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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문인록 - 몽촌 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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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영 작성일07-01-08 16:34 조회1,430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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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夢村 金睟

이조 宣祖 때의 文臣의 金睟의 字는 子昂이고 호는 夢村이며 본관이 安東이다.

明宗2年  丁未(1547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일찍부터 陶山에 내려와 退溪先生 門下에서 수학한 몽촌은 才質이 뛰어나 일찍이 司馬試에 合格한 후 26세 때인 宣祖 6年(1573년) 文科에 급제하여 藝文館 檢閱에 발탁되면서 宦路에 나서게 되었다.

그후 弘文館 修撰, 司諫院 正言과 司諫, 弘文館 直提學, 戶曹參議, 承政院 承旨등 여러 관직을 역임한후 壬辰倭亂 때에는 慶尙道 觀察使가 되어 招諭使 金鶴峯과 義兵大將 郭再祐의 抗戰을 뒷받침했으나 慶尙道 전역이 왜군에 함락되자 패전의 책임을 지고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다음해(宣祖 26年 癸巳)에 判度支使로 다시 관직에 등용되어 10萬 明나라 援軍의 왜적 격퇴작전을 지원하면서 都摠管을 엮임하였으며 壬亂이 끝난 후에는 戶曹判書에 올랐다가 晩年에는 判中樞府事에 제수되었으나 身病을 이유로 이내 사임 하였다.

十九史略을 개수하여 注를 달기도 한 夢村은 학문에도 뛰어났으며 光海君 7年(1615년)에 서거하니 향년 69세였다.

청렴결백하여 淸白吏錄에 올랐고 사후 昭懿公의 시호가 내렸다.

先生 易簀時 24세의 젊은 선비였지만 先生의 서거를 지극히 애도하며 다은과 같은 祭文을 지어 남겼다.

祭文

산림에 해가 길어 학문을 강한 공이 깊도다,

왼쪽은 그림이요, 오른쪽은 箴인데 오직 날로 바라고 바랐도다.

敬을 지키고 이치를 연구하니, 두 가지에 아무데도 치우치지 않았도다.

정하게 생각하고 힘써 행하기를 해가 다하도록 마지 아니하였도다.

학문의 지경이 이미 깊으니, 밝고 선 곳에 우뚝 높아서 푸른 하늘의 맑음이요, 태산의 喬嶽이었다.

거룩한 시대의 참 선비요, 온 백성의 선각자로서 布帛 같은 글과 菽粟 같은 글씨를 일삼으니 또한 晋魏를 뛰어 넘었도다.

아아! 先生은 世上에 드물게 빼어나서 깊이 기르고 두텁게 쌓아 펴 놓으니 크게 이루었도다.

소문을 듣고 義를 사모하여 찾는 사람이 멀리서 오니, 대접하기는 和로써 하고 가르침에는 게으르지 않아서, 이끌고 타이르고, 가르쳐서 먼저 근본을 세우고 차례가 있어 순수히 나아가니 어둡고 어리석음을 열어 주었도다.

맑고 깊으며 크고 넓으니 사람을 대함이 끝이 없었도다.

출전: 퇴계문인록(退溪門人錄) (1983년 李熙大 編著)

댓글목록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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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이 제문은 몽촌공께서 퇴계선생의 서거를 애도하여 지은 것인가요?

김태영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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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예 맞습니다.
생원 김수가 스승 퇴계선생의 서거를 애도하며 지은 '뇌문'의 일부를 이 문인록에 실은 것으로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