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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백범일지(72)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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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7-01-11 16:06 조회1,52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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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연재했던 백범일지는 연보 게재로 끝냅니다. 감사합니다.

연보

1876(1세) : 7월 11일 황해도 해주 백운방(白雲坊) 기동(基洞 : 텃골, 뒤에 벽성군 운산면 오담리 파산동)에서 김순영(金淳永)의 외아들로 태어남. 아버지는 빈농으로 당 27세. 어머니는 곽양식(郭陽植)의 장녀로 곽낙원(郭樂圓) 당 17세. 아명은 창암(昌巖).

1879(4세) : 천연두를 앓음.

1880(5세) : 집안이 강령(康翎) 삼거리로 이사하다.

1884(9세) : 조부상을 당하다. 국문과 한문을 배우기 시작하다.

1887(12세) : 집에 서당을 만들고 이 생원을 초빙하여 한문 공부를 하다.

1889(14세) : 통감, 사략 등의 병서(兵書)를 읽다.

1890(15세) : 학골 정문재(鄭文哉)의 서당에 통학하며 당시(唐詩), 대학, 과문(科文) 등을 배우다.

1892(17세) : 과거에 응시했다가 낙방. 매관매직(賣官賣職)의 타락한 과거에 실망. 그 후 풍수와 관상 공부 등을 했고, 병서를 탐독. 동학(東學)에 입도한 후 이름을 창수(昌洙)라 개명.

1893(18세) : 황해도 도유사(都有司)의 한 사람으로 뽑혀 충북 보은(報恩)에서 최시형(崔時亨) 대수주(大首主)를 만남.

1894(19세) : 팔봉 접주(八峰接主)로 동학군의 선봉이 되어 해주성(海州城)을 공략했으나 실패.

1895(20세) : 신천 안태훈(安泰勳) 진사를 찾아 몸을 의탁했고, 그의 아들인 소년 안중근을 만남. 당시에 명망이 높은 해서(海西) 거유(巨儒) 고능선(高能善)의 지도를 받음. 압록강을 건너가 김이언(金利彦)이 지휘하는 의병단에 참가.

1896(21세) : 2월 안악군 치하포(安岳郡  河浦)에서 일본 군사 간첩 토전양량(土田讓亮)을 죽여 국모(國母)의 원한을 풀다. 5월 2일 일경(日警)에 체포되어 인천 감리영에 투옥됨. 감옥에서 태서신사(泰西新史), 세계지지(世界地誌) 등을 읽고 신학문에 눈뜸.

1897(22세) : 7월에 사형이 확정되고, 고종(高宗)의 특명으로 사형 직전에 특사령이 내려짐.

1898(23세) : 3월 9일 밤 탈옥, 전국을 방랑하다가 공주 마곡사(麻谷寺)의 중이 됨.

1899(24세) : 환속하여 고향에 돌아옴.

1900(25세) : 김두래(金斗來)란 이름으로 바꾸고 다시 방랑길에 오름.

1901(26세) : 엄친(嚴親) 김순영 씨 세상을 떠남(12월 9일).

1902(27세) : 장연(長淵) 친척집에서 여옥(如玉)이라는 처녀와 약혼함.

1903(28세) : 여옥이 병으로 세상을 떠난 후 기독교에 입교함. 안창호(安昌浩)의 영매(令妹) 신호(信浩)와 약혼했으나 또 파혼이 되다.

1904(29세) : 신천 사평동 최준례(崔遵禮 : 당시 18세)와 결혼함.

1905(30세) :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이 준(李儁), 이동녕 등과 함께 구국 운동에 앞장섬.

1906(31세) : 해서 교육회 총감이 되어 학교 설립을 적극 추진함.

1907(32세) : 장녀 화경(化敬) 출생.

1908(33세) : 신민회를 통한 구국 운동에 앞장서는 한편 안악에 양산 학교(楊山學校)를 세움.

1909(34세) : 전국의 강습소를 순회하며 재령 보강학교(保强學校)의 교장이 되다. 10월 안중근 의사 사건에 연좌되어 해주 감옥에 투옥되었다가 석방됨.

1910(35세) : 11월 서울에서 열린 신민회 비밀 회의에 참석함.

1911(36세) : 1월 5일 사내 총독(寺內總督)을 암살하려 했다는 안명근(安明根) 사건 관련자로 체포되너 17년형을 언도받음.

1913(38세) : 옥중에서 이름을 구(九), 호를 백범(白凡)이라고 고침.

1914(39세) : 감형으로 7년의 형기를 끝내고 7월에 가출옥함.

1916(41세) : 출옥 후 김홍량(金鴻亮)의 동산평(東山坪) 농장 관리인으로 있으면서 농촌 계몽 운동에 힘씀.

1917(42세) : 장남 인(仁) 출생.

1919(44세) : 3.1운동 직후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 정부 초대 경무국장이 됨.

1922(47세) : 차남 신(信) 상해에서 태어남.

1923(48세) : 임시 정부 내무국장에 취임.

1924(49세) : 1월 1일 상해에서 부인 최 여사 폐렴으로 세상을 떠남.

1926(51세) : 12월 임시 정부의 원수(元首)인 국무령(國務領)에 취임.

1927(52세) : 헌법을 개정하여 임시 정부를 위원제로 고쳐 국무 위원에 취임.

1928(53세) : 자서전 '백범일지(白凡逸志)' 상권의 집필을 시작하다. 3월 이동녕, 이시영 등과 한국 독립당을 조직함.

1929(54세) : 5월 자서전 백범일지를 탈고하다. 재중(在中) 거류민 단장을 겸임.

1931(56세) : 한인 애국단(韓人愛國團)을 조직, 그 단장이 되어 독립 투사를 양성함.

1932(57세) : 1월 8일 이봉창(李奉昌) 일황(日皇) 저격에 실패. 4월 29일 윤봉길(尹奉吉) 의사로 하여금 상해 홍구 공원에서 폭탄을 던지게 함.

1933(58세) : 윤 의사 의거 후 신변이 위험해지자 강소성 가흥(江蘇省 嘉興)으로 피신. 가흥에서는 주애보(朱愛寶)라는 여자 사공에게 몸을 의탁함. 중국의 장개석 장군을 만나 친교를 맺고, 낙양 군관 학교(洛陽軍官學校)를 광복군 무관 양성소로 할 것을 결정함.

1934(59세) : 다시 임시 정부 국무령에 취임.

1935(60세) : 11월 가흥에서 임시 의정원 비상 회의를 열어 기구를 강화.

1936(61세) : 이동녕 등 동지들과 함께 한국 국민당을 창당.

1937(62세) : 임시 정부를 진강(鎭江)에서 장사(長沙)로 옮김.

1938(63세) : 민족주의 삼당(三黨) 통합 문제를 논의하던 남목청(南木廳)에서 조선 혁명당원 이운한(李雲漢)의 총격을 받아 1개월 동안 입원 가료함.

1939(64세) : 장사가 위험해지자 다시 광주(廣州)로 갔다가 장개석 주석의 도움으로 중경(重慶)으로 옮김. 다시 임시 정부 주석으로 취임. 어머니 곽씨 부인이 인후염으로 82세를 일기(一期)로 세상을 떠남.

1940(65세) : 5월 혁명 투쟁 각 단체를 통합, 한국 독립당에 집중케 하고 그 집행위원장에 취임. 군사 특파단(軍事特派團)을 섬서성 서안(陝西省 西安)에 상주케 하여 무장 부대 편성에 노력함.

1941(66세) : 12월 9일 임시 정부가 일본에 선전 포고함.

1942(67세) : 7월 임정과 중국 정부 사이에 광복군에 대한 정식 협정이 체결 공포됨. 광복군(光復軍)은 중국 각지에서 연합군과 공동 작전에 진력하게 됨.

1944(69세) : 2월 개정된 헌법에 따라 주석으로 재선됨. 섬서성 서안과 안휘성 부양(安徽省 阜陽)에 광복군 특별 훈련반을 설치하고 미국의 원조로 본토 상륙을 위한 군사 기술 훈련을 적극 추진키로 함.

1945(70세) : 2월 임시 정부가 일본군과 독일에 정식으로 선전 포고함. 장남 인이 호흡기병으로 세상을 떠남. 일본이 항복. 11월 23일 임시 정부 국무 위원 일동과 함께 개인 자격으로 환국함. 모스크바 삼상회의(三相會議)의 결정을 보고 12월 28일 이후 반탁 국민 운동을 적극 추진함.

1946(71세) : 2월 비상 국민 회의가 조직되어 그 총리에 취임. 인천, 마곡사 등 전국을 순회.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3 의사의 유골을 효창 공원에 봉안.

1947(72세) : 1월 비상 국민 회의가 국민 의회로 개편되어 그 부조석에 취임. 제2차 미소 공위(美蘇共委)가 열리자 반탁 투재 위원회의 활동을 이승만과 함께 추진. 11월 유엔 감시하의 남북 선거에 의한 정부 수립 결의안을 지지하다. 그의 정치 이념을 표현한 '나의 소원'을 발표.

1948(73세) : 2월 20일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泣告)함'을 발표. 4월 19일 남북 협상 참가차 평양으로 감. 5.10 선거 후부터는 건국 실천원 양성소(建國實踐員養成所)에 힘을 기울임.

1949(74세) : 6월 26일 경교장(京橋莊)에 안두희(安斗熙)의 흉탄에 맞아 서거. 7월 5일에 거족적인 국민장으로 효창 공원에 영면함.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 공로훈장 중장(重章)이 수여됨.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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