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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백범일지 (64) 기적장강만리풍(寄跡長江萬里風) 6. 광복군을 창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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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6-11-10 16:09 조회1,94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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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광복군을 창설하다

어머님이 중경으로 오시는 일에 관하여 잊지 못할 은인이 있으니 그는 의사 유진동(劉振東) 군과 그 부인 강영파(姜映波) 여사였다. 이 붗는 상해에서 학생으로 있을 때부터 나를 위하여 주던 사람들인데 쿨링( 嶺)에서 요양원을 경영하던 것을 걷어치우고 제 몸이 제 몸이 아닌 나를 대신하여 내 어머님을 모시고 간호하기 위하여 중경으로 온 것이었다. 그러나 유 의사 부처가 왔을 때는 벌써 어머님은 더 손 쓸 수가 없게 되었던 때였다.

내가 중경에 와서 한 일은 세 가지였었다. 첫째는 차를 얻어서 대가족을 실어오는 일이요, 둘째로는 미주, 하와이와 연락하여 경제적 후원을 받는 일이요, 셋째는 장사에서부터 말이 되면서도 되지 못한 여러 단체의 통일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대가족도 안돈이 되고, 미주와 연락도 되었으므로 나는 셋째 사업인 단체 통일에 착수하였다.

나는 중경에서 강 건너 아궁보에 있는 조선 의용대와 민족 혁명당 본부를 찾았다. 그 당시 김 약산은 계림(桂林)에 있었으나 윤기섭, 성주식(成周湜), 김홍서, 석 정(石丁), 김두봉, 최석순(崔錫淳), 김상덕(金商德) 등 간부가 나를 위하여 환영회를 열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모든 단체를 통일하여 민족주의의 단일당을 만들 것을 제의하였더니 그 자리에 있던 이는 일치하여 찬성하였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여러 단체에도 참가를 권유하기로 결의하였다.

미주와 하와이에서는 곧 회답이 왔다. 통일에는 찬성이나 김 약산은 공산주의자인즉, 만일 내가 그와 일을 같이 한다면 그들은 나와의 관계까지도 끊어 버린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김 약산과 상의한 결과 그와 나와 연명으로, 민족 운동이야말로 조국 광복에 필요하다는 뜻으로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여기 의외의 고장이 생겼으니 그것은 국민당 간부들이 연합으로 하는 통일은 좋으나 있던 당을 해산하고 공산주의자들을 합한 단일당을 조직하는 데에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주의가 서로 다른 자는 도저히 한 조직체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나는 병을 무릅쓰고 기강으로 가서 국민당의 전체 회의를 열고 노력한 지 1개월 만에 비로소 단일당으로 모든 당들을 통일하자는 의견에 국민당의 합의를 얻었다. 그래서 민족 운동 진영인 한국 국민당, 한국 독립당, 조선 혁명당과 공산주의 전선인 조선 민족 혁명당, 조선 민족 해방 동맹, 조신 민족 전위 동맹, 조선 혁명자 연맹의 일곱으로 된 7당 통일 회의를 열게 되었다.

회의가 진행함에 따라 민족 운동편으로 대세가 기울어지는 것을 보고 해방 동맹과 전위 동맹은 민족 운동을 위하여 공산주의의 조직을 해산할 수 없다고 말하고 퇴석하였다. 이렇게 되니 7당이 5당으로 줄어서 순전한 민족주의적인 새 당을 조직하고 8개 조의 협정에 다섯 당의 당수들이 서명하였다.

이에 좌우 5당의 통일이 성공하였으므로 며칠을 쉬고 있던 차에 이미 해산하였을 민족 혁명당 대표 김 약산이 돌연히 탈퇴를 선언하였으니 그 이유는, 당의 간부들과 그가 거느리는 청년 의용대가 아무리 하여도 공산주의를 버릴 수 없으니 만일 8개 조의 협정을 수정하지 아니하면 그들이 다 달아나겠다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5당의 통일도 실패되어서 나는 민족 진영 3당의 동지들과 미주·하와이 여러 단체에 대하여 나의 불명한 허물을 사과하고 이어서 원동에 있는 3당만을 통일하여 새로 한국 독립당이 생기게 되었다. 하와이 애국단과 하와이 단합회가 각각 해소하고 한국독립당 하와이 지부가 되었으니 역시 5당 통일은 된 셈이었다.

새로 된 한국 독립당의 간부로는 집행 위원장에 김 구, 위원으로는 홍 진, 조소앙, 조시원, 이청천, 김학규, 유동열, 안 훈(安勳), 송병조, 조완구, 엄항섭, 김붕준, 양 묵, 조성환, 차이석, 이복원이요, 감찰 위원장에 이동녕, 위원에 이시영, 공진원(公鎭遠), 김의한 등이었다.

임시 의정원에는 나를 국무회의 주석으로 선거하였는데, 종래의 주석을 국무위원이 번갈아 하던 제도를 고쳐서 대내, 대외에 책임을 지도록 하였다. 그리고 미국, 서울, 워싱턴에 외교 위원부를 설치하고 이승만 박사를 그 위원장으로 임명하였다.

한편 중국 중앙정부에서는 우리 대가족을 위하여 토교(土橋) 동감폭포(東坎瀑布) 위에 기와집 세 채를 짓고 또 시가에도 집 한 채를 사 주었으나 그 밖에 우리 독립 운동을 원조하여 달라는 청에 대하여서는 냉담하였다. 그래서 나는 중국이 일본군의 손에 여러 대도시를 빼앗겨 자신의 항전에 골몰한 이때에 우리를 위한 원조를 바라기가 미안하니 나는 미국으로 가서 미국의 원조를 청할 의사인즉 여행권을 달라고 청하였다.

그런즉 중앙 정부의 서은증(徐恩曾) 씨가 말하기를, 내가 오랫동안 중국에 있었으니 중국에서 무슨 일을 하나 남김이 좋지 아니하냐, 사업 계획서를 제출하기를 청하므로 나는 장래 독립한 한국의 국군의 기초가 될 광복군 조직의 계획을 제출하였더니 곧 좋다는 회답이 왔다.

이에 임시 정부에서는 이청천을 광복군 총사령고나으로 임명하고, 있는 힘 - 미주와 하와이 동포가 보내어 준 4만 원 -을 다하여 중경 가능빈관(嘉陵賓館)에 중국인, 서양인 등 중요 인사를 초청하여 한국 광복군 성립식을 거행하였다.

그리고 우선 30여 명 간부를 서안(西安)으로 보내어 미리 가 있던 조성환 등과 합하여 한국 광복군 사령부를 서안에 두고 이범석(李範奭)을 제1지대장으로 하여 산서(山西) 방면으로 보내고 고운기(高雲起) - 본명 공진원 -를 제2지대장으로 하여 수원(綏遠) 방면으로 보내고 나월환(羅月煥) 등의 한국청년 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를 광복군으로 개편하여 제5지대를 삼았다.

그리고 강서성 상요(上饒)에 황해도 해주 사람으로서 죽안군 제3전구 사령부 정치부에서 일보고 있는 김문호(金文鎬)를 한국 광복군 징모처 제3분처(韓國光復軍徵募處第三分處) 주임을 삼고 그 밑에 신정숙(申貞淑)을 회계조장, 이지일(李志一)을 정보조장, 한도명을 훈련조장으로 각각 임명하여 상요로 파견하였다.

독립당과 임시 정부와 광복군의 일체 비용은 미주, 멕시코, 하와이에 있는 동포들이 보내는 돈으로 썼다. 장개석 부인 송미령(宋美齡)이 대표하는 부녀위로총회(婦女慰勞總會)로부터 중국 돈으로 10만 원의 기부가 있었다.

이 모양으로 광복군이 창설되었으니 인원도 많지 못하여 몇 달 동안을 유명무실하게 지내던 중 문득 한 사건이 생겼으니 그것은 50여 명 청년이 가슴에 태극기를 붙이고 중경에 있는 임시 정부 정청으로 애국가를 부르며 들어온 것이다. 이들은 우리 대학생들이 학병으로 일본 군대에 편입되어 중국 전선에 출전하였다가 탈주하여 안휘성(安徽省) 부양(阜陽)의 광복군 제3지대를 찾아온 것을 지대장 김학규가 임시 정부로 보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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