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백리 김두남 관련 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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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영 작성일06-11-21 12:30 조회1,598회 댓글1건본문
金安州一卿斗南 挽 171_295c
憐君白首赴西州。總爲家貧百口謀。
宦迹乍臨都護府。旅魂旋斷百祥樓。
升沉有數人何與。淸白留名世罕儔。
同甲舊交生死別。不堪隣笛淚雙流。
옥오재집 玉吾齋集卷之四
송상기 [宋相琦, 1657~1723]
본관 은진(恩津). 호 옥오재(玉吾齋). 자 옥여(玉汝). 시호 문정(文貞). 송시열(宋時烈)의 문인. 1684년(숙종 10)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 수찬(修撰) 등을 지냈다. 1689년 부교리(副校理) 때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南人)이 득세하자 낙향했다가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로 세상이 바뀌어 장령(掌令)이 되었다. 1702년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노론(老論)의 중신(重臣)으로서 예조판서 등 요직을 두루 거쳐 이조판서가 되었으나 1718년 민회빈(愍懷嬪)의 시호(諡號) 개정을 반대, 파직되었다가 곧 예조판서에 기용되고 돈령부 판사(敦寧府判事) 등을 지냈다. 1722년(경종 2) 신임사화(辛壬士禍) 때 강진(康津)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학문과 문장에 뛰어났다. 영조 초에 관작이 복구되었다. 문집《옥오재집(玉吾齋集)》이 있다.
청백리 김두남관련 시문(2)
士珍宅餞飮安州金使君 一卿 斗南丈南原朴使君直卿襄陽李使君聖珍咸平李使君相甫 瑞章 席上。口占。 189_174b
親友如星散曉空。同時除邑問誰䧺。
靑州樓閣名關外。峴首風烟冠嶺東。
瘴土莫嫌卑濕地。仙居猶占廣寒宮。
箕山太守偏榮孝。好奉潘輿至樂融。
又占一律。錄奉金使君一卿丈。 189_174b
關雲極目動新愁。梧葉蟬聲况早秋。
今日朋樽二樂閣。明朝仙舃百祥樓。
千尋粉堞閑鳴柝。十隊紅粧對打毬。
聞說博陵留美政。好將餘化遍玆州。
겸재집 謙齋集卷之十一
조태억 [趙泰億, 1675~1728]
본관 양주(楊州). 자 대년(大年). 호 겸재(謙齋).태록당(胎祿堂). 시호 문충(文忠). 1693년(숙종 19) 진사가 되고, 1702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로 급제, 정언(正言) 등을 거쳐 1707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문학(文學) ·교리(校理)가 되고, 1709년 대사성에 올라 통신사(通信使)가 되어 일본에 다녀왔다. 공조 ·예조 참의가 되고, 판결사(判決事)를 거쳐 1721년(경종 1) 경상도관찰사로 나갔다가 호조참판 때 세제(世弟:英祖)의 책봉과 대리청정을 반대하여 철회시켰다.
신임사화(辛壬士禍)를 일으켜 노론을 거세하고 정권을 잡아 이듬해 형조판서가 되고, 공조.호조의 판서로 대제학을 겸하였다. 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 즉위의 반교문(頒敎文)을 작성하고, 우의정에 승진한 뒤 이듬해 좌의정이 되었으나 민진원(閔鎭遠) 등의 논척으로 삭직되었다. 1727년(영조 3)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재차 좌의정에 복직된 후 이듬해 병으로 사직하고, 돈령부영사(敦寧府領事)에 전임되었다. 1755년 나주(羅州)의 벽서사건으로 관작이 추탈되었다. 초서(草書) ·예서(隸書)를 잘 썼으며, 영모(翎毛)를 잘 그렸다. 문집에《겸재집(謙齋集)》이 있다.
댓글목록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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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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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고생끝에 찾아내신 보석들입니다. 멋들어진 번역이 남았군요. 우선 홈에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