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백범일지( 66)기적장강만리풍(寄跡長江萬里風)9. 드디어 고국으로 돌아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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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6-11-30 09:46 조회1,464회 댓글1건본문
9. 드디어 고국으로 돌아오다
중경의 기후는 심히 건강에 좋지 못하여 호흡기병이 많다. 7년간에 우리 동포도 폐병으로 죽은 자가 80명이나 된다. 9월 초생부터 이듬해 4월까지는 운무가 껴서 볕을 보기가 드물고 기압이 낮은 우묵한 땅이라, 지변의 악취가 흩어지기를 아니하여 공기가 심히 불결하다. 내 맏아들 인도 이 기후의 희생이 되어서 중경에 묻혔다.
11월 5일에 우리 임시 정부 국무 위원과 기타 직원은 비행기 두 대에 갈라 타고 중경을 떠나서 다섯 시간만에, 떠난 지 13년만에 상해의 땅을 밟았다. 우리 비행기가 착륙한 비행장이 곧 홍구 신공원(虹口新公園)이라 하는데 우리를 환영하는 남녀 동포가 장내에 넘쳤다. 나는 14년을 상해에 살았건마는 홍구 공원에 발을 들여놓은 일이 일찍 없었었다.
신공원에서 나와서 시내로 들어가려 한즉 아침 여섯 시부터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6천 명 동포가 열을 지어서 고대하고 있다. 나는 거기 있는, 길이 넘는 단 위에 올라가서 동포들에게 인사말을 하였다. 나중에 알고 본즉, 그 단이야말로 13년 전 윤봉길 의사가 왜적 백천 대장 등을 폭격한 자리에 왜적들이 그 일을 기념하기 위하여 단을 모으고 군대를 지휘하던 곳이라고 한다. 세상에 우연한 것은 없다고 생각하였다.
나는 양자반점(楊子飯店)에 묵었다. 13년은 인생의 일생에는 긴 세월이었다. 내가 상해를 떠날 적에 아직 어리던 이들은 벌써 장정이 되었고, 장정이던 사람들은 노쇠하였다. 이 오랜 동안에 까딱도 하지 아니하고 깨끗이 고절을 지킨 옛 동지 선우혁(鮮于爀), 장덕로(張德櫓), 서병호(徐丙浩), 한진교(韓鎭敎), 조봉길(曺奉吉), 이용환(李龍煥), 하상린(河相麟), 한백원(韓栢源), 원우관(元宇觀) 제씨와 서병호 댁에서 만찬을 같이 하고 기념으로 촬영하였다.
한편으로는 상해에 재류하는 동포들 중에서 부정한 직업을 하는 이가 적지 않다는 말은 나를 슬프게 하였다. 나는 우리 동포가 가는 곳마다 정당한 직업에 정직하게 종사하여서 우리 민족의 신용과 위신을 높이는 애국심을 가지기를 바란다.
나는 법조계 공동 묘지에 아내의 무덤을 찾고 상해에서 10여 일을 묵어서 미국 비행기로 본국을 향하여서 상해를 떠났다. 이동녕 선생, 현익철 동지 같은 이들이 이역에 묻혀서 함께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것이 유감이었다.
나는 기쁨과 슬픔이 한데 엉클어진 가슴으로 27년 만에 조국의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그리운 흙을 밟으니 김포 비행장이요, 상해를 떠난 지 세 시간 후였다.
나는 조국의 땅에 들어오는 길로 한 가지 기쁨과 한 가지 슬픔을 느꼈다. 책보를 메고 가는 학생들의 모양이 심히 활발하고 명랑한 것이 한 기쁨이요, 그와는 반대로 동포들이 사는 집들이 납작하게 땅에 붙어서 퍽 가난해 보이는 것이 한 슬픔이었다.
동포들이 여러 날을 우리를 환영하려고 모였더라는데, 비행기 도착 시일이 분명히 알려지지 못하여 이날에는 우리를 맞아주는 동포가 많지 못하였다. 늙은 몸을 자동차에 의지하고 서울에 들어오니 의구한 산천이 반갑게 나를 맞아 주었다.
내 숙소는 새문 밖 최창학(崔昌學) 씨의 집이요, 국무원 일행은 한미 호텔에 머물도록 우리를 환영하는 유지들이 미리 준비하여 주었었다.
나는 곧 신문을 통하여 윤봉길, 이봉창 두 의사와 강화 김주경 선생의 유가족을 만나고 싶다는 뜻을 말하였더니 윤 의사의 아드님이 덕산(德山)으로부터 찾아오고, 이 의사의 조카따님이 서울에서 찾아오고, 김주경 선생의 아드님 윤태(允泰) 군은 38 이북에 있어서 못 보고 그 따님과 친척들이 혹은 강화에서, 혹은 김포에서 와서 만나서 반갑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였다.
그러나 선조의 분묘가 계시고 친척과 고구가 사는 그리운 내 고향은 소위 38선의 장벽 때문에 가 보지 못하고 재종 형제들과 종매들의 가족이 곧 상경하여서 반갑게 만날 수가 있었다.
군정청에 소속한 각 기관과 정당, 사회 단체, 교육계, 공장 등 각계가 빠짐없이 연합 환영회를 조직하여서 우리는 개인의 자격으로 들어왔건마는 '임시 정부 환영(臨時政府歡迎)'이라고 크게 쓴 깃발을 태극기와 아울러 높이 들고 수십 만 동포가 서울 시가로 큰 시위 행진을 하고 그 끝에 덕수궁에 식탁이 4백여, 기생이 4백여로, 환영연을 배설하고 하지 중장 이하 미국 군정 간부들도 출석하여 덕수궁 뜰이 좁을 지경이었으니 참으로 찬란하고 성대한 환영회였다.
나는 이러한 환영을 받을 공로가 없음이 부끄럽고 미안하였으나, 동포들이 해외에서 오래 신고한 우리를 위로하는 것이라고 강잉하여 고맙게 받았다.
어느덧 해가 바뀌었다. 나는 38 이남만이라도 돌아보리라 하고 제1노정으로 인천에 갔다. 인천은 내 일생에 뜻깊은 곳이다. 스물 두 살에 인천 감옥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가 스물 세 살에 탈옥 도주하였고, 마흔 한 살 적에 17년 징역수로 다시 이 감옥에 이수되었었다. 저 축항에는 내 피땀이 배어 있는 것이다. 옥중에 있는 이 불효를 위하여 부모님이 걸으셨을 길에는 그 눈물 흔적이 남아 있는 듯하여 마흔 아홉 해 전 기억이 어제런 듯 새롭다. 인천서도 시민의 큰 환영을 받았다.
제2노정으로 나는 공주 마곡사를 찾았다. 공주에 도착하니 충청남북도 11군에서 10여만 동포가 모여서 나를 환영하는 회를 열어주었다.
공주를 떠나 마곡사로 가는 길에 김복한(金福漢), 최익현(崔益鉉) 두 선생의 영정 모신 데로 찾아서 배례하고 그 유가족을 위로하고 동민의 환영하는 정성을 고맙게 받았다. 정당, 사회 단체의 대표로 마곡사까지 나를 따르는 이가 3백 50여 명이었고, 마곡사 승려의 대표는 공주까지 마중을 왔으며, 마곡사 동구에는 남녀 승려가 도열하여 지성으로 나를 환영하니 옛날에 이 절에 있던 한 중이 일국의 주석이 되어서 온다고 생각함이었다.
48년 전에 머리에 굴갓을 쓰고 목에 염주를 걸고 출입하던 길이다. 산천도 예와 같거니와 대웅전에 걸린 주련도 옛날 그대로다.
'却來觀世間
猶如夢中事'그 때에는 무심히 보았던 이 글귀를 오늘에 자세히 보니 나를 두고 이른 말인 것 같았다.
댓글목록
김행순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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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행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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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솔내님의 글을 보면서 김구선생님의 전기를 하나 갖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마침 <겨레의 큰사람 김구>라는 제목으로 시인 신경림 선생님의 글과 전각하시는 정병례 선생님의 그림으로 된 책을 전각가 정병례 님으로부터 선물받았습니다. 창비에서 '내가 만난 역사 인물 이야기' 시리즈 컬러책입니다. 초중고생들이 보기에 아주 재미나게 꾸며져있네요.^^
솔내님께서 올려주시는 글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마치 사진과 함께 보는 듯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