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관성씨순례1.(서와 수안김씨편)
페이지 정보
김윤만 작성일02-05-16 08:04 조회1,920회 댓글0건본문
선안동김씨에서 분관된 성씨 족보 순례
---선안동김씨에서 분관되었다고 하는 성씨에 대하여 해당 문중별 족보를 통하
여 그분들의 입장에서 그 분들의 유래와 시조 또는 관조를 어떻게 보고있는가
를 살펴봅니다. 참고로 우리 선안동김씨대종회 회장을 역임하신 명회 회장님께
서 대구김씨족보(무오보)에 남기신 서문이 있어 이를 첫머리에 소개합니다.
1. 1978년(무오) 대구김씨족보(대구김씨종친회) 서문.(pp4∼6)
---이번에 우리 혈족인 대구김씨의 족보를 발간하게 된 것을 충심(衷心)으로 기
쁘게 생각하는 바이다.
---무릇 족보라 함은 승선계세지도(承先系世之道)라 윗대 조상으로부터 후손 만
대에 이르기까지 계승할 한 집안의 역사이므로 가장 중요한 가보이다. 사람이
족보가 없으면 어느 시대 어느 할아버지의 자손인지 알 수가 없으며 자기 집안
내력을 전혀 알 수가 없게되니 생각하면 한심하고 개탄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물은 원천이 있어 천파만지로 흐르고 나무는 뿌리가 있어 천지만엽으로 번창
하고 사람은 한 조상으로부터 천자만손으로 번영하니 그 이치가 마치 수(水)와
목(木)과 같다.
---안동김씨와 대구김씨는 한 할아버지의 자손이다. 그 원류를 캐보면 서기 65
년 계림 시조대왕 대보공 『김알지』께서 신라 경주 계림 금궤 속에서 탄생하
신 후 서기 935년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에 이르기까지 870년 동안을 연면
(連綿)하게 왕실을 누려오다가 경순왕의 제4자인 대안군 공부시랑 평장사 『은
열』공의 제3자이신 공부시랑 평장사 『숙승』공께서 비로서 안동김씨로 수적
(受籍)하니 이분이 곧 안동김씨의 시조이고『숙승』공의 6대손인 고려국추충정
란정원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도첨의중찬 판전리사사 세자사 도원수 상락군개
국공 충렬공 휘 『방경』이 안동김씨의 중시조이시고 충렬공의 현손 병사공 휘
『달(達)』이 곧 대구김씨의 시조이시니 안동김씨와 대구김씨는 동원분파의 가
장 가까운 혈족지간이다.
---병사공 휘『달』은 충렬공 『방경』 할아버지의 막내 손자이시니 따지고 보
면 안동김씨는 큰집이요 대구김씨는 작은집이다. 기지간(其之間) 병사공 휘
『달』씨께서 대구김씨로 분관한 사실만 기록되고 기후손이 서북지방에서 번성
하고 있다고 전하여 졌을 뿐 종회간에 피차 교류가 두절되어 답답하든 차에 이
번에 확고한 사적고증으로 명실상부하게 완벽한 족보로 수보(修譜)하게 되니
만시지감은 있으나 기쁘기 한이 없다.
---충렬공 『방경』 할아버지의 후손에서 분관된 김씨를 열거하면 수안김씨,
사천김씨, 청주김씨, 영해김씨, 정산김씨, 대구김씨 등 6파이고 충렬공 『방경』
의 셋째 아우되시는 충순공 『현경』의 손자 수성백 『영규』는 수성최씨의 시
조가 된다. 이와같이 한 할아버지의 자손으로서 일곱갈래로 분관되었다. 또 충
렬공 현손대에서 안동김씨는 21파로 분파되었는데 그중에서 오직 끝파만이 대
구김씨로 분관되어 나가고 20파가 존재하여 오던중 그후 무후한 파와 다시 분
관된 파를 제외하고 안동김씨는 현재 15개파가 존재하고 있으며 그 숫자는 50
여만명에 달하고 있다. 안동김씨와 대구김씨는 촌수를 따저도 그다지 멀지 않
은 사이다.
---다만 본관만 달리하였을 뿐 한 혈족 한 집안이다. 평소에 타성과 같이 소원
한 감이 불무(不無)하였으나 이번의 족보를 발간하게 되므로서 혈족지간의 정
의와 친밀감이 더욱 두터워지게 되었다.
---여기에 한가지 명기할 것은 안동김씨는 구안동김씨와 신안동김씨의 두가지
안동김씨가 있으나 이 두사이는 글자만 같을 뿐 그 시조가 전연 다르며 완전한
타성이라는 사실이다.
---서두에서 말한바와 같이 우리 구안동김씨는 신라 대보대왕『김알지』의 27대
손 경순왕의 손자인 공부시랑 평장사 『숙승』공을 시조로 하고 그 6대손인 충
렬공 『방경』을 중시조로 하고 있으나 신안동김씨는 고려초 태사공 『김선
평』을 시조로 하고 이조 중엽 광해군 때 도정을 지낸 『김극효』를 중시조로
하고 있다. 본관 이름은 다같이 안동이지만 서로 시조를 달리하고 있으므로 전
연 관계가 없다. 그러나 대구김씨와 구안동김씨는 본관은 서로 다르다 할지라
도 다같이 충렬공 『방경』할아버지의 후손이므로 한 혈족지간이다. 따라서 대
구김씨와 신안동김씨와는 전연 관계가 없으니 혼동없기를 바란다.
---끝으로 대구김씨 문중의 무궁한 발전과 번영을 기원하면서 서문에 가름한다.
--------------------------------------------------------1987년(무오) 8월 일
-------안동김씨대종회회장. 정치학박사. 국회의원 김명회(金明會) 근지(謹識)
2. 안동김씨대동보(1979년 기미) 권지1에 의거 선안동김씨에서 분관된 7개 성씨
의 선계(先系)는 다음과 같습니다.
(1)수안김씨 : 효인→ 방경(장자) → 선(장자) → 자(장자) - 후손위수적수안김씨
(2)정산김씨 : 효인→ 방경(장자) → 선(장자) → 승용(차자) → 구(차자) →
- - - - - - - - 성목(장자) - 후손 일파위 분적정산김씨
(3)사천김씨 : 효인→ 방경(장자) → 선(장자) → 승택(3자) → 묘(장자) →
- - - - - - - - 제안(차자) - 분적사천김씨
(4)청주김씨 : 효인→ 방경(장자) → 선(장자) → 승우(4자) → 지연(장자) →
- - - - - - - - 윤(장자) - 분적청주김씨
(5)영해김씨 : 효인→ 방경(장자) → 윤(4자) → 영요(차자) → 행(장자) →
- - - - - - - - 철(차자) - 분적영해김씨일파(후손 억민)
(6)대구김씨 : 효인→ 방경(장자) → 윤(4자) → 영요(차자) → 백(3자) →
- - - - - - - - 달 - 위분적대구김씨
(7)수성최씨 : 효인→ 현경(3자) → 준 → 영규(차자) - 사성최씨
3. 분관된 7개 성씨족보의 근거와 그분들의 족보에서 주장하는 선계는 다음과
같습니다.
(1)수안김씨(수안김씨대동보 권지상. 1986년 병인)
---효인→ 방경(장자) → 선(장자. 시조) → 자(장자) → 위 → 득남 → 이(履),
---수(綏), 정(精)
(2)정산김씨(안동후인 정산김씨족보 전(2000년))
---효인→ 방경(장자) → 선(장자) → 승용(차자) → 구(차자) → 성목(장자) →
---휴 → 익염(차자) → 한(차자) → 복수(일명 : 광유, 차자, 관조)
(3)사천김씨(사천김씨족보전. 1991년 신미)
---효인→ 방경(장자) → 선(장자) → 승택(3자) → 묘(장자) → 제안(차자) →
---부(관조)
(4)청주김씨(청주김씨대동보(문헌. 세적, 1993년 계유)
---경순왕자 청주군 김정〈☞ 확인할 수 없음〉
(5)영해김씨(영해김씨족보. 2001년)
---효인→ 방경(장자) → 윤(4자) → 영요(차자) → 행(장자) → 철(차자) →
---성호(차자) → 억민(일명 : 억동, 잉관(仍貫)영해)
(6)대구김씨(대구김씨족보전. 1978년 무오)
---효인→ 방경(장자) → 윤(4자) → 영요(차자) → 백(3자) → 달(시조) →
---부형 → 호연(장자, 서포파조), 호견(차자, 용만파조)
(7)수성최씨(수성최씨세보 권지1. 1997년 정축)
---효인→ 현경(3자) → 준 → 영규(차자, 賜姓崔氏)
● 분관성씨순례Ⅰ.(수안김씨)
수안김씨 대동보중 서문 일부.(상기족보 pp2∼6)
서기 1986년 병인보 발간에 즈음하여
(전략)
---아무리 종시속(從時俗)이라 하나 여사자세(如斯姿勢)가 과연 타당하다고는 생
각되지 않을 것이다. 이유인즉 내가 어찌해서 김씨성을 갖게 되었으며 김씨성
중에서도 유독 수안(遂安)이란 본관을 갖게 된 것인지를 지실(知悉)코저 한다면
족보의 필요성은 설명을 불요하는 명약관화한 사실이다.
---그러면 이제 우리 시조님께서 물려주신 수안김씨의 유래를 살펴보는 것이 긴
요하며 순서라 생각됨에 그 내력을 약술코져 한다. 구보서문에 누누이 상술되
어 다시 복언할 필요가 없다 하겠으나 구보서문은 순 한문이라 번역을 하여도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없지 않기에 송구불이(悚懼不已)이오나 후세들이 고열
(考閱)에 편의가 될까 사료되어 감히 첨기(添記)하는 바이다.
---즉, 김씨라는 성은 신라 대보공 알지께서 금궤에서 탄생하셨기에 사성(賜姓)
되었으며 그후 왕성씨(王姓氏)로 계승되어 왔으며, 28세손이신 경순왕의 제4자
대안군『은열(殷說)』의 8세손 상락군(上洛君)『방경(方慶)』의 장자『선( )』
시조님이 수안군(遂安君)에 봉해지신 이후로 수안으로 위관(爲貫)되었다.
---『선』시조님께서는 려조 중신으로서 원충단력안사보정공신봉익대부지밀직사
전법판서상장군(元忠端力安社保定功臣奉翊大夫知密直司典法判書上將軍)으로 계
셨다. 또한 8세조이신 휘『순몽(順蒙)』께서는 이조 중종 18년 2월 계미 당상관
도제조통정대부(堂上官都制調通政大夫)로서 이조정원실록일지에 과적(科績)이
등재되었으며, 10세손 휘『필경(必慶)』께서는 성균진사로서 성품이 순후하시고
학덕겸비효우돈독하시며, 향리 후진 양성에 유공하셨고, 11세손이신 울산군 (휘
난서(鸞瑞))이 무과에 급제출사하신 후 수차 승급되시어 울산부사를 역임하셨으
며 임진왜란 당시는 학봉 김성일선생의 영막에서 전략을 모의 혁혁한 전공을
세워 2등공훈에 기록되었으며, 울산공의 증손이신 14세손 평천공(휘도장(道章)
은 호군으로서 국가에 유공하셨기에 좌승지에 증직되셨고 15세손이신 애헌공
(휘덕오(德五))께서는 성균진사이시며 성리학자로 박학다식하시어 향리인 영해
면 괴시(槐市)에서 후진양성에 기여하신 공로가 지대하시였기에 우금까지도 문
도의 후예들이 수계(授契)라는 명칭으로 년1차식회합하여 공의 유덕을 추모하
고 있으며 문집도 전승되어 숭앙받는 분이시며 16세손이신 이 ○암공(휘하구
(夏九)께서는 문과에 급제 출사하신 후 영조 무신년(서기 1978년) 역란을 평정
하시고 문과동추부사를 지내신 후 도산서원원장을 역임하신 공적이 찬연하며
(○암공의 방주요참조) 그 외에도 역대에 선( )하여 대소 관직에서 유공하신
분이 여러분 계시나 일일이 열거키 지남함에 이만 생략코저 한다.
---이와 같이 위대하신 선조님의 혈맥(血 )이 면면히 승계된 종족임을 자부함
과 아울러 자손된 자 만의 일이라도 조상에게 누가됨이 없도록 항상 명심하고
행동해야겠다.
---대략 서술한 바와 같이 가문임을 자처하며 지대한 공훈을 쌓은 선대의 얼이
담긴 실로 필요하고도 소중한 족보를 편집함에 있어서는 구태의연한 방식을 탈
피하여 현세대에 적합한 보다 현대화된 보첩을 발간하여 현세대들이 족보에 대
한 당위성과 필요성을 깊이 인식토록 누구나 보기쉽게 편찬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할 것이다. 현재 보전된 보책중 제1차 발간분이 계유보(서기 1873년)이고 2
차분이 갑진보(서기 1904년)이며 3차분이 임술보(서기 1922년)고 가장 가깝게
발간된 것이 30수년전인 갑오보(서기 1954년)인 바 계유보이전 보책은 임진병
화 등으로 소진되어 상계를 상고함에 다소의 소루(疏漏)함이 있어 휘위(爲)자를
중시조로 뫼셔 1세로 하여 편찬하였으나 갑오보시에 휘선( )자의 장자이신 휘
자(資)자를 각종 문헌에 의해 찾았으나 중시조이신 휘위(爲)자가 휘 자(資)자와
의 관계가 불분명하여 그 전보와 같이 편집하였으나 금보에는 구보와 달리 수
안군이신 휘선( )자를 시조로 뫼셔 1세 휘자(資)자를 2세 전보에 중시조로 등
재되신 휘위(爲)자를 3세로 뫼셔 보계를 명백히 하였음은 세와 세간의 년수차
를 계산한 결과 직계로 계승되었음이 명백함에 기인하였음을 부연(敷衍)하여
둔다. (후략)
-----------------------------------------서기 1986년 6월 일 전종원근서
《다음은 분관성씨순례Ⅱ 정산김씨편 입니다.》
▣ 김영윤 - 감사합니다
▣ 김주회 - 귀한 자료입니다. 계속되는 자료가 기다려집니다.
▣ 김항용 -
▣ 김영환 - 가까운 집안을 찾았습닏.
▣ 김태서 - 글 감사드립니다.
▣ 김재익 -
▣ 김태영 - 감사합니다. 궁금했던 것이 한꺼번에 풀렸습니다.
▣ 김은회 - 귀한글 잘읽었습니다.
---선안동김씨에서 분관되었다고 하는 성씨에 대하여 해당 문중별 족보를 통하
여 그분들의 입장에서 그 분들의 유래와 시조 또는 관조를 어떻게 보고있는가
를 살펴봅니다. 참고로 우리 선안동김씨대종회 회장을 역임하신 명회 회장님께
서 대구김씨족보(무오보)에 남기신 서문이 있어 이를 첫머리에 소개합니다.
1. 1978년(무오) 대구김씨족보(대구김씨종친회) 서문.(pp4∼6)
---이번에 우리 혈족인 대구김씨의 족보를 발간하게 된 것을 충심(衷心)으로 기
쁘게 생각하는 바이다.
---무릇 족보라 함은 승선계세지도(承先系世之道)라 윗대 조상으로부터 후손 만
대에 이르기까지 계승할 한 집안의 역사이므로 가장 중요한 가보이다. 사람이
족보가 없으면 어느 시대 어느 할아버지의 자손인지 알 수가 없으며 자기 집안
내력을 전혀 알 수가 없게되니 생각하면 한심하고 개탄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물은 원천이 있어 천파만지로 흐르고 나무는 뿌리가 있어 천지만엽으로 번창
하고 사람은 한 조상으로부터 천자만손으로 번영하니 그 이치가 마치 수(水)와
목(木)과 같다.
---안동김씨와 대구김씨는 한 할아버지의 자손이다. 그 원류를 캐보면 서기 65
년 계림 시조대왕 대보공 『김알지』께서 신라 경주 계림 금궤 속에서 탄생하
신 후 서기 935년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에 이르기까지 870년 동안을 연면
(連綿)하게 왕실을 누려오다가 경순왕의 제4자인 대안군 공부시랑 평장사 『은
열』공의 제3자이신 공부시랑 평장사 『숙승』공께서 비로서 안동김씨로 수적
(受籍)하니 이분이 곧 안동김씨의 시조이고『숙승』공의 6대손인 고려국추충정
란정원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도첨의중찬 판전리사사 세자사 도원수 상락군개
국공 충렬공 휘 『방경』이 안동김씨의 중시조이시고 충렬공의 현손 병사공 휘
『달(達)』이 곧 대구김씨의 시조이시니 안동김씨와 대구김씨는 동원분파의 가
장 가까운 혈족지간이다.
---병사공 휘『달』은 충렬공 『방경』 할아버지의 막내 손자이시니 따지고 보
면 안동김씨는 큰집이요 대구김씨는 작은집이다. 기지간(其之間) 병사공 휘
『달』씨께서 대구김씨로 분관한 사실만 기록되고 기후손이 서북지방에서 번성
하고 있다고 전하여 졌을 뿐 종회간에 피차 교류가 두절되어 답답하든 차에 이
번에 확고한 사적고증으로 명실상부하게 완벽한 족보로 수보(修譜)하게 되니
만시지감은 있으나 기쁘기 한이 없다.
---충렬공 『방경』 할아버지의 후손에서 분관된 김씨를 열거하면 수안김씨,
사천김씨, 청주김씨, 영해김씨, 정산김씨, 대구김씨 등 6파이고 충렬공 『방경』
의 셋째 아우되시는 충순공 『현경』의 손자 수성백 『영규』는 수성최씨의 시
조가 된다. 이와같이 한 할아버지의 자손으로서 일곱갈래로 분관되었다. 또 충
렬공 현손대에서 안동김씨는 21파로 분파되었는데 그중에서 오직 끝파만이 대
구김씨로 분관되어 나가고 20파가 존재하여 오던중 그후 무후한 파와 다시 분
관된 파를 제외하고 안동김씨는 현재 15개파가 존재하고 있으며 그 숫자는 50
여만명에 달하고 있다. 안동김씨와 대구김씨는 촌수를 따저도 그다지 멀지 않
은 사이다.
---다만 본관만 달리하였을 뿐 한 혈족 한 집안이다. 평소에 타성과 같이 소원
한 감이 불무(不無)하였으나 이번의 족보를 발간하게 되므로서 혈족지간의 정
의와 친밀감이 더욱 두터워지게 되었다.
---여기에 한가지 명기할 것은 안동김씨는 구안동김씨와 신안동김씨의 두가지
안동김씨가 있으나 이 두사이는 글자만 같을 뿐 그 시조가 전연 다르며 완전한
타성이라는 사실이다.
---서두에서 말한바와 같이 우리 구안동김씨는 신라 대보대왕『김알지』의 27대
손 경순왕의 손자인 공부시랑 평장사 『숙승』공을 시조로 하고 그 6대손인 충
렬공 『방경』을 중시조로 하고 있으나 신안동김씨는 고려초 태사공 『김선
평』을 시조로 하고 이조 중엽 광해군 때 도정을 지낸 『김극효』를 중시조로
하고 있다. 본관 이름은 다같이 안동이지만 서로 시조를 달리하고 있으므로 전
연 관계가 없다. 그러나 대구김씨와 구안동김씨는 본관은 서로 다르다 할지라
도 다같이 충렬공 『방경』할아버지의 후손이므로 한 혈족지간이다. 따라서 대
구김씨와 신안동김씨와는 전연 관계가 없으니 혼동없기를 바란다.
---끝으로 대구김씨 문중의 무궁한 발전과 번영을 기원하면서 서문에 가름한다.
--------------------------------------------------------1987년(무오) 8월 일
-------안동김씨대종회회장. 정치학박사. 국회의원 김명회(金明會) 근지(謹識)
2. 안동김씨대동보(1979년 기미) 권지1에 의거 선안동김씨에서 분관된 7개 성씨
의 선계(先系)는 다음과 같습니다.
(1)수안김씨 : 효인→ 방경(장자) → 선(장자) → 자(장자) - 후손위수적수안김씨
(2)정산김씨 : 효인→ 방경(장자) → 선(장자) → 승용(차자) → 구(차자) →
- - - - - - - - 성목(장자) - 후손 일파위 분적정산김씨
(3)사천김씨 : 효인→ 방경(장자) → 선(장자) → 승택(3자) → 묘(장자) →
- - - - - - - - 제안(차자) - 분적사천김씨
(4)청주김씨 : 효인→ 방경(장자) → 선(장자) → 승우(4자) → 지연(장자) →
- - - - - - - - 윤(장자) - 분적청주김씨
(5)영해김씨 : 효인→ 방경(장자) → 윤(4자) → 영요(차자) → 행(장자) →
- - - - - - - - 철(차자) - 분적영해김씨일파(후손 억민)
(6)대구김씨 : 효인→ 방경(장자) → 윤(4자) → 영요(차자) → 백(3자) →
- - - - - - - - 달 - 위분적대구김씨
(7)수성최씨 : 효인→ 현경(3자) → 준 → 영규(차자) - 사성최씨
3. 분관된 7개 성씨족보의 근거와 그분들의 족보에서 주장하는 선계는 다음과
같습니다.
(1)수안김씨(수안김씨대동보 권지상. 1986년 병인)
---효인→ 방경(장자) → 선(장자. 시조) → 자(장자) → 위 → 득남 → 이(履),
---수(綏), 정(精)
(2)정산김씨(안동후인 정산김씨족보 전(2000년))
---효인→ 방경(장자) → 선(장자) → 승용(차자) → 구(차자) → 성목(장자) →
---휴 → 익염(차자) → 한(차자) → 복수(일명 : 광유, 차자, 관조)
(3)사천김씨(사천김씨족보전. 1991년 신미)
---효인→ 방경(장자) → 선(장자) → 승택(3자) → 묘(장자) → 제안(차자) →
---부(관조)
(4)청주김씨(청주김씨대동보(문헌. 세적, 1993년 계유)
---경순왕자 청주군 김정〈☞ 확인할 수 없음〉
(5)영해김씨(영해김씨족보. 2001년)
---효인→ 방경(장자) → 윤(4자) → 영요(차자) → 행(장자) → 철(차자) →
---성호(차자) → 억민(일명 : 억동, 잉관(仍貫)영해)
(6)대구김씨(대구김씨족보전. 1978년 무오)
---효인→ 방경(장자) → 윤(4자) → 영요(차자) → 백(3자) → 달(시조) →
---부형 → 호연(장자, 서포파조), 호견(차자, 용만파조)
(7)수성최씨(수성최씨세보 권지1. 1997년 정축)
---효인→ 현경(3자) → 준 → 영규(차자, 賜姓崔氏)
● 분관성씨순례Ⅰ.(수안김씨)
수안김씨 대동보중 서문 일부.(상기족보 pp2∼6)
서기 1986년 병인보 발간에 즈음하여
(전략)
---아무리 종시속(從時俗)이라 하나 여사자세(如斯姿勢)가 과연 타당하다고는 생
각되지 않을 것이다. 이유인즉 내가 어찌해서 김씨성을 갖게 되었으며 김씨성
중에서도 유독 수안(遂安)이란 본관을 갖게 된 것인지를 지실(知悉)코저 한다면
족보의 필요성은 설명을 불요하는 명약관화한 사실이다.
---그러면 이제 우리 시조님께서 물려주신 수안김씨의 유래를 살펴보는 것이 긴
요하며 순서라 생각됨에 그 내력을 약술코져 한다. 구보서문에 누누이 상술되
어 다시 복언할 필요가 없다 하겠으나 구보서문은 순 한문이라 번역을 하여도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없지 않기에 송구불이(悚懼不已)이오나 후세들이 고열
(考閱)에 편의가 될까 사료되어 감히 첨기(添記)하는 바이다.
---즉, 김씨라는 성은 신라 대보공 알지께서 금궤에서 탄생하셨기에 사성(賜姓)
되었으며 그후 왕성씨(王姓氏)로 계승되어 왔으며, 28세손이신 경순왕의 제4자
대안군『은열(殷說)』의 8세손 상락군(上洛君)『방경(方慶)』의 장자『선( )』
시조님이 수안군(遂安君)에 봉해지신 이후로 수안으로 위관(爲貫)되었다.
---『선』시조님께서는 려조 중신으로서 원충단력안사보정공신봉익대부지밀직사
전법판서상장군(元忠端力安社保定功臣奉翊大夫知密直司典法判書上將軍)으로 계
셨다. 또한 8세조이신 휘『순몽(順蒙)』께서는 이조 중종 18년 2월 계미 당상관
도제조통정대부(堂上官都制調通政大夫)로서 이조정원실록일지에 과적(科績)이
등재되었으며, 10세손 휘『필경(必慶)』께서는 성균진사로서 성품이 순후하시고
학덕겸비효우돈독하시며, 향리 후진 양성에 유공하셨고, 11세손이신 울산군 (휘
난서(鸞瑞))이 무과에 급제출사하신 후 수차 승급되시어 울산부사를 역임하셨으
며 임진왜란 당시는 학봉 김성일선생의 영막에서 전략을 모의 혁혁한 전공을
세워 2등공훈에 기록되었으며, 울산공의 증손이신 14세손 평천공(휘도장(道章)
은 호군으로서 국가에 유공하셨기에 좌승지에 증직되셨고 15세손이신 애헌공
(휘덕오(德五))께서는 성균진사이시며 성리학자로 박학다식하시어 향리인 영해
면 괴시(槐市)에서 후진양성에 기여하신 공로가 지대하시였기에 우금까지도 문
도의 후예들이 수계(授契)라는 명칭으로 년1차식회합하여 공의 유덕을 추모하
고 있으며 문집도 전승되어 숭앙받는 분이시며 16세손이신 이 ○암공(휘하구
(夏九)께서는 문과에 급제 출사하신 후 영조 무신년(서기 1978년) 역란을 평정
하시고 문과동추부사를 지내신 후 도산서원원장을 역임하신 공적이 찬연하며
(○암공의 방주요참조) 그 외에도 역대에 선( )하여 대소 관직에서 유공하신
분이 여러분 계시나 일일이 열거키 지남함에 이만 생략코저 한다.
---이와 같이 위대하신 선조님의 혈맥(血 )이 면면히 승계된 종족임을 자부함
과 아울러 자손된 자 만의 일이라도 조상에게 누가됨이 없도록 항상 명심하고
행동해야겠다.
---대략 서술한 바와 같이 가문임을 자처하며 지대한 공훈을 쌓은 선대의 얼이
담긴 실로 필요하고도 소중한 족보를 편집함에 있어서는 구태의연한 방식을 탈
피하여 현세대에 적합한 보다 현대화된 보첩을 발간하여 현세대들이 족보에 대
한 당위성과 필요성을 깊이 인식토록 누구나 보기쉽게 편찬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할 것이다. 현재 보전된 보책중 제1차 발간분이 계유보(서기 1873년)이고 2
차분이 갑진보(서기 1904년)이며 3차분이 임술보(서기 1922년)고 가장 가깝게
발간된 것이 30수년전인 갑오보(서기 1954년)인 바 계유보이전 보책은 임진병
화 등으로 소진되어 상계를 상고함에 다소의 소루(疏漏)함이 있어 휘위(爲)자를
중시조로 뫼셔 1세로 하여 편찬하였으나 갑오보시에 휘선( )자의 장자이신 휘
자(資)자를 각종 문헌에 의해 찾았으나 중시조이신 휘위(爲)자가 휘 자(資)자와
의 관계가 불분명하여 그 전보와 같이 편집하였으나 금보에는 구보와 달리 수
안군이신 휘선( )자를 시조로 뫼셔 1세 휘자(資)자를 2세 전보에 중시조로 등
재되신 휘위(爲)자를 3세로 뫼셔 보계를 명백히 하였음은 세와 세간의 년수차
를 계산한 결과 직계로 계승되었음이 명백함에 기인하였음을 부연(敷衍)하여
둔다. (후략)
-----------------------------------------서기 1986년 6월 일 전종원근서
《다음은 분관성씨순례Ⅱ 정산김씨편 입니다.》
▣ 김영윤 - 감사합니다
▣ 김주회 - 귀한 자료입니다. 계속되는 자료가 기다려집니다.
▣ 김항용 -
▣ 김영환 - 가까운 집안을 찾았습닏.
▣ 김태서 - 글 감사드립니다.
▣ 김재익 -
▣ 김태영 - 감사합니다. 궁금했던 것이 한꺼번에 풀렸습니다.
▣ 김은회 - 귀한글 잘읽었습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