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문학기행/정철] (1)뭇 여인들이 풍류남아 송강을 사로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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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7-01-11 16:08 조회2,183회 댓글1건본문
경기문학기행/정철] (1)뭇 여인들이 풍류남아 송강을 사로잡고
경기도 고양시 신원동에는 ‘송강(松江)’이라 이름 붙여진 마을이 있다. 마을의 곳곳은 송강 정철(鄭澈 ; 1536-1593)과의 깊은 인연을 말해주고 있다. 마을 뒤편 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송강 부모의 묘에서 송강은 두 번에 걸쳐 시묘살이를 했다. 이외에도 송강의 가묘, 장수전설을 가지고 있는 송강고개, 송강이 막았다는 송강 보(湺), 송강이 낚시를 했다는 송강소 등이 있어 송강의 자취를 느끼게 해 준다.
1570년 4월에 부친상을 당한 송강은 경기도 고양군 신원에서 37살(1572) 되던 해 6월까지 2년여에 걸쳐 시묘살이를 하였다. 그리고 1573년 4월에 모친상을 당하자 1575년(40세) 5월까지 약 2년 동안 다시 시묘살이를 했다. 이러한 조선시대 시묘살이는 효를 행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덕목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관직에 나아갔던 인물도 시묘살이 할 동안에는 벼슬을 내 놓고 부모의 묘소를 살피는 것이 올곧은 선비가 반드시 지켜야 할 준칙이었다. 그러면 효행을 했다하여 나라에서는 다시 관직을 내려주는 것이 관례였다.
송강마을에 있는 송강문학관은 정철의 문학을 소상히 알려주고, 그 앞에는 송강문학비도 우뚝 솟아 있다. 그 문학비에는 송강이 이곳에 머물며 지은 시가 새겨져 있다.
새원(新院) 원주(院主)되어 시비(柴扉) 고쳐 닫고
유수청산(流水靑山)을 벗삼아 노니노라
아해야, 벽제(碧蹄)에 손이라커든 날 나갔다 하고려.(인터넷에서 깨지는 글자 현대어로 바꿈)
(새원 원주-경기도 고양에 있는 역원에서 자고 지키는 관원-가 되어 사립문을 걸러 닫고, 흐르는 물 푸른 산을 벗 삼아 지내노라. 아이야 벽제의 손님이 찾아와서 찾거든 내가 나가고 없다고 하거라.)
송강은 당쟁의 소용돌이가 빚어낸 일련의 사건을 지켜보다가 정치에 깊은 환멸을 느끼고 이곳에 은거한다. 이 작품에는 세상의 공명을 버리고 청산유수를 벗 삼아 지내고자 하는 의지와 또한 당시의 정치 모리배들을 배척하는 송강의 심정이 나타나 있다.
송강은 정승의 위치에까지 올랐으며 당쟁이 시작되자 서인의 영수 노릇을 했다. 정치적인 활동을 두고서는 시비가 엇갈리고 있으나 정치가로써 송강이 대단한 치적을 거두웠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1545년(명종 즉위년) 을사사화(乙巳士禍)로 인하여 부친이 유배당할 때 정철은 유배지를 따라다녔다. 1551년 부친이 사면을 받자 송강은 아버지를 따라 담양 창평에서 살게 되었다. 이후 27살의 나이로 벼슬길에 나가기 전까지 10년여 동안 이곳에서 송순․임억령․김윤제․김인후․양응정․기대승 등 당대 기라성 같은 학자․문인들을 스승으로 모시고 수학하였으며, 특히 면앙정(俛仰亭) 송순(宋純)에게서 국문시가를,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에게서 한시를 배웠다. 이렇게 송강은 그곳의 명사들과 교류하는 동안에 그 사이에 개척된 작품을 두루 계승하고 발전시켜 시조와 가사를 대단한 경지로 올려놓았다.
옛 선현들은 유배지 또는 초야에 묻혀 지내는 동안 저술 및 창작활동에 몰두하는 일면을 보인다. 정철 또한 이 기간에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 등 주옥같은 가사와 시조, 한시 등을 지었다. 김만중(金萬重)은 ≪서포만필(西浦漫筆)≫에서 “제나 말을 제나라 글로 써야 한다.”는 국민문학론을 언급하고, 우리 나라의 참다운 문장으로 송강의 <속미인곡>을 제일로 손꼽았다. 요즈음의 학자들은 송강을 조선조에서 가장 뛰어난 문학가로서 가성(歌聖)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파란만장했던 정철의 삶은 동인의 모함으로 사직하고 강화의 송정촌(松亭村)에서 끝이난다. 그때 그의 나이 58세였다. 생은 짧았지만 그는 시문집인 ≪송강집≫과 시가작품집인 ≪송강가사≫ 등에 주옥같은 작품과 숱한 일화를 우리에게 남겨 주었다.
댓글목록
김상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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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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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삼사 년 전 담양 들판의 야트막한 동산에 있는 면앙정에 올라 대나무숲을 바라보며 가사문학이라는 독특한 장르의 주인공들을 생각해 보는 시간 속에서 말을 몰아가는 부자의 모습을 보노라니 여유로움이 절로 생기더군요.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그렇게 시간이 흘러도 우리들 가슴속엔 항상 안분지족의 아름다움이 남아 있는 것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