보니, 병자란 이전에 노협(魯協)이라는 자가 이곳에서 한 이인(異人)을 만났는데 능히 병자란을 예견하였다 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보면 세상에서 모른 가운데에 어찌 뛰어난 인재가 없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때 승평 부원군(昇平府院君) 김유(金瑬)의 군관(軍官) 박진귀(朴震龜)가 일찍이 한 나무 거북을 김유에게 바치며 이것을 쓰면 일면(一面)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였는데, 김 유가 오활하고 괴이하다고 생각하여 물리쳤다. 대개 박진귀는 그것으로 스스로 비유한 것인데, 당시 사람이 모르고서 병자년에 수용하지 못하였으니, 어찌 아깝지 않겠는가?” 

하매, 서명응이 말하기를, 

“신도 그 말을 들었습니다. 대개 또한 이인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남한(南漢)은 본디 이름이 일장산(日長山)이었으나 국조(國朝) 중엽 이후에 비로소 청량산(淸凉山)이라 칭하였는데, 사람들이 청나라 군사가 와서 침범할 조짐이라 하였다. 이런 말이 과연 있는가?” 

하매, 서명응이 말하기를, 

“그것은 고로(故老)가 서로 전하는 말입니다.” 

하였다. 

【원전】 45 집 116 면 

【분류】 *왕실-행행(行幸) / *군사-병참(兵站) / *군사-관방(關防) / *인사-관리(管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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