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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 묘소에 근접한 김해의 묘소 이장관련 일기 소개(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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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7-01-21 08:34 조회1,429회 댓글4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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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溪巖日錄>四.  丙寅  九月 十四日

○是日時讓之在陵洞也稍久, 謂以志曰, 此碣文, 吾當持去, 且曰某公墓當不遷動, 外言雖如此, 中心未可測, 京中權要處, 渠實囑起, 而佯爲不然, 托以綾原 尹昉諸宰及金自點輩, 無非渠之故也.  

 

  <계암일록> 4. 1626(인조4)년 9월 14일

 이날 시양은 능동에 조금 오래 있으면서 이지에게 말하기를 “이 묘갈문은 내가 마땅히 가져간다. 또한 모공(김효로)의 묘소를 마땅히 움직이지 못한다는 외언(外言:공무에 관련된 이야기)은 비록 이와 같지만 이는 중추(中樞)에서 미처 헤아리지 못해서이다.” 라고 했다. 그가 서울의 권문세가 요처에 실은 환기해 부탁해 놓고서 그렇지 않은 양 가장하고 있는 것이다. 능원(綾原-주1), 윤방(尹昉-주2)과 여러 대신에서부터 김자점 무리에 이르기까지 부탁을 했는데, 그의 옛벗이 아님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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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능원(綾原) : (미상)

*주2-윤방(尹昉, 1563~1640)

 본관 해평(海平). 자 가회(可晦). 호 치천(稚川). 시호 문익(文翼). 이이(李珥)의 문인. 1582년(선조 15) 진사가 되고 1588년 식년문과에 급제,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가 되었다. 1591년 아버지 두수(斗壽)가 당쟁으로 유배되자 사직했다가 정언(正言)으로 복직, 응교(應敎) ·직강(直講) ·사예(司藝) 등을 거쳐 1597년 경상도순어사(慶尙道巡禦使)로 나갔다가 평산부사 등을 지냈다.

 1601년 병조참판으로 춘추관동지사를 겸직, 임진왜란 때 불탄 실록(實錄) 재간에 참여하였고 도승지 ·한성부판윤 등을 거쳐 형조판서를 지냈다. 1618년(광해군 10)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위하자는 정청(正廳)에 불참, 사직했다가 인조반정으로 예조판서에 등용되었다. 이어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1627년(인조 5) 영의정이 되었다.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왕을 강화(江華)에 호종했다. 1636년 병자호란 때는 묘사제조(廟社提調)로서 40여 신주(神主)를 강화에 모셔 화를 면했으나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신주를 분실, 소홀히 다룬 죄로 파직 유배되었다가 1640년 풀려나 중추부영사가 되었다. 문집에 《치천집》이 있다.

댓글목록

김윤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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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托以綾原 尹昉諸宰及金自點輩'에서, '능원의 윤방'이 아니라 '능원과 윤방 등 제신(여러 대신) 및 김자점의 무리'로 보면 어떨까요?
여기서 말하는 '능원'은 綾原君 具宏'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구굉, 윤방 등은 인조반정으로 낙서공(휘 자점) 할아버지와 함께 정권의 핵심세력으로 등장한 사람들입니다.
계암일록에 "그(휘 시양)의 옛 벗'이라 표현한 것으로 보아 휘 시양 할아버지와 밀접한 관계를 맺은 모양입니다.

김윤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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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아무리 '옛 벗'이라고는 하나 산송 일에 대신들이 관여했다는 김령의 문장 표현은 선뜻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낙서공이야 충렬공 할아버지 후손이니 당연한 일이지만요.
혹시 이들이 우리 쪽 외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정구 선생도 외손인지라 1607년에 안동부사로 부임하자마자 능골로 가서 제사를 봉행하지 않았습니까.
참고로, 선성지에 김광계가 정구 선생의 문하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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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맞습니다. 능원은 이름입니다. 수정했습니다.
이 시대의 영향력있는 인물로서의 능원은 능원대군(이보)도 찾아집니다. 

김윤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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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연재 6번의 계암일록 기록은 문장을 읽기가 부담스럽군요.
군호(君號)까지 없애고 단지 '능원'이라 한 표현도 그 중 하나고요.
하지만 왕조 시대에 살면서 개인 일기라 해도 임금의 적자인 '대군(大君)'의 칭호를 없애고 적을 수는 없다고 봅니다.
(능원대군과 우리 문중의 웃대 할아버지들하고 인척 관계가 되는지 알아보아야 하겠군요.)
또 능원대군이 산송 일에 개입했다면 당장 삼사의 상소를 받았을 것이고, 아니면 그 반대로 말 그대로 임금의 권력을 업고 즉시 해결되었을 것입니다.
이러저러한 것을 고려할 때, 제 생각으로는 능원대군 이보가 아니라 능원군 구굉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구굉이나 구굉의 아버지 또는 아들이 우리 문중과 혼인을 맺었는지, 아울러 윤방의 경우도 우리쪽 외손인지 아시는 분은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