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공 묘소에 근접한 김해의 묘소 이장관련 일기 소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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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7-01-15 11:07 조회1,605회 댓글2건본문
충렬공 묘소에 근접해 있던 광산김씨 김해의 묘소 이장과 관련한 광산김씨 문중의 일기문이 발견되어 이를 소개합니다.
지난 2006년 12월 군사공파 태영종친님께서 정보를 주시어 민추위 홈에서 자료를 구한 다음 어리석은 제가 1차 해석하고, 2007년 1월 9일, 제주의 익수종친님께 우편으로 최종 감수 받아 이를 종합 정리하였습니다. 이에 다음과 같이 몇 회로 나누어 소개해 올립니다.
1. 1626년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했던 충익공 김시양 선조님께서 안동의 충렬공 묘소에 근접해 있던 광산김씨 김해의 묘를 이장토록 한 기록이 우리 족보에는 다음과 같이 실려 있습니다.
<족보내 충렬공 묘소 발견과 관련한 내용 발췌>
1) 인용 문헌 출전 : 안동김씨 제학공 파보 13P. 충렬공 조.
2) 출판년도 : 1990.
3) 내용
<전략> 墓所 舊譜云 安東府禮安縣 時 禮安爲安東屬縣. 而失傳二百年 萬曆甲午 始尋瑩域. 麗王所爲神道碑 姓孫禮生 所竪碣 破折. 壬寅 改封立碑. 天啓丙寅 十二世孫時讓 按節本道 以失墓時 故翰林金垓之塚 逼近犯葬 啓請掘移 且以 床石狹小 改備. 姓孫 尙璘 議置墓田定以十月上旬 每歲享祠
4)해석문
묘소는 옛족보에 이르기를, "안동부 예안현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때 예안은 안동에 속한 현이었다. 그런데 200년간 실전되어 오다가 만력 갑오(1594년)에 비로소 묘소를 찾았다.
고려왕(충렬왕)이 세운 바 있는 신도비와 후손 예생(禮生-문온공 후손)이 세운 묘갈은 모두 부서졌다. 임인년(1602년)에 다시 봉분을 하고 비석(이시발 찬)을 세웠다.
천계 병인(1626년)에 12세손인 시양(時讓-제학공 후손)이 본도(경상도) 안절사(관찰사)로 와서 묘가 실전해 있을 때에 한림 김해(金垓-광산인)의 묘가 아주 가까이 범장(몰래 장사지냄)해 있었으므로 묘를 파내어 옮기도록 요청하였고, 또한 상석이 협소하여 다시 설비하였다.
후손 상린(尙璘-도평의공 후손)은 의논하여 묘전(墓田)을 설치하였고 10월 상순에 매년 향사하기로 정하였다.
2. 김해의 아우인 김령이 쓴 <계암일록(溪巖日錄)>과 김해의 아들인 김광계의 <매원유고(梅園遺稿)>에 실린 상기 김해의 묘소 이장과 관련한 생생한 기록을 소개합니다.
1)김령과 김광계 소개
가)김령과 계암일록
김령(金坽) 1577(선조 10)∼1641(인조 1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 자는 자준(子峻), 호는 계암(溪巖). 예안출신.
아버지는 현감 부륜(富倫)이며, 어머니는 평산신씨로 부호군(副護軍) 수민(壽民)의 딸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의 나이 17세에 유성룡(柳成龍)의 막하로 자진 종군하여 당시 명나라의 총병사 오유충(吳維忠)과 유격장 노득공(盧得功)두 사람으로부터 후한 대접을 받았을 정도로 학식이 숙성하였다.
그뒤 1612년(광해군 4)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등용된 뒤 여러 벼슬을 거쳐 주서에 이르렀으나, 광해군의 어지러운 정치를 비관하여 관직을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1618년 인목대비가 폐위되자 두문불출 독서로 소일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위험을 무릅쓰고 한양으로 인조를 찾아나섰으나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 요형(耀亨)을 시켜 소를 올리게 하고서 돌아왔다. 뒤에 신하로서 아들을 시켜 상소하는 것이 도리에 어긋났다는 격렬한 상소가 있었으나 인조가 이를 모두 무마시켰다.
그뒤로도 학덕을 잊지 못한 인조가 장령·보덕·헌납·사간 등으로 여러 차례 불렀으나 번번이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병자호란이 일어나 청나라 병사가 남한산성을 포위하자 가산을 모두 털어 의병들의 군량미로 충당하였으며, 끝내 남한산성이 함락되자 비분강개한 시 수편을 남겼다.
벼슬에서 물러나 죽을 때까지 처음에는 제자들과 경승지(景勝地)를 찾아 마음을 달래었으나, 마지막 20여년간은 문밖출입을 삼가하며 오가는 사람도 방에 앉아 영접하고 보내, 세상에서 영남 제1인이라고 불렀다.
1689년(숙종 15)에 도승지에 추증되었고, 영조 때는 원액(院額)이 하사되었다.
저서로는 《계암집 溪巖集》 6권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나)김광계와 매원유고, 매원일기
김광계(金光繼: 1580 ∼ 1646)
자는 이지(以志)요 호는 매원(梅園)이다. 아버지는 근시재(近始齋) 해(垓)이고, 어머니는 진성(眞城) 이씨(李氏)로 퇴계 선생의 조카인 재(宰)의 따님이다. 선조 13년(1580) 8월 예안 오천에서 태어나 인조 24년(1646)에 향년 64세로 몰하였다. 8세에「소학(小學)]을 배웠으며 14세에 양친을 여의고 슬퍼하며 예로써 상을 치름이 마치 성인과 같았다.
처음 대암(大菴) 박성(朴惺)에게 배우다가 안동부사로 부임한 정한강(鄭寒岡)에게 심경(心經) 등을 물어 학문이 크게 성취했다. 광해군 때에는 세상이 크게 어지러워 문을 닫고 학문을 닦으며 심성을 기르기에 전념했으며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에도 출세 영달을 탐탁히 여기지 않아서, 낙동강 언덕의 수석(水石)이 아름다운 한 절벽인 낙천(洛川) 위에 침낙정(枕洛亭)을 지어 글을 읽고 거닐며 후진을 가르침을 즐거움으로 삼았다.
경상감사 김시양(金時讓)이 나라에 천거하여 동몽교관(童蒙敎官)·재낭(齋郎)· 별검(別檢) 등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감사(監司) 이경여(李敬輿) 같은 이도 좀처럼 남을 칭허(稱許)하지 않는 성미였지만 공을 한번 대하고는 절로 경복(敬服)하여, 일찍 여러 고을 선비들에게 심경(心經), 사서(四書)를 강의하도록 도내(道內) 도훈장(都訓長)을 삼으려 했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모든 공무를 띤 사절(使節)로 공의 마을 부근을 지나는 인사들은 다들 공을 방문하여 예경(禮敬)을 표했다고 한다.
공의 학문은 실천궁행(實踐躬行)에 전심(專心)하여 외물(外物)에 구애됨이 없었으며, 혼자 있을 때에 더욱 두터운 공경으로 처했고 아무리 번잡하고 어지러운 가운데서도 한결같이 종용하고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한다.
일찍 수암(修巖) 류진(柳袗)과 학문을 논하면서 [지(知)와 행(行)은 새의 양쪽 날개며 수레의 두 바퀴와 같아서 양편 모두 겸비하도록 힘써야 하겠지만 마땅히 행(行)을 주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학문에 있어서 공의 독특하고 오묘한 경지를 다른 사람들은 헤아리기도 어려울 정도이지만, 우복(愚伏) 선생(鄭經世)· 여헌(旅軒) 선생(張顯光) 등 당대의 석학들도 모두 공의 해박(該博)하고 깊은 경지를 찬탄하여 마지않았다 하며 공의 서재밖에는 원근에서 책을 끼고 몰려드는 학자들로 항상 문전에 신발이 가득하였다고 한다.
인조 5년(1627) 정월 정묘호난에 여헌(旅軒) 선생이 징문(徵文)을 보내어 공으로 의병장(義兵將)을 삼아 막 군사를 일으켜 출진하였으나 난리가 평정되어 곧 파했으며 동 14년, 또 병자호란(丙子胡亂)을 당하여 공은 다시 의병을 일으켜 서울을 향해 행군하여 막 기천(基川: 지금 풍기)을 지나 죽령을 넘어서다가 나라에서 강복했다는 비보(悲報)를 듣고 북향 통곡하고 군사를 해산했음이 공의 일기인「 매원일기(梅園日記)] 속에 적혀 있어 후학들의 사료(史料)로 참고가 되고 있다.
그가 졸하자 대사간(大司諫)인 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가 묘지(墓誌)를 짓고 공조판서 이가환(李家煥)이 묘갈명(墓碣銘)을 지었다.
『매원유고(梅園遺稿)』 4책과 「매원일기(梅園日記)』가 전한다. 구 밖에 분재문기(分財文記)· 호구단자(戶口單子)·입양문기(入養文記)·소지(訴志)·교지(敎旨) 등이 현재 대종택에 보존되어 있다.
3. 일기 내용
1)1608년(선조41). 2월 29일
<溪巖日錄> 一 . 戊甲. 二月. 十九日
風, 午聞野火自西北延于此里後山, 令奴輩撲減(減)之, 午後徃見判生二兄于中間溪橋, 以志伯仲李士安皆會, 以志出示朴仲植書, 京中金繼道 金時獻, 以翰林兄墳域, 挾上洛公葬會議, 將欲呈官, 刻日移葬, 而此亦有中間挑起者, 仲植意, 則指金景建也, 盖吾曾王父墳, 與上洛同原, 而上洛居前, 上洛於王父, 爲七代外祖也, 事具先生所撰碣文, 王父之葬, 已將百許年, 每歲節日, 具饌先祭, 上洛碑石, 歲久仆破, 頃於壬寅, 言于監司 李時發, 李亦上洛外派, 遂協力改竪, 上洛姓孫雖衆, 各在異處, 邈不相聞, 墓所亦不知顯於世者亦多矣, 未聞有展省而來者, 徃在辛卯秋, 敬差 金公昉, 過先大夫, 以金公上洛裔, 言其墳所, 金甚喜, 遂徃展掃, 咨歎而去, 翰林兄之葬, 則在亂後, 而在上洛之前, 亦未聞, 有橫詰者今如是, 可慮.
<계암일록>1. 戊申(戊甲은 戊申의 오기로 보임. 1608년 선조41). 2월 29일
바람 불다. 낮에 들으니 들불이 나서 서북쪽에서 이 마을 뒷산까지 이어졌다 한다. 종들을 시켜 끄게 하였다.
오후에 중간의 계곡 다리에서 판, 생 두 형님을 만나다. 이지(以志)의 큰형 작은형 이사안이 함께 모였다. 이지가 박중식의 서찰을 내보여 주었는데, ‘서울의 김계도(익*주1) 김시헌(제)이 한림형(김해)의 묘소가 상락공(충렬공-김방경)의 묘역에 끼어 장사를 지냈기 때문에 만나서 이를 의논 하는데 장차 관청에 소송하여 기일을 잡아 이장을 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또한 중간에서 도발하여 일으키는 자가 있는데 중식의 생각에는 김경건이라 지적하였다.
대체로 나의 증조묘(김효로)는 상락공과 같은 언덕에 있다. 그런데 상락공이 먼저 있었고 상락공은 증조부의 7대 외조가 된다. 그동안의 일들은 선생의 묘갈문에 갖추어 있다. 증조부의 매장은 이미 백년쯤 오래 되었고(*주2) 매년 절기일마다 음식을 갖추어 먼저 (상락공에게) 제사한다. 상락공의 비석은 세월이 오래되어 엎어져 부서졌다.
요즈음 임인년(1602. 선조35년)에 감사 이시발에게 말했는데 이시발 또한 상락공의 외손이다. 드디어 협력하여 다시 묘비를 세웠다. 상락공의 후손들은 비록 많으나 각각 다른 곳에 멀리 있어 서로 듣지 못하고 있다. 묘소 또한 세상사람들에게 드러내어 알려지지 못함이 또한 많아 성묘하러 오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아직 듣지 못하였다.
지난 신묘년(1591. 선조24) 가을에 경차관(敬差官)인 김방(주3. 제학공 8대손)이 지나가다가 선대부(김효로)에게 들렸는데 김공이 상락공의 후예이므로 그 묘소(상락공의 묘)를 말해 주니 김은 매우 기뻐하며 드디어 (묘소)에 가서 성묘하고 소분하고는 탄식하고 돌아갔다. 한림형(김해)의 장사는 임진왜란 후에 있었는데 상락공의 묘소 앞에 있다고 하나 또한 알려 지지 않았는데 지금 제멋대로 힐난하는 자들이 이와 같으니 가히 걱정이다.
*주1 : 김계도(金繼燾) --익원공 후손. 선조(宣祖) 28년 (을미, 1595년), 별시(別試) 병과10(丙科10)
생년(生年) 계묘1543(癸卯1543). 자(字) 순원(順元). 부(父) 김귀(金龜), 조부(祖父) 김언박(金彦博), 증조부(曾祖父) 김변(金?), 외조부(外祖父) 박언효(朴彦孝), 처부(妻父) 이거(李??)
소과(小科)-1576(병자) 진사시, 전력(前歷)-참봉(參奉), 지사(知事)역임
*주2: 실제는 60년 경 (김효로 졸년-1534, 김해 졸년-1594)
*김효로(金孝盧, 1455∼1534)
자는 순경(舜卿), 호는 농수(聾 ) 또는 춘포(春圃)이며 회(淮)의 아들이다. 풍산현 도양에 살다가 성종년간에 예안으로 옮겨 정착하므로 광산 김씨 예안파 입향조가 되었다. 퇴계는 그의 <操行卓異>하고 <善慶裕後>한 덕행(德行)을 높이 칭송한 묘갈명(墓碣銘)을 지었다. 참판에 증직되었고 숙종 임오년에 사림에서 현의 동쪽에 사당을 세워 이계양(李繼陽)[퇴계의 조부]과 김효로(金孝盧)의 위패를 모시고 이름을 향현사(鄕賢祠)라 하였다. 뒤에 후손이 다시 사당을 짓고 孝盧의 曾孫 垓[近始齋]를 병향(竝享)하여 영세토록 향례(享禮)를 치르고 있다.
*주3 : 김방(金昉) --제학공 8대손. 선조(宣祖) 1년 (정묘, 1567년), 식년시(式年試) 을과2(乙科2). 생년(生年) 갑오1534(甲午1534), 자(字) 명원(明遠), (父) 김윤운(金潤運), 조부(祖父) 김익(金?), 증조부(曾祖父) 김언홍(金彦弘), 처부(妻父) 신효충(申孝忠), 소과(小科)-1561(신유) 생원시, 전력(前歷)-생원(生員), 관직(官職)-정(正)
댓글목록
김윤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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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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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놀라운 기록!!! 감사합니다.
긴장되면서도 흥미롭습니다.
김영윤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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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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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주2:<이미 백년쯤 오래 되었고>는 1608년(일기가 씌여진 해)부터 따지면 74년으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늦었지만 후일 인용하는 분을 위하여 지적합니다
원문 "過先大夫"는 先大夫를 계암의 先考 金富倫(1531-1598)로 해석해야 되지 않을가 합니다
아니면 김효로의 묘소에 들렸는데...로 하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