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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가기행-학봉 김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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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중 작성일07-01-22 21:58 조회2,42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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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o_date.gif 2006-10-15 오전 3:16:19
[종가기행] 의성 김씨 학봉 김성일 [국학진흥國學振興 ] blank.gif hunt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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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가기행 21] 義城 金氏
禮를 지키며 온화하고 검소, 博約 계승 '영남 종손의 표준'

姓氏의 원류를 찾아서 종가기행 21
14대 종손 김시인(金時寅) 씨 - 후손들 종가 중심으로 화합… 차종손은 지금도 門外拜 실천

▲ 종택 전경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종가에 대해 할 얘기가 많지만 크게 ▲선생의 삶과 학문 ▲400년을 이어온 종가 사람들의 구국활동으로 집약될 수 있다. 이를 근자에 어떤 작가는 ‘노블레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 지도층의 사회적 책무)’라는 시각으로 종가를 소개해 주목을 받기도 했다.

 

필자는 여러 번 종택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때마다 사랑채 정면에 걸린 현판이 눈에 들어왔다. 현판은 그렇게 화려하지도 규모가 크지도 않을 뿐더러 글씨 또한 아담하다. ‘박약진전(博約眞詮, 박약의 참된 깨달음)’. 자세히 풀이하면 ‘널리 배우고 예(禮)로써 요약하라는 공자의 말씀을 제대로 깨달음’ 정도의 의미다.

‘박약’은 일반인에게 생소한 말이다. 특히 한글로 표기했을 때는 더욱 그렇다. 동음이의어(同音異議語)인 박약(薄弱)과 헷갈린다. 그래서1987년에 출범한 사단법인 박약회는 아직까지 정체성에 대해 오해를 받기도 한다.

‘박약’이란 한마디로 유학의 핵심이다. 이를 송나라 주자(朱子, 1130-1200)가 이어받았고, 우리나라에서는 퇴계 이황(1501-1570)이 계승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경북 안동 도산서원(陶山書院)의 동쪽 공부방(東齋) 이름도 박약재(博約齋)이고, 유학의 본질을 배우고 이를 실천하자는 취지로 결성한 모임도박약회였다.

만약 사회에서 이 단어가 공자로부터 내려오는 학문의 정통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사단법인 박약회에서 그렇게 쓰지도 못했을 것이다. 박약재라는 방 이름도 정암 조광조를 모신 전남 화순의 죽수서원(竹樹書院)에서만 쓰고 있다.

퇴계는 도학 적전(嫡傳)을 이은 분으로서 정암을 존경했다. 이런 관점으로 볼 때, 학봉 종택에 걸린 ‘박약진전’이란 현판은 학문의 적전을 계승한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필자가 이 현판을 주목한 이유다.

‘박약진전’에 대한 계승 문제에 직접적인 이견을 표시한 글이 있기에 흥미롭게 읽었다. 우복 정경세의 문집 별집에 실린 우산서원(愚山書院, 상주시 외서면 우산리에 있었던 서원) 봉안문(奉安文)에서 ‘박약진전’을 언급하고 있다. 이 글을 쓴 이는 서애 류성룡의 후손 학서 류이좌(柳台佐, 하회 북촌 주인으로 서애 6대손. 대사간에 이름)다.

학서는 ‘주자의 심학(心學, 性理學)과 박약진전을 퇴계 선생이 창명(倡明, 창도해서 밝힘)했고 서애 할아버지(厓老)가 이를 전해 도가 실추되지 않게 했으며 이를 선생이 계승했다’고 추앙했다. 여기서 ‘선생’은 서원에 새롭게 배향하는 우복을 말한다. 우복은 서애의 수제자였다. 학서의 견해로 보면, 박약진전은 서애가 이었고 이를 우복이 계승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학봉 종가에는 이를 반박하는 아주 든든한 ‘물증(物證)’이 남아 있다. 이는 퇴계병명(退溪屛銘, 題金士純屛銘)이다. 학봉의 도학 연원(淵源)을 계승한 대산 이상정은 이 병명을 “퇴도 노선생(이황)의 병명(屛銘)을 첨부하여 연원을 전해 부탁한 실제를 드러내었으니, 후대 사람들이 이를 잘 읽어 보면 무언가 얻는 바가 있을 것으로, 반드시 마음속에 융합되는 바가 있어 옷자락을 잡고 문하에 나아가서 친히 말씀을 듣는 것과다름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여 의미를 부여했다.

병명은 모두 80자가4자 대구(對句)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절정은 마지막 구절인 ‘박약양지(博約兩至) 연원정맥(淵源正脈)’. 이 구절로 인해 후일 학봉 종가는 물론 유림사회에서 도학의 적전을 유념한 스승 퇴계의 징표라고 인식했던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이견도 있었고, 이는 학문적 토론과 논쟁으로 길게 이어졌다.

현재 이 글은 퇴계집 권44와 학봉집 부록 권3에 함께 실려 있다. 당시퇴계 나이 66세, 학봉은 29세였다. 완숙한 학자와 문과 급제를 앞둔(학봉은 31세에 급제) 신진 학자 간의 의미있는 만남이었다.

공경과 정일로서 덕 이룬 인 요순(堯舜)이요 / 堯欽舜一
두려움과 공경으로 덕 닦은 인 우탕(禹湯)이네 / 禹祗湯慄
공손하고 삼감은 마음 지킨 문왕(文王)이요 / 翼翼文心
호호탕탕 드넓음은 법도 지킨 무왕(武王)이네 / 蕩蕩武極
노력하고 조심하라 말한 인 주공(周公)이요 / 周稱乾惕
발분망식 즐겁다 말한 이는 공자(孔子)였네 / 孔云憤樂
자신을 반성하며 조심한 인 증자(曾子)이요 / 曾省戰兢
사욕 잊고 예(禮)를 회복한 인 안자(顔子)였네 / 顔事克復
경계하며 조심하고 혼자 있을 때 삼가서 / 戒懼愼獨
명성으로 지극한 도 이룬 인 자사(子思)요 / 明誠凝道
마음을 보존하여 하늘을 섬기면서 / 操存事天
바른 의로 호연지기 기른 인 맹자(孟子)였네 / 直義養浩
고요함을 주로 하며 욕심 없이 지내면서 / 主靜無欲
맑은 날 바람 비 갠 뒤 달인 염계(濂溪)요 / 光風霽月
풍월을 읊조리며 돌아오는 모습에다 / 吟弄歸來
온화하고 우뚝한 기상 지닌 명도(明道)였네 / 揚休山立
정제된 몸가짐에 엄숙한 품격으로 / 整齊嚴肅
전일을 주로 하여 변동 없은 이 이천(伊川)이요 / 主一無適
박문에다 약례까지 양쪽 모두 지극히 하여 / 博約兩至
연원 정통 이어받은 그 분은 주자(朱子)셨다네 / 淵源正脈

이 병명은 모두 5장의 목판에 앞뒤로 새겨 종택 운장각(雲章閣)에 보관하고 있다. 아쉽게도 퇴계가 손수 쓴 글씨 원본은 단 두 폭 16자만 남아 있을 뿐이다.

영남에서는 이를 탁본해 병풍으로 만들어 제병(祭屛)으로 사용하는 집이 많았다. 그런 유습을 이어받아 종손의 맏며느리(李點淑 여사, 퇴계 宗女)는 3년간 동양자수로 글씨를 새겨 10폭 병풍으로 만들었고, 현재 학봉 선생 불천위 제사 때 사용하고 있다.

'천년불패' 땅에 90여칸 짜리

학봉의 종택은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 속칭 ‘검제’에 2,000여 평의 대지에 90여 칸 규모로 자리잡고 있다. 현재 종택에는 14대 종손 김시인(金時寅, 1917년생) 옹이 살고 있다. 종손은 학봉 직손(直孫)이 아니다. 그래서 살던 곳도 검제가 아닌 임동면 지례였다.

13대 종손 김용환(金龍煥, 1887-1946)은 독립운동을 은밀히 도운 사실이 알려져 1995년 건국훈장이 추서되었다. 그러나 실상을 모르는 이들은 ‘파락호’라고 손가락질했다. 무남독녀 외딸만 두어 후사를 잇지 못하자 촌수가 가까운 이를 두고 100리나 떨어진 곳에 사는 현 종손을 맞았다.

1946년 29세였던 종손은 이미 결혼을 했고, 슬하에 아들 둘을 둔 상태였다. 본가에서 양자를 허락하지 않자 윤번을 정해 7개월여를 빌었다는 이야기는 눈물겨운 미담으로 전해진다.

학봉 종가가 있는 검제를 풍수가들은 ‘천년불패지지(千年不敗之地)’라고 부른다. 1,000년 동안 길이 번성할 터전이라는 것. 달리 삼재불입지지(三災不入之地) 즉 ‘전쟁, 기근, 전염병이 들지 않는 복된 땅’이라고도 말한다.

그런 좋은 터임에도 불구하고 수차례의 양자가 있었고, 13대 종손은 또 자신의 대에 이르러 나라가 망했으며, 남몰래 독립운동 자금을 대느라 살림이 기울었고, 종택까지 처분해야만 했다. 더구나 종손의 중요한 책무 중의 하나인 대를 잇는 일도 이루지 못했다.

10세 때 조부인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 학봉 11대 종손. 1827-1899) 선생이 왜경들에게 수모를 당하는 모습을 목도하고 ‘복수를 가르치겠다’는 다짐을 했던 그는 문충고택(文忠古宅)이요 박약진전(博約眞詮)인 학봉 종택을 길이 계승할 적임자를 찾기 위해 부심했을 것이다. 결과를 놓고 볼 때 그는 지인지감(知人之感, 사람을 알아보는 탁월한 안목)을 지녔다.

▲ 종손 김시인씨
▲ 박약진전 현판

현 14대종손 김시인 옹은 영남 종손의 표준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를 만나면 선비의 ‘기품’이 느껴진다. 늘 온화한 모습에 언소(言笑)가적다. 생활도 검소하다. 섬돌에 가지런히 놓인 검정고무신이 압권이다.

평소 별로 말씀이 없으신 종손께서 하루는 필자의 외조부(權五德, 1912-1972)에 대해 말했다. “그 어른은 점잖았고, 선비셨어.” 기억으로는 외조부는 송암 권호문 선생의 후손인 관계로 배향한 서원인 청성서원(靑城書院)의 문사를 살폈고, 처가인 창원 황씨(영주 대룡산, 황귀암 집) 집에서 글을 읽어 초년에 이미 선비의 반열에 올랐다. 불행히 일찍 뇌졸중으로 쓰러져 수년간 자리에 누워있다 세상을 떠나셨다. 그런 외조부의 삶을 기억해 필자를 더 가깝게 대한 것이다.

학봉 종가는 종가와 지손들 간의 틈새가 없다. 이미 종손의 증조부 대에서 재산을 정리한 터고 또 남은 토지라 해도 경북 북부 오지인 탓에 안동 도심과는 멀어 재산 때문에 다툴 일이 없었다.

학봉 후손들은 종가를 위하는 마음이 한결같다. 김흥락 선생 장례 때 모인 조문객이 4,000명이었는데, 각기 기정을 위해 가져온 대구포가 고방에 가득했을 정도였다 한다. 그리고 87년 유물전시관 개관식 때, 95년 김흥락 선생과 조부 김용환 옹의 독립훈장 추서 사당 고유 때, 99년 김흥락 선생 100주년 추모와 2000년 11월 기념 강연 때 각각 1,000여명이 전국에서 모였다.

학봉 선생 불천위 제사 때는 100여 명이 참제(參祭)한다. 이때 일정 기준 이상의 성취가 있는 후손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제사에 앞서 사당에 고유하는데, 그러한 의식이 의미도 있으려니와 보기에도 흐뭇하다. 불천위 제사는 더욱 엄숙하게 거행된다. 제상 뒤로 내걸리는 백세청풍(百世淸風)과 중류지주(中流砥柱) 대자 탁본 족자는 선생의 정신을 여실히 드러내주는 고물(古物)이다.

제사 땐 전국서 100여명 참석

70년대 이전까지 학봉 종가의 사랑방은 과객들로 넘쳐났다. 이는 학봉 종가가 영남 유림에서 차지하는 위상과 무관하지 않지만 한편으로는 종손과 종부의 역할이 컸다.

93년에 작고한 종부 한양 조씨(趙畢男 여사, 경북 영양 사도실 출신)의 베푸는 안살림은 유림에서 칭송이 자자했다. 요즈음으로 말하면 남을 배려하고 봉사하는 삶이었다. 특이하게도 종손 부부는 생년월일이 같다. 슬하에 3남 3녀를 두었다.

차종손 김종길(金鍾吉, 1941년생) 씨는 안동사범, 고려대를 졸업했고 학군1기로 군복무를 마친 뒤 두루넷 사장, TG삼보컴퓨터 부회장을 역임했다. 차종손은 타고난 친화력과 리더십으로 종인들은 물론 유림에서도 명성이 높다. 근자에는 한문과 서도에 진력하여 시 수백 수와 고문진보(古文眞寶)에 나오는 명문 수십 편을 암송해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암송하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평보다 필자는 다른 장면이 떠올랐다. 한번은 차종손을 따라 종가를 방문했는데, 차종손은 ‘문외배(門外拜)’를 하고 방으로 들어섰다. 예법에 부모에게는 문 밖에서 절을 하게 되어 있는데, 그는 설날 부실한 시골집 문 밖에서 절을 한 후 방안으로 들어선 것이다.

영남에서는 아직도 일부에서나마 문외배를 행하고 있다. 그런데 차종손의 문외배는 생활 그 자체였다. 그러한 정신이 일선에서 은퇴한 뒤 그 어렵다는 한문을 외우게 하고 다시 붓을 잡아 법필(法筆)을 익히게 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 초점은 분명 ‘박약진전’에 맞춰진 느낌이다.

 

 

 

 

鶴峯 金誠一 - 퇴계의 수제자… 임란 때 진주성대첩 이끌어
[종가기행 21] 의성 김씨 학봉 김성일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사순(士純), 호는 학봉(鶴峯), 시호는 문충(文忠)

▲ 학봉 친필

 

퇴계 선생이 1569년(선조2) 임금과 조정 중신들의 간곡한 청을 뿌리치고 향리인 안동 도산(陶山)으로 돌아가면서 추천한 인재 세 사람이 있다. 동고 이준경, 고봉 기대승, 그리고 학봉 김성일이다.

 

동고는 2년 연상으로 영의정에 이른 이고, 고봉은 26년 후배로 퇴계의 대표적 제자며, 학봉은 향리의 37년 후배로 수제자다. 함께 추천한 동고와 고봉은 불화로 이듬해 결별했고, 학봉은 22년 뒤인 1591년에 일본 통신부사의 임무를 마치고 돌아와 복명한 일로 곤경에 처했다.

퇴계가 서애를 추천하지 않은 일은 이미 승승장구 하고 있어 그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에 비해 학봉은 보다 오랫동안 문하에 있었을 뿐 아니라 도학에 더욱 침잠해 쉽사리 벼슬에 나아가려 하지 않은 기질을 지녔다. 죽음을 앞둔 퇴계가 학봉을 추천한 것은 학봉의 위상이 어떠했는지를 말해준다.

동아원색대백과사전을 보면 학봉에 대해서 '당파싸움에 급급한 나머지 침략의 우려가 없다고 보고했다'라고 쓰여 있다. 학교에서도 그를 편협한 당파성 때문에 국론을 분열시킨 인물로 가르쳤다. 그러나 1991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간행한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왜가 반드시 침입할 것이라는 정사 황윤길의 주장과는 달리 민심이 흉흉할 것을 우려하여 군사를 일으킬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고 상반된 견해를 밝혔다'고 적고 있다.

다소 미흡하지만, 후자가 역사학계의 정설이지 않나 싶다. 임진왜란 최고의 권위 있는 회고록인 징비록(류성룡 저, 국보 제132호)에 보면 저간의 사정이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사려 깊은 대학자의 고뇌'에서내린 복명이었다는 해석이다.

역사학계의 연구 성과물을 읽어보면 학봉이 일본에 통신부사로 가서 벌인 외교가 얼마나 주체적이고 사려 깊은 것이었나 하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학봉이 취한 '위의(威儀)를 갖춘 외교'와 '무력에 굴하지 않는 외교'를 정사와 서장관이 힘을 합해 이루었다면 임진왜란이라는 미증유의전란을 겪지 않았을 수 있었다는 일부의 주장도 있다.

학봉 선생의 일생을 알려면 우복 정경세가 지은 신도비를 읽으면 많은 도움이 된다. 그러나 거의 책 한 권 분량이라쉽지 않다. 요약한 글로는 동문수학한 한강 정구의 '학봉 묘방석(墓傍石)'에 적은 글이 있다. 묘방석이란 무엇인가? 창석 이준이 지은 글에 답이 있다.

"사순(士純)의 휘는 성일(誠一)이니, 문소(聞韶, 義城의 古號) 김씨이다. 무술년(1538)에 출생하여 계사년(1593)에 졸하였다.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임진년(1592)에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일본에 사신으로 갔을 때는 정직하고 흔들리지 않음으로 왕의 위엄과 교화를 멀리 전파하였으며, 초유사(招諭使)의 명을 받고는 지성으로 감동하여 한 지역을 막았으니 충성은 사직에 남아 있고 이름은 역사에 실렸다. 일찍이 퇴계 선생의 문하에 올라 심학(心學)의 요체(要諦)를 배웠으며, 덕행과 훈업은 모두 길이 아름답게 빛날 만하다. 만력 기미년(1619)에 한강 정구 씀."

"선생을 장사지낼 때 이상한 돌이 광중(壙中)에서 나왔는데 모양은 큰 북 같고 돌결이 부드러워 조각할 수 있었다. 그래서 굴려서 묘 왼편에 두어 선생의 행적 대강을 새겼는데 정(鄭) 한강(寒岡)이 지은 것이다. 돌이 이곳에 묻힌 것이 아득한 옛날일 텐데 선생을 모실 때 비로소 나와 그 사실을 기록하는 데 쓰였으니 조물주의 의도가 필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아! 기이한 일이로다. 홍문관(弘文館) 교리(校理) 이준(李埈)이 삼가 적다."

학봉의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다. 문자 시호에다 충성 충자를 받았다.

그는 임진왜란을 당하자 몸으로 맞서 싸우다 순국했다. 탁월한 도학자면서 애국 애민을 실천했던 이다. 임란 초기에 초유사의 소임을 맡아 의병(義兵)의 발기와 지원에 크게 기여했고 경상우도 관찰사가 된 뒤로는 관군과 의병을 함께 지휘하여 1592년 10월 임란의 3대대첩 중의 하나인 진주성대첩을 이루었다.

그 이듬해 4월 각 고을을 순시한 뒤 다시 진주성으로 돌아왔는데, 피로와 풍토병이 겹쳐 4월 29일 진주성 공관에서 운명하니 향년 56세였다. 운명할 때에 참모들이 약물을 들이자, "나는 약을 먹고 살 수 없는 몸이다. 제군은 그만 두라"했다.

대소헌 조종도와 죽유 오운이 병문안을 하면서 "명나라 구원병들이 승승장구하여 남하해 이미 서울을 수복했으며, 그래서모든 왜구들을 도망치게 할 것입니다"라 하자, 선생은 눈을 크게 뜨면서 말했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먼저 죽다니…. 그러나 그것 또한 운명인데 어찌 하겠나. 적들이 물러가면 회복을 기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정의 붕당은 누가 혁파할 것인가…." 지공무사(至公無私)한 처사요 심사원려(深思遠慮)한 태도다.

학봉은 타고난 시인이며 참으로 따뜻한 마음을 가진 이다. 그가 남긴 시가 대략 1,500여 편이나 되는데, 다수의 애민시(愛民詩)도 남겼다.

그 대표작이 모별자시(母別子詩)로 60구(句)나 되는 칠언고시(七言古詩) 장편인데 39세(1576, 이조좌랑) 때 썼다. 세상을 버리기 4개월 전인 1592년 12월 24일에 경상우도 감사로서 산청(당시 山陰縣)에서 안동에 있는 부인에게 보낸 마지막 한글 편지의 사연은 절절하다.

"요사이 추위에 모두들 어찌 계신지 궁금하네. 나는 산음 고을에 와서 몸은 무사히 있으나 봄이 되면 도적들이 달려들 것이니 어찌할 줄 모르겠네. 직산(稷山)에 있던 옷은 다 왔으니 추워하고 있는지 염려 마오. 장모 모시고 설 잘 쇠시오. 자식들에게 편지 쓰지 못하였네. 잘 있으라 하오. 감사(監司)라고 해도 음식조차 가까스로 먹고 다니니 아무것도 보내지 못하오. 살아서 다시 보면 그때나 나을까 모르지만 기필하지 못하네. 그리워 말고 편안히 계시오. 끝없어 이만. 섣달 스무나흗날. 석이(버섯의 일종) 두근, 석류 20개, 조기 두 마리 보내오."

사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문충공의 시호를 받았으며, 안동의 여강서원(廬江書院, 나중에 호계서원으로 바뀌었다 훼철)과 임천서원, 전남 나주의 대곡서원(大谷書院), 경북 의성의 빙계서원(氷溪書院), 청송의 송학서원(松鶴書院), 경남 진주의 경림서원(慶林書院) 등지에 배향되었다.

문집 10책이 남아 있고, 민족문화추진회에서 완역, 발간되었다. 종택 유물전시관에는 보물 제905호(56종 261점)로 지정된 전적과, 보물 제906호(17종 242점)로 지정된 고문서를 비롯해 서산 김흥락 선생의 목판 등이 전시 보관돼 있다.

 

 

서수용 박약회 간사 saenae61@hanmail.net
· 사진=남정강 한얼보학 연구소 소장

 

 

1.鶴峯 金誠一 - 퇴계의 수제자… 임란 때 진주성대첩 이끌어 [종가기행 21] 의성 김씨 학봉 김성일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사순(士純), 호는 학봉(鶴峯), 시호는 문충(文忠) ▲ 학봉 친필 퇴계 선생이 1569년(선조2) 임금과 조정 중신들의 간곡한 청을 뿌리치고 향리인 안동 도산(陶山)으로 돌아가면서 추천한 인재 세... 2.[종가기행 21] 義城 金氏 - 禮를 지키며 온화하고 검소, 博約 계승 '영남 종손의 표준' [종가기행 21] 義城 金氏 禮를 지키며 온화하고 검소, 博約 계승 '영남 종손의 표준' 姓氏의 원류를 찾아서 종가기행 2114대 종손 김시인(金時寅) 씨 - 후손들 종가 중심으로 화합… 차종손은 지금도 門外拜 실천 ▲ 종택 전경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종가에... 3.[종가기행 20] 霞谷 鄭齊斗 - 정몽주 11대손… 강화학파의 개창자 霞谷 鄭齊斗 - 정몽주 11대손… 강화학파의 개창자 [종가기행 20] 영일 정씨 하곡 정제두 1649년(인조27)-1736년(영조12)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사앙(士仰), 호는 하곡(霞谷), 시호는 문강(文康) ▲ 친필 하곡은 포은 정몽주의 11대손으로 서울에서 태어나... 4.[종가기행 20] 迎日 鄭氏 - 유가의 반듯한 삶과 철학으로 산업현장 지킨 '우리시대 선비' [종가기행 20] 迎日 鄭氏유가의 반듯한 삶과 철학으로 산업현장 지킨 '우리시대 선비' 9대 종손 정시종(鄭時鍾) 씨 - 시골읍 서기에서 대기업 사장까지… 종손의 격조 잃지 않아 ▲ 숭모비 ▲ 묘소 격조가 있는 사람은 어떤 분일까? 요즘은 격(人格) 또는 품격(品格)을... 5.[종가기행 19] 東皐 李浚慶 - 영의정에 오른 청빈한 정승… 붕당정치 예견 東皐 李浚慶 - 영의정에 오른 청빈한 정승… 붕당정치 예견 광주 이씨 동고 이준경, 1499년(연산군5)-1572년(선조5) ▲ 묘소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원길(元吉), 호는 동고(東皐), 시호는 충정(忠正). 조선 시대에 순탄한 길을 걸어 영의정에 이르고 두드러진... 6.[종가기행 19] 廣州 李氏 - 투병 중에도 반듯함 잃지 않고 忠과 正의 대물림에 온 힘 [종가기행 19] 廣州 李氏 투병 중에도 반듯함 잃지 않고 忠과 正의 대물림에 온 힘 [姓氏의 원류를 찾아서 종가기행 19] 17대 종손 이주용(李柱瑢)씨 - 박정희 전 대통령도 친서 보내 경의 표했던 명문 종가, 뇌졸중으로 병상에… 종부가 봉제사 접빈객 정성 ▲... 7.[종가기행 18] 精一齋 남회 - 문무 겸비한 청백리, 독도 처음 세상에 알려 精一齋 남회 - 문무 겸비한 청백리, 독도 처음 세상에 알려 [종가기행 18] 영양 남씨 정일재 남회, 1391년(공양왕3)-?, 호는 정일재(精一齋) ▲ 종택 문적 필자가 정일재 남회를 안 것은 우연이었다. 교과서나 역사책에도 없고 인터넷의 인물정보 코너에도 올라와... 8.[종가기행 18] 英陽 南氏 - 22대째 '宗子宗孫' 전통계승… 600년 종가 수호 의지 굳건 [종가기행 18] 英陽 南氏 22대째 '宗子宗孫' 전통계승… 600년 종가 수호 의지 굳건 19대 종손 남두열(南斗烈)씨, 조부 부친 독립운동으로 고초… 사업가로 흥망 겪기도 조선 초 세종대왕 당시 문무를 겸전한 경북 울진 출신의 관료가 있었다. 그는 영양 남씨로... 9.[종가기행 17] 眞一齋 柳崇祖 - 조선 중기 대표적 유학자… 정암 조광조의 스승 眞一齋 柳崇祖 - 조선 중기 대표적 유학자…정암 조광조의 스승 [종가기행 17] 전주 류씨 진일재 류숭조 1452년 (문종2)-1512년 (중종7) 자 종효(宗孝), 호 진일재(眞一齋) 석헌(石軒), 시호는 문목(文穆) ▲ 시호교지 ▲ 문집 진일재 류숭조는 1452년 전생서령을... 10.[종가기행 17] 全州 柳氏 - 올곧게 지켜나가는 선대 땅… 선조 업적 알리기에 남다른 노력 [종가기행 17] 全州 柳氏올곧게 지켜나가는 선대 땅… 선조 업적 알리기에 남다른 노력 16대 종손 류장희(柳長熙)씨, 신도비따라 경북 봉화에서 여주로 이주, 서예에 깊은 조예 ▲ 송천서원 현판글씨 경기도 여주군 가남면 대신2리 456번지에는 조선 중기의 대표적...

 

11.[종가기행 16] 原州 元氏 - 가풍에 스민 무인의 기백… 잘 가꾼 종택은 너무도 고즈넉 [종가기행 16] 原州 元氏 가풍에 스민 무인의 기백… 잘 가꾼 종택은 너무도 고즈넉 13대 종손 원덕연(元悳淵)씨, 큰 아들 집서 종가 제사… 불천위 제사 6 25나며 조부가 없애 ▲ 원평부원군 원두표의 묘소. 묘소 앞 왼쪽이 신도비다.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장암1리... 12.[종가기행 ⑮] 錦溪 黃俊良 - 퇴계학파 맏형… 청빈 애민의 '名 목민관' 錦溪 黃俊良 - 퇴계학파 맏형… 청빈 애민의 '名 목민관' [종가기행 ⑮] 금계 황준량 1517년(중종12)-1563년(명종18) 자는 중거(仲擧) 호는 금계(錦溪) 조선 중기의 명신. 본관은 평해(平海)다. 안동 출신 명신이요 강호가도(江湖歌道)의 학자였던 농암 이현보의... 13.[종가기행 ⑮] 平海 黃氏 - 종택에 칠순 노모만 쓸쓸히… "저도 이제 고향으로 가야죠" [종가기행 ⑮] 平海 黃氏종택에 칠순 노모만 쓸쓸히… "저도 이제 고향으로 가야죠" 16대 종손 황재천(黃載天)씨, 분당서 학원운영하며 선현 잠언 등 교육… 낙향 채비 ▲ 금선정 전경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 선생의 종택은 예로부터 십승지로 이름난 경북... 14.[종가기행 ⑭] 遯菴 徐翰廷 - 충절 지키며 단종과 운명 함께 '조선판 백이숙제' 遯菴 徐翰廷 - 충절로 단종과 운명 함께 '조선판 백이숙제' [종가기행 ⑭] 돈암 서한정 1407년 (태종7)-1490년 (성종21) ▲ 돈암 문집 "우리는 공신(功臣)의 후예가 아니라 충신(忠臣)의 후예다." 이제는 공허한 메아리처럼 들릴지도 모르는 이 말은 실제로 새내... 15.[종가기행] 達城 徐氏 - 종통 잇기에 버거웠던 유복자 "충신의 후예" 자긍심은 여전 [종가기행 ⑭] 達城 徐氏종통 잇기에 버거웠던 유복자 "충신의 후예" 자긍심은 여전 姓氏의 원류를 찾아서 종가기행 ⑭ 18대 종손 서용준(徐庸俊) 씨 - 이념 광풍에 아버지 잃고 집안 쇠락, 문중 도움으로 한때 정치 입문 ▲ 종택과 정자 전경 경북 영주시 단산면... 16.[종가기행 ⑬] 廣城君 李克堪 - 문과 급제 뒤 세자 교육 맡아… 사후 광성군에 책봉 [종가기행 ⑬] 廣城君 李克堪문과 급제 뒤 세자 교육 맡아… 사후 광성군에 책봉 광주 이씨 광성군 이극감 1427년(세종9)-1465년(세조11) 자는 덕여(德輿) 호는 이봉(二峯) 광성군(廣城君), 시호는 문경(文景) 이극감은 광주인(廣州人)으로 한양 교동(校洞)에서... 17.[종가기행 ⑬] 廣州 李氏 - 조상 땅 귀히 여기며 사는 순박한 '농부의 삶' 고스란히… [종가기행 ⑬] 廣州 李氏조상 땅 귀히 여기며 사는 순박한 '농부의 삶' 고스란히… 姓氏의 원류를 찾아서 종가기행 ⑬20대 종손 이주백(李柱白) 씨, 3대가 한 집에… "조상 묘소 40여 기 지켜온 것에 자긍심" 광성군(廣城君) 이극감(李克堪)의 조부인 탄천(炭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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