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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의 청주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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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7-01-04 01:33 조회1,85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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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시대의 안동> (안동시,안동대학교 안동문화연구소, 2006년)


(2) 청주정씨

   청주정씨가 안동에 정착한 것은 려말이다. 청하군 정책이 상락군 김방경의 손서가 되어 아들 오(설헌, 문극공), 포(설곡, 대사간) 형제가 외가를 따라 안동부西 회곡동에 처음으로 거주하였다고 <영가지>(1608년, 용만 권기 편찬)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족보에는 설헌의 아들 침(퇴은, 봉선대부 소부정윤)이 고려가 망한 후에 先外家 안동 별업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아무튼 청주정씨의 안동 이거가 려말선초임에는 틀림없다.

퇴은의 증손자 보문(진전직)의 初娶는 광산 김무의 딸이고, 再娶는 진성 이정의 딸이니, 안동의 명문사족과 연혼하여 지내동 모산(모사골)에 계속 거주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두(우윤, 죽헌)는 馬巖으로, 그 후손 중에는 다시 도진(진답촌)으로 이거하였다. 죽헌의 아들 사성(지헌, 현감), 사신(매창, 문과 판결사), 사의는 모두 문명이 있었고,

보문의 3자는 원로(현감)이고, 그 증손 탁(약포, 정간공)은 좌의정에 올랐다.

   한편 설곡 포는 일찍이 요절하였으나 아들 추(원재)가 목은 이색 등과 동방급제하여 간관이 되어 서울에 정착하게 되었다.



■ <안동시청> 홈페이지

'영가지'에 의하면 청주정씨가 안동에 살기는 공민왕때 첨의평리를 지내고 서원군에 봉해진 정오와 우간의대부를 지낸 그 아우 정포 형제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영가지' 방리편 회곡촌조에 '마을 어귀에 남향으로 된 큰 밭이 있으니, 예로부터 전하기를 충렬공이 여기서 살았는데, 설헌과 설곡형제도 외가로 하여, 와서 살다'라고 했음을 보아, 설헌 형제가 이곳 회곡에 입향하게 되기는 그 외가의 반연이었음을 알수 있다.



■ 동문선 제11권 /오언배율(五言排律)

좌랑 외삼촌에게 드리는 시[서문도 함께 싣다] [贈佐郞舅詩幷序] /정포(鄭?)


지정(至正) 2년(=1342년) 가을에, 내(=정포)가 형님 사겸(思謙, =정오)과 함께 남쪽으로 귀양왔다가 10월에 일이 있어 복주(福州)에 모여 닷새 동안을 머물렀다. 그때 외삼촌 김좌랑(金佐郞)이 복주의 전나무골[檜谷]에 한가로이 사는데, 어느 날 사겸 형과 나를 청하여 놀고 유목사(柳牧使)와 양통판(梁通判)이 자리를 같이하여 주안(酒案) 사이의 담소(談笑)의 즐거움이 평시(平時)와 같아 하루 종일을 놀고 갔었다. 그 다음해 여름에 이르러 교지(敎旨)가 내려 나를 복주에, 사겸형을 청주읍(淸州邑)에 안치(安置)하게 하였는데, 막상 이르러 본즉 유목사와 양통판이 다 사직하여 갔고 외삼촌 또한 계시지 않아, 황량(荒凉)한 여사(旅舍)에 함께 즐길 사람이 없어 강산 천 리에 생각만 아득히 되풀이하였다. 한 달 남짓 있노라니 외삼촌이 서울서 돌아와 내가 유락(流落)해 있음을 불쌍히 여겨, 나를 위로할 길을 생각하여 날마다 즐거운 놀이를 벌여 산에 오르고 물에 놀면서 술을 마시고 시를 지으니, 마음이 헌칠, 정신이 흐뭇하여 영욕(榮辱)을 다 잊어 버리고 숫제 자신이 한인(閒人) ㆍ 은사(隱士)나 된 듯, 귀양살이의 신세임을 깨닫지 못할 정도였다. 아아, 인생의 모였다 헤어짐이 모두 수(數)가 있으니, 이제 내가 이곳에 귀양와 있음에 유(柳)와 양(梁)은 다 가고 홀로 외삼촌만이 계심은 어찌 하늘이 우리 두 사람으로 하여금 다시 예서 상종(相從)하게 함이 아니랴. 감탄이 그지없어서 이 시를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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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雪谷先生集 /詩 (정포)

永嘉。同諸公過金佐郞 承古 舅山莊。

鞍馬悤悤閱數州。夕陽携手更登樓。謫來未厭湖山好。事去空驚歲月?。半壁殘燈孤館夜。傍?疏樹故園秋。欲知別後相思意。天際長江??流。


설곡집(雪谷集)

서지사항 :

정포(鄭?) 著. 2권(37판). 목판본(木板本). 한국문집총간 3집.

저자소개 :

정포(1309∼1345)의 자는 중부(仲孚), 호는 설곡(雪谷), 본관은 청주(淸州). 최해(崔瀣)의 문인.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에 이름.

문집구성 :

저본은 子 추(樞, *공권)가 수집·편차하여 초간한 뒤, 후손 구(逑)가 1609년 저자와 자손(子孫)의 시문을 모아 합편·간행한「서원세고(西原世稿)」중에서 발췌한 것임.



김방경→3김순(1258-1321)→4김영후→1김천→4김사형(1341-1407)

김방경→김순→여서 정책


정의(대장군)→자→손 정해(초명 정현계, 1254-1305)→1정책, 2정이

정책→1정오(?-1359)→정침→자→정약→1정보문→2정원로→정탁

정책→2정포(1309-1345)→정추→정총(공신)→정곤수(공신) /정구(한강)

정포→정공권(초명 정추)→1정총, 2정승, 3정탁, 4정지




ꁾ 

1)

1300년 이전, (김순의 큰 사위) 정책의 부인 김씨(金氏)의 조부인 충렬공[忠烈公 김방경(金方慶)]이 매번 “책(㥽)은 진짜 사나이다.”라고 칭찬을 하곤 하였다.


2)

1305년 4월, (정책의 부) 정해((鄭瑎, 1254-1305)가 공거(貢擧)를 맡아서 한종유(韓宗愈)·김영돈(金永旽)·장자빈(張子贇)등 33명을 뽑았는데 이때에 훌륭한 인재를 많이 얻었다고들 하였다. 정승(政丞) 한종유(韓宗愈), 정승 김영돈(金永旽)은 모두 공(정해)의 문인이었다.


3)

청하군 정책이 상락군 김방경의 손서가 되어 아들 정오(설헌, 문극공), 정포(설곡, 대사간) 형제가 외가를 따라 안동부西 회곡동에 처음으로 거주하였다고 <영가지>(1608년, 용만 권기 편찬)에 기록되어 있다.


4)

1321년 정책(鄭漬)은 내시 중정대부 친어군대호군(內侍 中正大夫 親御軍大護軍) 이었다. 이해에 문영공(김순) 별세.


5) 

1332년 정책은 대광 청하군(大匡 淸河君) 이었다. 배위 김씨는 먼저 죽었다.(1321년에서 1332년 사이에). 이해에 문영공(김순)처 허씨 별세.


6)

1342년 10월, 1343년 여름, 문영공(김순) 외손자인 정오(?-1359), 정포(1309-1345) 형제가 남쪽에 유배되어 왔을때 회곡리에 들렸다. 그때 외삼촌 김좌랑(金佐郞) 승고承古가 복주의 전나무골[檜谷]에 한가로이 살고 있었는데, 산장(山莊)이 있었다.


7)

(청주정씨)족보에는 설헌 정오의 아들 정침(퇴은, 봉선대부 소부정윤)이 고려가 망한 후에 先外家 안동 별업(*복주 회곡)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8)

정오의 현손 정보문(진전직)의 初娶는 광산 김무의 딸이다. 김무는 광산김씨 안동 입향조로서 배위가 안동김씨여서 처가 인연으로 안동에 입향하였다고 한다.


9)

1600년대 초, 정포의 후손 정구, 충렬공 제문을 지었다.


♠ 한강 정구(1543-1620) ---문영공(김순)의 외손자 정포의 후손

한강 정구는 고려시대 문영공(휘순)의 큰 사위 정책의 둘째아들 설곡 정포(설곡시고가 전해 옴)의 후손으로 한강집을 지었는데, 이 한강집에 충렬공 제문이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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