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백범일지(63) 기적장강만리풍5. 총에 맞아 죽을 뻔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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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6-11-02 13:17 조회1,442회 댓글0건본문
5. 총에 맞아 죽을 뻔했으나
성 주석(省主席) 장치중 장군은 친히 내가 입원한 상아 의원(湘雅醫院)에 나를 위문하고 병원 당국에 대하여서는 치료비는 얼마가 들든지 성 정부에서 담당할 것을 말하였다고. 당시 한구에 있던 장개석 장군은 하루에도 두세 번 전보로 내 병상을 묻고 내가 퇴원한 기별을 듣고는 나하천(羅霞天)을 대표로 내게 보내어 돈 3천 원을 요양비로 쓰라고 주었다.
퇴원하여 어머님을 찾아뵈니 어머님은,
"자네 생명은 하느님이 보호하시는 줄 아네. 사불범정(邪不犯正)이지."
이렇게 말씀하시고 또,
"한인의 총에 맞고 살아 있는 것이 왜놈의 총에 맞아 죽은 것만 못해"
하시기도 했다.
애초에 내 상처는 중상이어서 병원에서 의사가 보고 입원 수속도 할 필요가 없다 하여 문간방에 두고 절명하기만 기다렸던 것이 네 시간이 되어도 살아 있었기 때문에 병실로 옮기고 치료하기를 시작하였다고 한다. 내가 이런 상태이므로 향항에 있던 인이에게는 내가 총을 맞아 죽었다는 전보를 놓아서 안공근은 인이와 함께 내 장례에 참여할 생각으로 달려 왔었다.
전쟁의 위험이 장사에도 파급되어서 성 정부에서도 끝까지 이 사건을 법적으로 규명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내 추측으로는 이운한이 강창제, 박창세 두 사람의 악선전에 혹하여 그런 일을 한 것인 듯하다.
내가 퇴원하여 엄항섭 군 집에서 정양을 하고 있는데 하루는 갑자기 신기가 불편하고 구역이 나며 우편 다리가 마비하기로 다시 상아 의원에 가서 진찰을 받았다. 엑스 광선으로 본 결과 서양인 외과 주임이 말하기를, 내 심장 옆에 박혀 있던 탄환이 혈관을 통하여 우편 갈빗대 옆에 옮아가 있으니 불편하면 수술하기도 어렵지 아니하나 그대로 두어도 생명에는 관계가 없다 하고 또 말하기를, 오른편 다리가 마비하는 것은 탄환이 대혈관을 압박하는 때문이어니와 작은 혈관들이 확대되어서 압박된 혈관의 기능을 대신하게 되면 다리 마비하던 것도 차차 나으리라는 것이었다.
그러던 차에 장사가 또 위험하게 되매 우리 3당의 백여 명 가족은 또 광주(廣州)로 이전하였으니 호남의 장치중 주석이 광동성 주석 오철성(吳鐵城) 씨에게 소개하여 준 것이었다. 광주에서는 중국 군대에 있는 동포 이준식(李俊植), 채원개(蔡元凱) 두 분의 알선으로 동산백원(東山栢園)을 임시 정부 청사로, 아세아 여관을 전부 우리 대가족의 숙사로 쓰게 되었다.
이렇게 정부와 가족을 안돈하고 나는 안 의사 미망인과 그 가족을 상해에서 나오게 할 계획으로 다시 향항으로 가서 안정근, 안공근 형제를 만나 강경하게 그 일을 주장하였으나 그들은 교통이 어렵다는 이유로 듣지 아니하였다. 사실상 그 때 사정으로는 어렵기도 하였다. 나는 안 의사의 유족을 적진 중에 둔 것과 율양 고당암에서 중국 도사 임한정(任漢廷)에게 선도를 공부하고 있던 양기탁을 구출하지 못한 것이 유감이었다.
향항에서 이틀을 묵어서 광주로 돌아오니 거기도 왜의 폭격이 시작되었으므로 또 나는 어머님과 대가족을 불산(佛山)으로 이접하게 하였다. 이것은 오철성 주석의 호의와 주선에 의함이었다.
이 모양으로 광주에서 두 달을 지나, 장개석 주석에게 우리도 중경으로 가기를 원한다고 청하였더니 오라는 회전이 왔기로 조성환, 나태섭(羅泰燮) 두 동지를 대동하고 나는 다시 장사로 가서 장치중 주석에게 교섭하여 공로(公路) 차표 석 장과 귀주성(貴州省) 주석 오정창(吳鼎昌) 씨에게로 하는 소개장을 얻어 가지고 중경 길을 떠나 10여 일만에 귀주성 수부 귀양(貴陽)에 도착하였다.
내가 지금까지에 본 중국은 물산이 풍부한 지방이었으나 귀주 지경(地境)에 들어서는 눈에 띄는 것이 모두 빈궁이었다. 귀양 시중에 왕래하는 사람들을 보면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모조리 의복이 남루하고 혈색이 좋지 못하였다. 원체 산이 많은 지방인데다가 산들이 다 돌로 되고 흙이 적어서 농가에서는 바위 위에다 흙을 펴고 씨를 뿌리는 형편이었다. 그 중에서도 한족(漢族)은 좀 나으나 원주민인 묘족(苗族)의 생활은 더욱 곤궁하고 야매한 모양이었다.
중국말을 모르는 나는 말을 듣고 한족과 묘족을 구별할 수는 없으나 복색으로는 묘족의 여자를 알아낼 수 있고, 안광으로는 묘족의 남자를 지적할 수가 있었다. 한족의 눈에는 문화의 빛이 있는데 묘족의 눈에는 그것이 없었다.
묘족은 요순 시대의 삼묘(三苗) 씨의 자손으로서 4천 년 이래로 이렇게 꼴사나운 생활을 하고 있으니 이 무슨 전생의 업보인고. 요순 이후로는 역사상에 묘족의 이름이 다시 나타나지 아니하기로 그들은 이미 다 절멸된 줄만 알았더니 호남, 광동, 광서, 운남, 귀주, 사천, 서강 등지에 수십 백 종족으로 갈린 묘족이 퍼져 있으면서도 이렇게 소문이 없는 것은 그들 중에 인물이 나지 못한 까닭이다. 현재 광서의 백숭희(白崇禧)와 운남의 용운(龍雲) 두 장군이 묘족의 후예라 하는 말도 있으나 나는 그 진부를 단정할 자료를 가지지 못하였다.
귀양에서 여드레를 묵어서 나는 무사히 중경에 도착하였으나 그 동안에 광주가 일본군에게 점령되었다. 우리 대가족의 소식이 궁금하던 차에 다 무사히 광주를 탈출하여 유주(柳州)에 와 있다는 전보를 받고 안심하였다. 그들은 다 중경에 오기를 희망하므로 내가 교통부와 중앙당부에 교섭하여 자동차 여섯 대를 얻어서 기강( 江)이라는 곳에 대가족을 옮겨 왔다. 군수품 운송에도 자동차가 극히 부족하던 이때에 이렇게 빌려준 중국의 호의는 이루 감사할 말이 없는 일이었다.
나는 미주서 오는 통신을 기다리노라고 우정국 - 우체국 - 에 가 있는 때에 인이가 왔다. 유주에 계신 어머님이 병환이 중하신데 중경으로 오시기를 원하시므로 모시고 온 것이었다. 나는 인이를 따라 달려가니 어머님은 내 여관인 저기문(儲奇問) 홍빈여사(鴻賓旅舍) 맞은편에 와 계셨다. 곧 내 여관으로 모시고 와서 하룻밤을 지내시게 하고 강 남쪽 아궁보(鵝宮堡) 손가화원(孫家花園)에 있는 김홍서(金弘敍) 군 집으로 가 계시게 하였다. 이것은 김홍서 군이 호의로 자청한 것이었다.
어머님의 병환은 인후증인데 의사의 말이 이것은 광서의 수토병으로 젊은 사람이면 수술을 할 수 있으나 어머님같이 팔십 노인으로서는 그리할 수도 없고 또 이미 치료할 시기를 놓쳐서 손 쓸 길이 없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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