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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지 - 백곡(栢谷) 김득신(金得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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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영 작성일06-11-07 15:57 조회1,799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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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오지 - 백곡(栢谷) 김득신(金得臣)

 

<옛시감상>

나는 어렸을 때부터 시(詩)를 좋아했다. 그래서 외람되이 명로(溟老)에게 사랑을 받아왔고, 명로는 나를 항상 경정산(敬亭山)이라고 불러었다. 이 경정산이란 말은 항상 서로 봐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나는 그의 신중하고 부지런히 계발(啓發)해 주는 덕택에 문장에 대해서 힘껏 연구하기는 했지만, 워낙 몸이 건장치 못해서 학문에 전공(專攻)을 하지 못했다. 내가 일찍기 무신(戊申)년간에 병으로 앓고 누웠을때의 일이다.

어느 날 동명(東溟)이 문병을 왔는데, 그 자리에는 휴와(休窩)와 백곡(栢谷)도 같이 오게 되었다. 이상하게도 불기이회(不期而會)로 만나게 된 까닭에 나는 간단하나마 술상을 차리고 기생도 불러 놓았다. 술이 반쯤 취했는데 동명(東溟)이 흥이 나서 술잔을 들고 말한다.

“대장부가 세상에 나서 청춘시절이란 번개와 같이 지나가는데 오늘날 한번 즐겁게 노는것이 만종록(萬鐘祿)을 누리는 것과 마찬가지요” 한다. 이 말을 듣자 휴와(休窩)가 절구 한수를 읊는다.


春動寒梅勝酒濃 / 찬 매화 봄소식에 무르익은 섣달 술

栢翁溟老兩相逢 / 백옹과 명로를 만나기 어려웠네.

樽前琴瑟兼淸唱 / 거문고 술잔 앞에 맑은소리 겸했는데

醉對南山雪後峰 / 눈 온 뒤의 남산을 취해서 대해 보네.


“옛날 난정(蘭亭) 모임에도 글 짓는 자는 글 짓고, 술 마시는 자는 술만 마셨다 하지 않았소? 오늘날 우리도 또한 노래 부르는 자는 노래하고 춤 추는 자는 춤을 추는 것이 좋지 않겠소?

내 노래를 할 테니 들어보소.” 말을 마치자 동명은 노래를 부른다.


滿滿酌金樽 綠酒三百杯 / 금술잔에 차고 찬 술 三백배나 마셨도다.

浩浩發長歌 意氣橫八垓 / 호호한 긴 노래가 천지에 찬 의기로다.

不愁夕陽盡 天風吹自來 / 석양이 진다고 서러워 말아 하늘 동쪽에 달 돋아오네.


노래를 끝마치고 나서 동명은 남은 흥을 못 이겨 책상을 치면서 다시 노래를 부른다.


君平旣棄世 / 군평도 이미 세상을 버렸고

世亦棄君平 / 세상 또한 군평을 버렸도다.

醉狂上之上 / 상등에 또 상등은 취한 미치광이

時事更之更 / 변할 때로 변하는 건 세상이로세.

淸風與明月 / 맑은 바람 밝은 달 누가 알까나

無情還有情 / 무정한 듯 하다가도 정 돋아오네.


노래를 마치자 얼굴을 펴고 활짝 웃어 보이니, 그 붉은 얼굴과 휘날리는 흰 머리털은 참으로 주중(酒中)의 신선과 같았다. 이에 휴와는 나더러 자기가 지은 봉(峰)자 운에 화답하라 한다. 나도 시를 못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흉내 내어 한수를 읊었다.


淸夜開樽琥珀濃 / 구슬처럼 맑은술 맑은밤 이 자리

文章三老一時逢 / 글 잘하는 세 노인 한때에 만났네.

縱橫筆下千鈞力 / 천근 무게 들 만한 종횡하는 필력

可倒天台萬丈峰 / 천태산 만장봉도 거꾸러뜨리겠네.


이윽고 만주(晩洲)가 이 자리에 또 왔다. 백곡(栢谷)이 그를 끌어 일으키더니 함께 너울너울 춤을 춘다. 동명은 나를 보면서 말하기를, “인생이 백년동안 사는 동안에 이런 즐거움이 몇 번이나 되겠는가? 내가 옛사람을 못 본 것이 한될 뿐이 아니라, 옛사람도 나를 보지 못한 것이 한될 것이로다. 자네는 이 일을 기록하여 오늘 우리의 모임이 헛되이 썩지 않도록 하게.” 했다. 나는 아무런 재주도 없으면서 여러 종장(宗匠)들의 허여(許與)함을 지나치게 입었었다. 정동명(鄭東溟), 임휴와(任休窩), 김백곡(金栢谷), 홍만주(洪晩洲) 같은 분은 나와 함께 연치가 현저히 틀리는데도 좌석을 같이하고 아무런 간격이 없이 지냈다. 또 매양 가신(佳辰)이나 명절(名節)을 당하게 되면 좋은 술자리를 만들고 함께 참석하지 않은때가 없었다.

그러나 우리가 한번 헤어진 뒤로는 거리에 나가봐도 고독하기만 하고, 집안에 들어와 봐도 쓸쓸하기만 해서 마치 의탁할 곳이 없는 사람과 같았다. 그러던 것이 갑인(甲寅)년 가을에 우연하게도 만주가 서울에 올라 왔다가 나를 찾아주었다. 우리는 서로 대해 앉아 지난날의 감구지회(感舊之懷)를 이야기한 다음 그는 내게 율시(律詩) 한편을 주었다.


吾제行樂向來多 / 우리들의 즐거움 지난날엔 많았었지

玄髮蒼顔間綺羅 / 검은머리 푸른얼굴 비단옷도 입었었지.

栢谷風標元不俗 / 백곡노인 좋은 풍채 원래 속되지 않고

豊山才格亦同料 / 풍산씨의 재주 역시 마찬가지 대우였네.

波瀾浩蕩任公筆 / 파란이 호탕함은 임공의 붓 끝이요

天地低仰鄭老歌 / 천지가 높고 낮음 정로의 노래였네.

離散存亡還七載 / 누구는 살아있고 누구는 죽었는가?

逢君今日意如何 / 七년만에 그대 만나니 나의 뜻 어떠하리.


시를 읊고 나자 나를 보고 화답하라고 한다. 나도 공경하는 마음으로 만주의 시를 차운(次韻)해서 화답했다.


歡悰漸少感懷多 / 기쁜일 적어지고 감회만 많아지니

進酒須傾碧공羅 / 술 한잔 마시려고 푸른 잔을 기울이네.

休老仙標巳萬里 / 신선같던 휴와노인 만리길 떠나갔고

溟翁奇氣亦逢料 / 의기 있던 동명옹도 그 역시 같이 갔네.

人間만灑黃爐淚 / 인간 세상 속절없어 황로 눈물 뿌렸건만

身後猶傳白雪歌 / 죽은 후엔 오히려 백설가 전해 있네.

獨有後雲亭上客 / 외톨로 남아 있는 후운정 손님은

驚人傑句倒陰何 / 아름다운 경인귀를 지금도 읊고 있네.


다음으로 나는 여러분들의 호(號)와 나이를 여기에 기록하여 뒷사람의 참고로 한다.

정동명 두경(鄭東溟 斗卿), 자는 군평(君平) 정유생(丁酉生)

임휴와 유후(任休窩 有後), 자는 효백(孝伯) 신축생(辛丑生)

김백곡 득신(金栢谷 得臣), 자는 자공(子公) 갑진생(甲辰生)

홍만주 석기(洪晩洲 錫箕), 자는 자구(子九) 병오생(丙午生)

풍산(豊山)은 나의 관향이요, 후운(後雲)이란 곧 만주(晩洲)가 거처하던 정자의 이름이다. 출전: 순오지


◈ 순오지(旬五志) ◈

조선 인조 때의 학자이며 시평가(詩評家)인 현묵자(玄默子) 홍만종(洪萬宗)의 문학평론집. 《십오지(十五志)》라고도 한다. 필사본. 1책.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1678년(숙종 4)에 저술하였다. 1867년(고종 4)의 등초본(謄抄本)에 실린 저자의 서문에 따르면, 1647년(인조 25) 병석에 있을 때 15일간 걸려 탈고하였으므로 《순오지(旬五志)》라 이름 붙였다고 한다. 정철(鄭澈)·송순(宋純) 등의 시가(詩歌)와 중국의 소설 《서유기(西遊記)》에 대한 평론이 있고, 부록에는 130여 종의 속담(俗談)을 실었다. 정철의 《속미인곡(續美人曲)》을 비평한 글을보면 “속미인곡 또는 송강(松江)의 작품으로 전작(前作) 가사에서 미진한 것을 풀어 말하였는 바, 그 말이 또한 능란하고 뜻이 더욱 간결하여 공명(孔明)의 두 출사표(出師表)와 더불어 백중(伯仲)이라 하겠다”고 되었다. 그 밖에도 한국의 역사, 유·불·선에 관한 일화,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에 대한 견해, 속자(俗字)에 대한 기술 등 실로 다양한 내용이다.


댓글목록

김태영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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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3년 편람집에서 옮김.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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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잃어버렸던 게시판 자료를 찾아 주시니 새로 대하는 듯 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