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게시판

''장군의 외손녀'' 위연홍씨 국적회복 못해 ''쪽방'' 전전

페이지 정보

김태훈 작성일06-11-21 21:14 조회1,598회 댓글1건

본문

''장군의 외손녀'' 위연홍씨 국적회복 못해 ''쪽방'' 전전
[세계일보 2006-11-21 20:09]    go_newspaper.gif
aoo1122-01-1.jpg
21일 오후 서울 도심의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부근 한 고시원에서 중년 여성이 가파른 계단을 힘겹게 오르내리며 이삿짐을 나르고 있었다. “이런 모습을 보이려고 외할아버지 나라에 온 게 아닌데….” 긴 한숨을 토해낸 이 여성은 국가보훈처 권유로 지난해 12월 말 중국에서 영구 귀국한 백야 김좌진 장군의 외손녀인 위연홍(57·여)씨였다.

1995년 광복 50주년 사업의 일환으로 고국 땅을 처음 밟았던 위씨에게 외할아버지의 나라는 반드시 돌아가야만 할 ‘정신적 고향’이었다. 비록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가 아니라는 이유로 중국에선 ‘비적(도적떼)’쯤으로 치부됐던 외할아버지이지만 위씨에게는 한없는 숭배의 대상이었다.

그랬기에 지난해 보훈처로부터 영구 귀국 권유를 받았을 때 ‘드디어 할아버지 나라에서 살 수 있다’는 기쁨에 밤잠을 설쳤다. 중국 정부로부터 백야의 외손녀임을 입증할 공증서류를 받는 데만 수개월이 걸렸지만 조금도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나 그로부터 1년이 지난 현재 위씨는 1평짜리 쪽방에서 이번 겨울을 나야 할 처지로 전락했다.

딸까지 중국에 남겨두고 홀몸으로 귀국했지만 고국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쉬울 것이라 믿었던 국적 회복이 자꾸 늦춰졌다. 정작 국적 회복 신청서를 나눠 주며 귀국을 권유했던 보훈처는 “조금만 더 기다려라” “추가 증빙서류가 필요하다”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그때부터 위씨에겐 겨울 추위보다 매서운 시련이 찾아왔다. 한국 정부의 요구대로 추가 서류를 갖추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귀국 때 임시로 받은 F-1(방문동거)비자로는 정상적인 취업이 막혀 있어 아는 이의 집에 거처하며 하루하루 생계를 해결했다.

“의료보험이 되지 않아 몸이 아픈데도 병원에 가지 못하고 약으로 버티기 일쑤였다”는 위씨는 “그래서 심하게 아플 때는 보험 혜택이 되는 중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까지도 했다”고 털어놨다.

그는 요즘 주변에서 국적 회복 신청에 지쳐 중국으로 되돌아가는 독립운동가 후손들을 볼 때마다 자신도 포기하고 싶다는 유혹을 느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장군의 후손으로서 위엄을 지키며 나라를 사랑하라”는 어머니(김강자 여사·2003년 작고)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서도 여기서 포기할 수 없다는 일념으로 지난 1년을 버텨냈다고 말했다.

“보상금이나 금전적 혜택을 바라는 게 아니에요. 그저 국적을 되찾아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보람찬 일을 하고 싶을 뿐입니다. 최소한 불법 이주노동자 취급만은 하지 말아줬으면 해요.”

감정이 북받치는지 위씨는 이삿짐 보따리에서 백야의 초상화를 꺼내 매만지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위씨의 국적 회복 지연에 대해 보훈처 관계자는 “위씨를 초청한 것은 김좌진 장군의 후손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있어서가 아니라 중국 현지에서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라며 “위씨가 김 장군의 후손이 맞다는 증거자료를 찾는 과정이므로 언제 신청이 받아들여질지 모른다”고 말했다.

장원주 기자 strum@segye.com

ⓒ 세계일보&세계닷컴(www.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세계닷컴은 한국온라인신문협회(www.kona.or.kr)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

댓글목록

김항용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항용
작성일

  독립운동가 김좌진장군 외손녀님의 안타까운 소식 잘 읽었습니다. 부디 국가 보훈처나 사회단체로부터 시급한 대책이 나오길 빕니다.
그런데 이 내용은 후안동김씨(신안동김씨) 홈페이지에 더욱 강조하여 싣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김좌진장군은 후안동김씨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곳은 선안동(구안동)김씨 홈입니다.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