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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영남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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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중 작성일07-02-08 14:32 조회1,69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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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5-04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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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영남사람들 .19] 일제 항거 자결 이만도·김도현
단식… 바다속으로… "이 한몸 바쳐"

권오영<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 writer_icon.gif기자가 쓴 기사 더보기

향산 이만도 선생 순국유허비. 향산 선생이 일제의 침략에 단식으로 항거하다 순국한 곳에 세운 기념비. 안동시 예안면 인계리에 있다.
향산 이만도 선생 순국유허비. 향산 선생이 일제의 침략에 단식으로 항거하다 순국한 곳에 세운 기념비. 안동시 예안면 인계리에 있다.
우리나라가 일제에게 국권을 강탈당하고 강산이 유린되는 한말 풍운의 역사 속에서,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여 순국 자결한 인물들이 많이 나왔다. 조국을 사랑했던 순국지사들은 조국이 일제에 짓밟히는 것을 좌시할 수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희생 정신이 이어져 반드시 광복을 이룰 것이라는 꿈과 희망을 안고 자결의 길을 택하기도 했다.


향산 이만도(響山 李晩燾)는 1842년(헌종 8년)에 이황(李滉)의 후손으로 태어나 1910년에 순국하였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의지가 매우 굳었는데, 15세에 뜻을 세우고 과거에 합격하기 전까지는 왼쪽 엄지손가락을 펴지 않기로 맹세하였다. 그 뒤 10년 동안 각고의 노력 끝에 1866년(고종 3년) 문과에 장원 급제한 다음에야 굽혔던 손가락을 폈다.

1910년 일본에 의해 우리나라가 강점되자, 이만도는 8월14일부터 단식을 시작하였다. 단식기간 동안 가족과 친척은 물론 그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의 곁에서 애를 태웠다. 이만도는 단식 중에 많은 사람과 대화를 나누었고, 자손과 친척들에게 충성과 효도, 공경, 우애 등을 가르쳤다. 그리고 영영 만나지 못할 것 같은 지인들에게는 편지를 썼다.

8월22일에 군수와 일인(日人), 순사들이 정황을 파악하기 위해 그를 찾아와 회유하고 협박하였으나, 그는 조금도 굴하지 않고 큰소리로 쫓아버렸다. 그런데 9월5일 일본 경찰이 와서 강제로 미음을 먹이려 하자, 그는 "나는 내 명(命)으로 죽을 것이다. 지금 너희들이 나를 속히 죽이고자 하느냐. 나를 속히 죽이고자 하면 즉시 총을 쏘아 죽여라"고 소리치면서 가슴을 열어젖힌 채 계속해서 고함을 질렀다. 그는 "나는 조선의 당당한 정2품 관료이다. 어떤 놈이 감히 나를 회유하며, 어떤 놈이 감히 나를 공갈하고 협박하려 드느냐"라고 일경(日警)들에게 호통을 쳤다. 그는 단식 24일 만인 1910년 9월8일 순국하였다. 그의 순국은 나라는 망해도 조선의 선비 정신은 송백(松柏)처럼 푸르게 살아있다는 것을 온 몸으로 보여준 것이었다.

이만도는 단식 중에도 정신이 아주 맑았으며, 찾아오는 사람들과 세상사를 이야기하고 학문을 논했다. 가끔 자신의 심경을 시로 표현하여 주위 사람들에게 보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의 단식이 과장되어 전파되는 것을 아주 경계하였다. 어떤 이가 찾아와 "조선 500년 이후 삼천리 안에 오직 선생 한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라고 하자, 그는 "이 무슨 말인가"라며 큰소리로 저지하였다. 그는 이처럼 자신의 행동을 높이 기리는 말과 글에 대해서는 아주 준엄하게 저지했다. 오직 나라를 위한 순국 정신이 정당하게 알려지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를 지켜보는 당시 사람들은 실로 조선의 국맥(國脈)이 그의 순국에 달려 있다고 여겼다.

벽산 김도현(碧山 金道鉉)은 1852년(철종 3년)에 영양에서 태어났다. 그는 타고난 성품이 강개하고 기백이 있었다.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고, 그 효성은 다시 나라에 대한 충성으로 승화되었다. 1895년 말에 단행된 단발령(斷髮令) 이후 김도현은 영양, 안동, 예안 등에서 의병 운동을 주도하느라 전심전력을 다하였다. 그는 자신 때문에 아버지가 이리저리 사방을 전전하며 피해 다니는 것에 몹시 마음 아파했다. 의병 운동 중에 아버지를 잠시 찾아 뵙고 하룻밤을 모시고 잔 뒤 그 다음 날 떠날 때, 아버지가 "삼가고 삼가라"고 경계하자, 그는 "사람의 자식된 자로서 진실로 국가의 일이 아니라면 어찌 이렇게 행동하겠습니까"라고 하면서 나라 위한 일편단심에 다시 갈 길을 재촉하곤 하였다.

이만도가 단식 자결하던 1910년, 그도 함께 그 길을 가려 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어찌 네가 먼저 죽는 꼴을 차마 볼 수 있겠느냐"는
도해단(蹈海壇). 김도현 선생이 순절한 영덕군 영해면 대진리 바닷가에 그의 순국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제단이다.2
도해단(蹈海壇). 김도현 선생이 순절한 영덕군 영해면 대진리 바닷가에 그의 순국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제단이다.
당부에 자식된 도리로 그 말씀을 차마 저버릴 수 없었다. 1914년 아버지가 작고하자, 그는 그 해 11월7일 동짓날에 영해의 관어대(觀魚臺)로 가서 유서와 절명시(絶命詩)를 남기고 바다에 걸어 들어가 자결하였다. 그에 앞서 김도현은 아들에게 바다에 빠진 시신을 수습하여 염(殮)하는 것은 자신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니 그렇게 하지 말도록 일렀다. 그는 나라에 대해서는 충성을 다했고 부모에 대해서는 효도를 다한 인물로 칭송되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절명시를 남겼다.

오백년 왕조의 말엽에 태어나/ 붉은 피는 온 간장에 들끓었었지

열아홉 해 동안 나라 위한 일념으로/ 수염과 머리털이 다 세어버렸네

망국의 눈물 채 마르지 않았는데/ 아버지마저 돌아가시니 가슴이 찢어지누나

머나먼 바다가 보고 싶었고/ 지금은 마침 양(陽)이 돌아온다는 동짓달이네

홀로 서니 옛 산은 푸르기만 하고/ 백방으로 생각해도 한 가지 방책이 없구나

희고 흰 저 천길 파도 속은/ 이 한 몸을 감출 수 있겠구려



백암 박은식(白巖 朴殷植)은 그의 역사서 '한국통사(韓國痛史)'에서 김도현의 이러한 애국 정신과 행동을 기록하여 우리 역사에 길이 전하였다.

순국지사들의 숭고한 희생 정신은 그들이 조상 대대로 누려온 높은 사회적 신분에 응당 보답해야 한다는 도덕적 의무로만 설명될 수 없다. 그들은 모든 사회적 기득권을 포기한 채 오직 순수한 애국심의 발로에서 자결을 택하였다. 그 때문에 이만도나 김도현의 순국 정신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더욱 그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그 분들의 뜻을 되새기는 일이야말로 어려운 오늘을 극복하는 정신적 힘이요, 바른 길이라 믿는다.


1910년 8월14일 이만도는 단식을 시작하였다. 그가 단식으로 일제에 항거한다는 소식은 당시 지식인들에게 큰 힘이 되었다. 나약한 필부도 그의 단식 소식을 듣고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겠다고 다짐할 정도였다. 하루에도 100여명의 선비와 서민들이 단식 중인 그를 방문하였다. 방문자 중에는 영양의 김도현이 있었다. 그는 이만도보다 열 살 아래였지만 서로의 마음을 익히 잘 아는 사이였다. 그 역시 이만도의 단식 소식을 접하고 8월23일 그의 거처를 방문했다. 이만도가 단식한 지 열흘째 되는 날이었다. 여러 사람 가운데서 김도현을 발견한 이만도는 그를 특별히 불러서 말하였다.

"우리 두 사람의 마음을 서로 안 지가 이미 여러 해인데, 이렇게 먼 길을 찾아 와주다니."

두 사람은 서로 손을 마주잡고 아무 말이 없었다. 이심전심이었다. 한참 후 그가 떠나려 하자, 이만도가 먼저 "벽산! 그럼 잘 가세"라며 이승에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인사말을 하였다. 김도현은 "향산 선생님! 그럼 쉬 뵙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만도는 그의 말뜻을 금방 알아차렸다. 이런 두 사람의 작별 인사를 옆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은 무슨 말인지 선뜻 이해할 수 없었다. 그로부터 열흘 남짓 지나 이만도는 순국하였다.

김도현은 1914년 아버지 상을 치른 그 해, 곧 이만도가 세상을 떠난 지 4년이 되던 해의 동짓날에 동해바다로 걸어 들어가 순국의 길을 택하였다. 향년 63세였다. 그때서야 사람들은 앞서 그들이 주고받던 인사가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 "쉬 뵙겠습니다"라는 김도현의 인사말은 '저도 선생님과 같이 지금 자결하고 싶습니다만, 집에 연로하신 아버지가 계시니 당장 실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저도 곧 순국의 길을 택하여 선생님을 구천에 가서 뵙겠습니다'는 인사였던 것이다.

#다음 연재인물은 정인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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