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의전 배향인물 (10) 이방실, 김득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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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작성일02-05-09 19:53 조회1,798회 댓글0건본문
이방실(李芳實)
?∼1362(공민왕 11). 고려의 무신. 본관은 함안(咸安). 함안이씨의 시조이다.
충목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 충목왕을 따라 원나라에서 호종(扈從)한 공으로 왕이 즉위하자
중랑장이 되고, 이어 호군(護軍)이 되었으며, 아울러 전(田) 100결(結)도 하사받았다.
1354년(공민왕 3)대호군이 되어 용주(龍州)의 군사를 이끌고 선성(宣城)에서 민란을 일으켜
다루가치(達魯花赤) 노연상(魯連祥)부자를 쳐서 진압하였다.
1359년 위평장(僞平章)·모거경(毛居敬) 등의 홍건적이 4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의주를 함락하고,
정주(靜州)·인주(麟州) 등을 함락한 뒤 인주에서 웅거하자 안우(安祐)·이음(李蔭)·이인우(李仁祐)
등과 함께 철주(鐵州)에서 이를 격퇴하였다.
이듬해 상장군이 되어 다시 철화(鐵化)에서 적을 격퇴하였고, 뒤이어 상만호가 되어 함종(咸從)에
들어온 적을 배후에서 공격하고 고선주(古宣州)에서 접전 끝에 의주 쪽으로 퇴각시켰다.
홍건적 격퇴의 공으로 추성협보공신(推誠協輔功臣)에 봉해지고 추밀원부사에 올랐다. 뒤에 홍건적이
배 70척으로 서해도에 침입하자 이를 풍주(豊州)에서 물리쳐 그 공으로 옥대(玉帶)와 옥영(玉纓)을
하사받았다.
1361년 사유(沙劉)·관선생(關先生) 등의 홍건적이 20여만의 무리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삭주 등지에
쳐들어오자 추밀원부사로서 서북면도지휘사가 되어 상원수 안우, 병마절도사 김득배(金得培), 지휘사
김경제(金景#제32) 등과 함께 개주(价州:지금의 개천)·연주(延州:지금의 영변)·박주(薄州:지금의 삭천)
등지에서 요격하였으나 안주와 절령(#절05嶺)에서 참패하여 공민왕은 복주(福州:지금의 안동)로
피난하게 되고 개경은 함락되었다.
1362년 총병관(摠兵官) 정세운(鄭世雲)·김득배·안우·안우경(安遇慶)·최영(崔瑩)·이성계(李成桂) 등과
함께 개경을 수복하고 사유·관선생을 죽였다. 이어 중서시랑평장사에 올랐으나 김용(金鏞)·
박춘(朴椿)에 의하여 안우·김득배 등과 함께 살해되었다.
김득배(金得培)
1312(충선왕 4)∼1362(공민왕 11).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상주(尙州). 호는 난계(蘭溪).
아버지는 판전의(判典醫) 녹(祿)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검열(藝文檢閱)에 보직되었으며, 그뒤 전객부령(典客副令)으로서 공민왕을
따라 원나라에 들어가 숙위하였다. 공민왕이 즉위하자 우부대언(右副代言)을 제수받았으며,
1357년(공민왕 6)에 서북면홍두왜적방어도지휘사(西北面紅頭倭賊防禦都指揮使)가 되었다가,
이어 추밀원직학사(樞密院直學士)에 오르고, 서북면도순문사 겸 서경윤상만호
(西北面都巡問使兼西京尹上萬戶)가 되었다.
1359년 정월에 첨서추밀원사(簽書樞密院事)가 되었으며, 그해 6월에 기철(奇轍)을 숙청한 공으로
이등공신에 올랐다. 같은해 10월에 동지추밀원사가 되었는데, 얼마 되지 않아 홍건적의 괴수
위평장(僞平章)·모거경(毛居敬)이 4만대군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함락하였으며,
부사(副使) 주영세(朱永世) 및 주민 1천여명을 살해하였다. 이어 정주(靜州)에서는 도지휘사
김원봉(金元鳳)을 죽이고 인주(麟州)까지 함락시켰다.
이때 그는 도지휘사가 되어 서북면도원수 이암(李#암10), 부원수 경복흥(慶復興)과 더불어 적에
대비하고, 안우(安祐)·이방실(李芳實) 등과 함께 분전하여 서경을 탈환하고 압록강 밖으로 적을
격퇴시켰다.
1360년 3월에 그 공으로 수충보절정원공신(輸忠保節定遠功臣)에 책봉되고, 정당문학을 제수받았다.
같은해 10월에 지공거가 되어 진사를 뽑고, 정몽주(鄭夢周) 등 33인을 급제시켰다.
1361년 다시 홍건적이 압록강을 건너 삭주 이성(泥城)으로 침입하자 서북면도병마사가 되어
상원수 안우, 도지휘사 이방실 등과 함께 이를 방어했으나, 안주에서 대패, 개경까지 함락당하였다.
다음해에 안우·이방실·최영(崔瑩)·이성계(李成桂) 등과 함께 20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총병관(摠兵官)
정세운(鄭世雲)의 지휘로 적의 괴수 사유(沙劉)·관선생(關先生) 등을 베고, 적 10여만명을 죽이는
전과를 올리고 이들을 격퇴시켰다.
이때, 정세운과 권력을 다투던 평장사 김용(金鏞)이 거짓으로 조서를 꾸며 안우·이방실·김득배에게
정세운을 살해할 것을 명하자, 이들은 그것을 믿고 정세운을 살해하였다.
그러나 이로 말미암아 죄를 입어 안우·이방실이 살해되었으며, 그도 처벌을 면할 수 없게 되어
도망하여 산양현(山陽縣)에 숨었으나 체포되어 상주에서 효수되었다. 그의 문생인 직한림(直翰林)
정몽주는 왕에게 청하여 그의 시신을 거두고 제문을 지어 그의 억울한 죽음을 개탄하였다.
1392년(공양왕 4)에 그의 누명이 벗겨지고, 그 자손도 관직에 오르게 되었다.
▣ 김재원 -
▣ 김재익 -
▣ 김영윤 -
▣ 김항용 -
▣ 김은회 -
?∼1362(공민왕 11). 고려의 무신. 본관은 함안(咸安). 함안이씨의 시조이다.
충목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 충목왕을 따라 원나라에서 호종(扈從)한 공으로 왕이 즉위하자
중랑장이 되고, 이어 호군(護軍)이 되었으며, 아울러 전(田) 100결(結)도 하사받았다.
1354년(공민왕 3)대호군이 되어 용주(龍州)의 군사를 이끌고 선성(宣城)에서 민란을 일으켜
다루가치(達魯花赤) 노연상(魯連祥)부자를 쳐서 진압하였다.
1359년 위평장(僞平章)·모거경(毛居敬) 등의 홍건적이 4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의주를 함락하고,
정주(靜州)·인주(麟州) 등을 함락한 뒤 인주에서 웅거하자 안우(安祐)·이음(李蔭)·이인우(李仁祐)
등과 함께 철주(鐵州)에서 이를 격퇴하였다.
이듬해 상장군이 되어 다시 철화(鐵化)에서 적을 격퇴하였고, 뒤이어 상만호가 되어 함종(咸從)에
들어온 적을 배후에서 공격하고 고선주(古宣州)에서 접전 끝에 의주 쪽으로 퇴각시켰다.
홍건적 격퇴의 공으로 추성협보공신(推誠協輔功臣)에 봉해지고 추밀원부사에 올랐다. 뒤에 홍건적이
배 70척으로 서해도에 침입하자 이를 풍주(豊州)에서 물리쳐 그 공으로 옥대(玉帶)와 옥영(玉纓)을
하사받았다.
1361년 사유(沙劉)·관선생(關先生) 등의 홍건적이 20여만의 무리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삭주 등지에
쳐들어오자 추밀원부사로서 서북면도지휘사가 되어 상원수 안우, 병마절도사 김득배(金得培), 지휘사
김경제(金景#제32) 등과 함께 개주(价州:지금의 개천)·연주(延州:지금의 영변)·박주(薄州:지금의 삭천)
등지에서 요격하였으나 안주와 절령(#절05嶺)에서 참패하여 공민왕은 복주(福州:지금의 안동)로
피난하게 되고 개경은 함락되었다.
1362년 총병관(摠兵官) 정세운(鄭世雲)·김득배·안우·안우경(安遇慶)·최영(崔瑩)·이성계(李成桂) 등과
함께 개경을 수복하고 사유·관선생을 죽였다. 이어 중서시랑평장사에 올랐으나 김용(金鏞)·
박춘(朴椿)에 의하여 안우·김득배 등과 함께 살해되었다.
김득배(金得培)
1312(충선왕 4)∼1362(공민왕 11).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상주(尙州). 호는 난계(蘭溪).
아버지는 판전의(判典醫) 녹(祿)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검열(藝文檢閱)에 보직되었으며, 그뒤 전객부령(典客副令)으로서 공민왕을
따라 원나라에 들어가 숙위하였다. 공민왕이 즉위하자 우부대언(右副代言)을 제수받았으며,
1357년(공민왕 6)에 서북면홍두왜적방어도지휘사(西北面紅頭倭賊防禦都指揮使)가 되었다가,
이어 추밀원직학사(樞密院直學士)에 오르고, 서북면도순문사 겸 서경윤상만호
(西北面都巡問使兼西京尹上萬戶)가 되었다.
1359년 정월에 첨서추밀원사(簽書樞密院事)가 되었으며, 그해 6월에 기철(奇轍)을 숙청한 공으로
이등공신에 올랐다. 같은해 10월에 동지추밀원사가 되었는데, 얼마 되지 않아 홍건적의 괴수
위평장(僞平章)·모거경(毛居敬)이 4만대군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함락하였으며,
부사(副使) 주영세(朱永世) 및 주민 1천여명을 살해하였다. 이어 정주(靜州)에서는 도지휘사
김원봉(金元鳳)을 죽이고 인주(麟州)까지 함락시켰다.
이때 그는 도지휘사가 되어 서북면도원수 이암(李#암10), 부원수 경복흥(慶復興)과 더불어 적에
대비하고, 안우(安祐)·이방실(李芳實) 등과 함께 분전하여 서경을 탈환하고 압록강 밖으로 적을
격퇴시켰다.
1360년 3월에 그 공으로 수충보절정원공신(輸忠保節定遠功臣)에 책봉되고, 정당문학을 제수받았다.
같은해 10월에 지공거가 되어 진사를 뽑고, 정몽주(鄭夢周) 등 33인을 급제시켰다.
1361년 다시 홍건적이 압록강을 건너 삭주 이성(泥城)으로 침입하자 서북면도병마사가 되어
상원수 안우, 도지휘사 이방실 등과 함께 이를 방어했으나, 안주에서 대패, 개경까지 함락당하였다.
다음해에 안우·이방실·최영(崔瑩)·이성계(李成桂) 등과 함께 20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총병관(摠兵官)
정세운(鄭世雲)의 지휘로 적의 괴수 사유(沙劉)·관선생(關先生) 등을 베고, 적 10여만명을 죽이는
전과를 올리고 이들을 격퇴시켰다.
이때, 정세운과 권력을 다투던 평장사 김용(金鏞)이 거짓으로 조서를 꾸며 안우·이방실·김득배에게
정세운을 살해할 것을 명하자, 이들은 그것을 믿고 정세운을 살해하였다.
그러나 이로 말미암아 죄를 입어 안우·이방실이 살해되었으며, 그도 처벌을 면할 수 없게 되어
도망하여 산양현(山陽縣)에 숨었으나 체포되어 상주에서 효수되었다. 그의 문생인 직한림(直翰林)
정몽주는 왕에게 청하여 그의 시신을 거두고 제문을 지어 그의 억울한 죽음을 개탄하였다.
1392년(공양왕 4)에 그의 누명이 벗겨지고, 그 자손도 관직에 오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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