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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백범일지 (65) 기적장강만리풍(寄跡長江萬里風)7. 하필 이 때 일본이 항복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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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6-11-14 15:06 조회1,62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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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하필 이 때 일본이 항복하다니

이 사실은 중국인에게 큰 감동을 주어 중한 문화 협회(中韓文化協會) 식당에서 환영회를 개최하였는데 서양 여러 나라의 통신 기자들이며 대사관원들도 출석하여 우리 학병들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발하였다. 어려서부터 일본의 교육을 받아 국어도 잘 모르는 그들이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려고 총살의 위험을 무릅쓰고 임시 정부를 찾아왔다는 그들의 말에 우리 동포들은 말할 것도 없이 목이 메었거니와 외국인들도 감격에 넘친 모양이었다.

이것이 인연으로 우리 광복군이 연합국의 주목을 끌게 되어 미국의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 미국 전략 사무국의 약자 -를 주관하는 사전트 박사는 광복군 제2지대장 이범석과 합작하여 서안에서, 윔스 중위는 제3지대장 김학규와 합작하여 부양에서 우리 광복군에게 비밀 훈련을 실시하였다.

예정대로 3개월의 훈련을 마치고 정탐과 파괴 공작의 임무를 띠고 그들을 비밀히 본국으로 파견할 준비가 된 때에 나는 미국 작전부장 다노배 장군과 군사 협의를 하기 위하여 미국 비행기로 서안으로 갔다.

회의는 광복군 제2지대 본부 사무실에서 열렸는데, 정면 우편 태극기 밑에는 나와 제2지대 간부가, 좌편 미국기 밑에는 다노배 장군과 미국인 훈련관들이 앉았다. 다노배 장군이 일어나,

"오늘부터 아메리카 합중국과 대한 민국 임시 정부와의 적 일본을 항거하는 비밀 공작이 시작된다"

고 선언하였다.

다노배 장군과 내가 정문을 나올 때에 활동 사진의 촬영이 있고 식이 끝났다.

이튿날 미국 군관들의 요청으로, 훈련받은 학생들의 실지의 공작을 시험하기로 하여 두곡(杜曲)에서 동남으로 40리, 옛날 한시에 유명한 종남산(終南山)으로 자동차를 몰았다. 동구에서 차를 버리고 5리쯤 걸어가면 한 고찰이 있는데 이곳이 우리 청년들이 훈련을 받은 비밀 훈련소였다. 여기서 미국 군대식으로 오찬을 먹고 참외와 수박을 먹었다.

첫째로 본 것은 심리학적으로 모험에 능한 자, 슬기가 있어서 정탐에 능한 자, 눈과 귀가 밝아서 무선 전신에 능한 자를 고르는 것이었다. 이 시험을 한 심리학자는, 한국 청년이 용기로나 지능으로나 다 우량하여서 장래에 희망이 많다고 결론하였다.

다음에는 청년 일곱을 뽑아서 한 사람에게 숙마바 하나씩을 주고, 수백 길이나 되는 절벽 밑에 내려가서 나뭇잎 하나씩을 따가지고 오라는 시험이었다. 일곱 청년은 잠간 모여서 의논하더니 그들의 숙마바를 이어서 한 긴 바를 만들어 한 끝을 바위에 매고 그 줄을 붙들고 일곱이 다 내려가서 나뭇잎 하나씩을 따 입에 물고 다시 그 줄에 달려 일곱이 차례차례로 다 올라왔다. 시험관은 이것을 보고 크게 칭찬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중국 학생 4백 명을 모아놓고 시켰건마는 그들이 해결치 못한 문제를 한국 청년 일곱이 훌륭하게 하였소. 참으로 한국 사람은 전도 유망한 국민이오."

일곱 청년이 이 칭찬을 받을 때에 나는 대단히 기뻤다.

다음에 폭파술, 사격술, 비밀히 강을 건너가는 재주 같은 것을 시험하여 다 좋은 성적을 얻은 것을 보고 나는 만족하여 그 날로 두곡으로 돌아왔다.

이튿날은 중국 친구들을 찾을 차례로 서안으로 들어갔다. 두곡서 서안이 40리였다.

호종남(胡宗南) 장군은 출타하여서 참모장만을 만나고 성 주석 축소주(祝紹周) 선생은 나와 막역한 친우라 이튿날 그의 사저에서 석반을 같이 하기로 하였다. 성당부에서는 나를 위하여 환영회를 개최한다 하고, 서안 부인회에서는 나를 환영하기 위하여 특별히 연극을 준비한다 하고, 서안의 각 신문사에서도 환영회를 개최하겠으니 출석하여 달라는 초청이 왔다.

나는 그 밤을 우리 동포 김종만(金鍾萬) 씨 댁에서 지내고 이튿날은 서안의 명소를 대개 구경하고 저녁에는 어제 약속대로 축 주석 댁 만찬에 불려갔다. 식사를 마치고 객실에 돌아와 수박을 먹으며 담화를 하는 중에 문득 전령이 울었다. 축 주석은 놀라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중경에서 무슨 소식이 있나 보다고 전화실로 가더니 잠시 후에 뛰어나오며,

"왜적이 항복한다오!"

하였다.

'아! 왜적이 항복!'

이것은 내게 기쁜 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었다. 천신만고로 수년간 애를 써서 참전할 준비를 한 것도 다 허사다.

서안과 부양에서 훈련을 받은 우리 청년들에게 각종 비밀한 무기를 주어 산동에서 미국 잠수함을 태워 본국으로 들여보내어서 국내의 요소를 혹은 파괴하고 혹은 점령한 후에 미국 비행기로 무기를 운반할 계획까지도 미국 육군성과 다 약속이 되었던 것을 한 번 해보지도 못하고 왜적이 항복하였으니 진실로 전공이 가석하거니와 그보다도 걱정되는 것은 우리가 이번 전쟁에 한 일이 없기 때문에 장래에 국제간에 발언권이 박약하리라는 것이다.

나는 더 있을 마음이 없어서 곧 축씨 댁에서 나왔다. 내 차가 큰 길에 나설 때에는 벌써 거리는 인산인해를 이루고 만세 소리가 성중에 진동하였다.

나는 서안에서 준비되고 있던 나를 위한 모든 환영회를 사퇴하고 즉시 두곡으로 돌아왔다. 와 보니 우리 광복군은 제 임무를 하지 못하고 전쟁이 끝난 것을 실망하여 침울한 분위기에 잠겨 있는데 미국 교관들과 군인들은 질서를 잊을이 만큼 기뻐 뛰고 있었다. 미국이 우리 광복군 수천 명을 수용할 병사를 건축하려고 일변 종남산에서 재목을 운반하고 벽돌가마에서 벽돌을 실어 나르던 것도 이날부터 일제히 중지하고 말았다.

내 이번 길의 목적은 서안에서 훈련받은 우리 군인들을 제1차로 본국으로 보내고 그 길로 부양으로 가서 거기서 훈련받은 이들을 제2차로 떠내 보낸 후에 중경으로 돌아감이었으나 그 계획도 다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내가 중경서 올 때에는 군용기를 탔으나 그리로 돌아갈 때에는 여객기를 타게 되었다.

중경에 와 보니 중국인들은 벌써 전쟁 중의 긴장이 풀어져서 모두 혼란한 상태에 빠져 있고 우리 동포들은 지향할 바를 모르는 형편에 있었다. 임시 정부에서는 그 동안 임시 의정원을 소집하여 혹은 임시 정부 국무 위원회 총사직을 주장하고, 혹은 이를 해산하고 본국으로 들어가자고 발론하여 귀결이 못 나다가 주석인 내게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3일간 정회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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