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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담 김시양 연구(석사학위 논문)-본론 (46-하담시의 문학사적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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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7-01-26 19:18 조회1,571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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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다른 逸話 하나가 있다.


    김시양이 경상도 관찰사로 있을 때였다. 영남을 두루 순시하다가 어떤 고을의 수령이 세금을 납부할 기일을 어긴 사실을 밝혀냈다. 이에 그는 수령을 잡아다가 엉덩이를 벗기고 곤장을 치려했다. 그 때 문 밖에서 한 사람이 급히 뛰어들더니 몸을 던져 죄수의 발가벗겨진 엉덩이를 가렸다. “자네가 웬일인가?” 그러자 사위가 눈물을 흘리며 대답했다. “ 이 분은 바로 저의 숙부 되시는 분입니다.” 라고 말하자 김시양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사위를 향해 소리쳤다. “내가 어찌 사위 하나 때문에 법을 집행하지 못한단 말이냐!” 김시양은 나졸들을 시켜 사위를 끌어내게 하고 다시 매질을 가하였다.1)


자기 사위의 숙부에게까지 공정하게 법을 집행하는 모습을 보면 그가 얼마나 공정한 사람이었나를 알 수 있다.

다음은 『仁祖實錄』에 남겨진 사관의 평이다.


   전 판의금부사 金時讓이 충주에서 죽으니 상이 棺槨과 造墓軍을 내려 주라고 명하였다. 金時讓의 初名은 시언인데 젊었을 때 재주와 국량이 있었다. 光海祖 때 전라도사가 되어 시원을 주관하면서 “신하가 임금보기를 원수처럼 한다.” 〔臣視君如仇讐〕는 글로 논제를 냈었는데, 그를 좋아하지 않은 자가 얽어 北邊으로 귀양 갔었다. 反正 이후에 청현직을 두루 거치고 여러 차례 地方을 맡아 다스렸는데 상당히 치적이 있었으며 淸廉하고 간소하다는 칭송을 받았다. 상이 매우 깊이 돌보고 사랑하여 몇 해 사이에 兵曹判書와 體察使에 발탁하여 제수하였는데, 나중에 청맹과니로 忠州에 물러나 살다가 이때에 죽은 것이다.2)


 이는 하담의 능력과 청렴성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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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이용범,     『선비』, 도서출판 바움, 2004, p.234.

주2)  『 仁祖實錄』  44권, 仁祖 21년 5월 13일 (을사).

     前判中樞府事金時讓卒于忠州, 上命給棺郭及造墓軍. 時讓初名時言, 少有才局. 光海朝爲全羅都事, 主試院,   以臣視君如仇讐爲論題, 不悅者搆捏, 竄北邊. 反正以後, 歷敭淸顯, 屢典方面, 頗有聲績, 以淸簡見稱。 上眷注   甚重, 數年間擢拜兵曹判書、體察使, 後以靑盲, 退居忠州, 至是卒.

 

댓글목록

김정중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정중
작성일

  청백리 김시양 ! 하담공의 매사 끊고 맺음이 분명한 처사에 감탄합니다. 공무원 생활의 표본이지요 또한 능골 묘소문제도 범장에 대한 반듯한 처리에 새삼 경외심을 느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