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敬順大王 03 (경순대왕 遺蹟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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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2-05-09 02:51 조회1,87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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敬順大王 03 (경순대왕 遺蹟記)





2002년 5월 5일, 경기 연천 장남면 고랑포리에 있는 경순왕릉에서 [경순대왕 춘향대제]가 있었습니다.



주최측에서 배부한 책자에 새로운 내용이 다수 있어 행사에 참석치 못한 분들을 위하여 연재하여 소개하고자 합니다.









▣ 경순대왕의 유적기

---李成休 (광산이씨 종친회장)





경순대왕은 만년에 명산을 유력할 때 제천에 이르러서 별궁을 짓고 뱃재 (拜峙배치)에서 서쪽을 바라보니 龍華山(용화산)이 마치 용이 꼬리를 치는 형상이라



그 정상에 올라 암벽에 미륵불을 새기고 그 앞에 高自庵(고자암)을 세웠으며 산 밑에 鶴樹寺(학수사)를 창건하였는데,



대왕은 매일 고자암의 종소리를 들으면서 뱃재에서 미륵불을 망배하였다고 하며, 이 유적지를 답사한 바는 다음과 같다.









1. 원주 용화산 (현 원주군 귀래면 미륵산)은



원주시 남쪽 약 20km 지점에 위치하였는데, 경순대왕이 조성한 거대한 미륵불과 고자암, 황산사지 (전 학수사) 등 유적이 1천여년을 전래하면서 현존하고,





---미륵불상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22호)

미륵산 정상 (해발 689m)의 절벽 (높이 15,6m) 에 동향으로 높이 48척의 초대형 미륵을 새겼는데,

코의 길이만 해도 사람의 키를 넘을 정도로, 가까이에서는 그 모양을 알아볼 수가 없고, 멀리서 바라 보아야만 형체를 알 수 있다고 하며,

이후 龍華山을 彌勒山으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강원도지에는 신라 제13대 미추대왕이 미륵을 만들게 하여 미륵산이 되었다 하나 미상이다.)





---高自庵

대왕은 미륵불 앞 약 1km 거리의 山腹산복(주포리 산 25의2) 에 高自庵 (별지 고자암기 참조)을 세웠으며, 암장에는 대웅전 산신각 등의 건물이 있었는데,

1986년 6월 중건을 위하여 퇴락한 원 건물을 철거하였다는 것이며, 현재는 寺址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경내에 고려때 작품으로 보인다는 삼층석탑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22호)과 입구에 부도(이름난 중의 유골을 안치한 둥근 돌탑) 2기가 현존하며

고자암 터에서는 경순대왕의 것으로 보인다는 朔+土像(?상)의 일부와 銅鏡 등 유물이 발굴되었다고 한다.



또한 고자암에는 경순대왕의 영정각 (뒤에 경천묘) 이 있었는데, 조선조때 장구한 역사를 간직한 眞影과 함께 경상남도 하동에 이봉되었다.





---黃山寺址 (鶴樹寺)

대왕은 또 산 밑 주포리에 원당인 학수사를 창건하였으며, 현재 사찰 건물은 없어지고 寺址만이 남아 있는데 초석 5기가 현존하며, [절안] 또는 [황나절터] 라고도 한다.

고려 중엽에 [黃山居士]가 입산한 후 학수사로 개칭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民家가 들어서 있다.







2. 堤川



제천에는 대왕의 離宮(別宮)과 東京邸(동경저)의 옛 터가 있고, 또 서쪽에 拜峙(배치)가 있는데



현 제원군 백운면 放學里 591번지 富壽洞에 東京邸(邸宅)의 옛터가 있는데, 현재 수령 1천년 정도의 은행나무 고목 한 그루와 조각된 돌로 만들어진 옹달샘 하나가 현존하여 榮枯盛衰의 無常을 말하여 주고 있다.





동 방학리 650번지 궁뜰 (宮坪-궁이 宮野) 에는 離宮의 옛터가 있는데 그곳 김중식씨 家에 이궁의 것으로 보이는 옛 장대석 4개가 있다.



동 花塘里 서쪽 원주군 귀래면 경계 (대호지 부락에서 서쪽 1km) 에 拜峙(배치)라는 고개가 있다.





[국립지리원 지명유래] 및 [충청북도 전설지]에 의하면 대왕은 미륵산 정상에 미륵불을 새기고 그 아래 고자암에 종을 달게 하여 매일 조석으로 스님을 종을 치게 하였는데

대왕은 배치에 나가 있다가 종소리가 들리면 미륵불을 향하여 望峙하였다고 하며, 이후 후세 사람들이 이 고개를 拜峙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3. 1항의 미륵산은 미륵봉을 주봉으로 좌우 12개의 높은 연봉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佳景이 많아 탐방객이 수없이 오르내린다고 하며 貴來面의 지명도 貴人(경순대왕)이 온 곳이라 하여 명명된 것으로 전한다.



이 원주와 제천 일대는 비운의 경순대왕의 만년의 유적지이자 성역이 분명하며 사적지 지정과 성역화 작업등 보호조치가 요청된다고 하겠다.









*참고로 경주 불국사(계림 불곡사)에 경순대왕 遺品이 다음과 같이 소장되어 있다는 기록이 있어 확인한 바 현존하지 않으며 임진왜란 당시 사찰과 함께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0 唐靴(당화) 1쌍 0 金螺杯(금라배-술잔) 0 玉佩(옥패) 0 水晶影子(수정영자-갓끈을 꿰는 수정부품)











(이 사적기와 다음 고자암기는 경순대왕 36세손 김해인 金賢禎의 글에서 전재한 것임)







▣ 고자암기 --- 경순대왕 유적기의 후속 기사



아! 생각건대 우리 東國이 비록 변방이라고 하나 명산이 빼어나고 대천이 또한 수려하여 산하의 경승이 천하에 뛰어났다고 하거니와 그 중에서도 關東이 최고이며 그 최고 중에서도 鶴樹가 최상일 것이니, 이것은 경순대왕의 願堂인 것이다.





무릇 대왕이 일찍이 속세를 초탈하려는 뜻이 있었는데 신라 말기에 견훤이 완산(전주)을 후백제의 도읍으로 잠칭하고 궁예가 북경에 도읍하매

이에 왕기가 풍진세상을 떠나 뜻이 禮佛에 골몰하여 이내 고려 태조에게 讓國하고 별궁을 제천 길지에 따로 지으니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모든 일이 완성된 것이 이때였다.





석불이 용화산의 절정에 우뚝 솟았으나 대왕이 그 靈異함에 감동하여 드디어 스스로 제천의 산야에 王座를 정하고 용화의 자손으로 매양 백운산 남쪽 고개에 올라가 용화산의 미륵에 배례를 드렸다.

인하여 산 밑에 願堂을 영위하니 黃山寺라고 칭하였으며 산 위에는 또 古自庵을 축조하니 일명 太古庵이라고도 하였는데 한 폭의 족자에 만물이 생동하는 그림과 같은 절경은 천만년에도 잊지 못할 형적이로다.





마침내 송악산 (개성) 기슭에 나아가 한 殿宇 (신만궁)를 따로 짓고 승하하시도다.





보덕14년 (1449) 가을 8월 일

추종 종손 시중신 金信倫 삼가 후서함







▣ 김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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