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사람들... 일연
페이지 정보
김정중 작성일07-02-08 14:44 조회1,436회 댓글1건본문
| ||||||||||||
[역사속의 영남사람들 .56.끝] 일연 | ||||||||||||
崔氏 무신정권 붕괴후 충렬왕의 요청, 불교계 재편작업의 구심점
경상도 중심 '가지산문' 핵심적 역할, 운문사서 주석하며 '三國遺事' 착수
군위 인각사(麟角寺) 경내에는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저자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보각국사(普覺國師) 일연(一然)의 비석이 서 있다. 여기에는 그의 문도 외에 8명의 단월(檀越: 시주·후원자) 명단이 수록되어 있다. 박송비(朴松庇)와 최령(崔寧)을 제외하면, 이들 모두는 충렬왕(忠烈王)대 경상도 안렴사와 경주의 지방관을 역임한 인물들이다. 이들은 고려와 원 연합군에 의한 일본 원정군, 곧 동정군(東征軍) 파견시 군비와 물자 동원의 책임을 도맡은 영남의 지방관들이었다. 1281년 충렬왕은 일본으로 떠나는 제2차 동정군을 독려하기 위해 친히 경주를 방문했다. 이곳에서 그는 청도 운문사(雲門寺)에 주석하고 있던 일연을 행재소로 불렀다. 이듬해 일연은 개경의 광명사(廣明寺)로 거처를 옮겼고, 승려로서는 최고위직인 국존(國尊)의 자리를 차지하는 영광을 안았다. 원은 2차 일본 원정을 앞둔 1279년 9월, 고려에 전함 900척을 만들도록 지시했다. 그 이듬해 11월 고려는 군량미 7만여섬을 비축해 두었다. 일본 원정을 위한 준비 작업이 완료된 것이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1281년 마침내 14만명에 달하는 여·원 연합의 동정군이 일본으로 향했다. 당시 여·원 연합군의 집결지였던 영남의 피폐상은 말이 아니었다. 승려 충지는 그의 시 '영남의 고통'에서 당시 정황을 절절하게 그려냈다. 영남의 쓰라린 모습 / 말보다 눈물 먼저 흐르네 두 도에서 군량을 준비하고 / 세 곳 산에서 전선을 만들었네… 유명이야 다르지만 / 목숨 보존을 어찌 기약할 수 있으랴 남은 사람은 노인과 어린이뿐 / 억지로 살려하니 얼마나 고달픈 일이랴 고을마다 도망간 집이 반이요 / 마을마다 토지가 황폐해졌다네 어느 집인들 토색질 당하지 않을 것이며 / 어느 곳인들 시끄럽지 않으랴 관세도 면하기 어려우니 / 군조를 어찌 덜 수 있을까… 게다가 당시 영남의 불교계는 치유가 불가능할 정도로 극도의 혼란상을 보였다. 결혼하여 아내를 가진 승려가 절반을 헤아렸고, 승직은 뇌물의 다과로 거래되었다. 그 때문에 '비단선사(羅禪師)' '비단수좌(綾首座)'라는 말들이 공공연하게 나돌았다. 불교계는 심하게 훼손된 상태였고 농민들은 피폐해지고 있었다. 일연은 1206년 오늘날 경산시에 해당하는 장산군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이씨는 해가 집에 들어와 사흘이나 비추는 꿈을 꾼 뒤에 그를 낳았다고 한다. 아버지 김언필(金彦弼)은 아들의 현달로 좌복야(左僕射)에 추증되었다. 당시 장산군은 경상도의 대읍인 경주의 속현(屬縣)이었다. 속현이란 수령이 파견되지 않는 고을을 말한다. 고려 중기까지만 해도 읍세가 미약했던 속현은 중앙 관료를 거의 배출할 수 없었다. 게다가 일연이 태어날 무렵을 전후하여 장산군의 주읍(主邑)이던 경주는 극심한 세파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가 태어나기 4년 전인 1202년에는 '신라부흥운동'이 경주를 중심으로 일어나 영천, 청도 등지로 퍼져나갔다. 당시 실권자 최충헌(崔忠獻)이 이 운동을 2년 만에 가까스로 진압할 정도로 저항의 불길은 거셌다. 그 때문에 최충헌은 그의 집권에 노골적으로 반발한 경주에 대한 정치적 보복을 감행했다. 경주를 경상도의 거점 대열에서 제외시키고, 그 대신 상주, 진주, 안동을 거점 지역으로 재편한 것이다. 이후 경상도는 '상진안동도(尙晉安東道)'로 불렸다. 이 때 경주 속현 또한 상주와 안동으로 각각 분속되었다. 그는 1227년 22세의 나이로 승과에 급제했고, 이후 현풍 비슬산 보당암(寶幢庵)에 정착하여 22년 동안이나 그곳에서 수행했다. 일연은 당시 불교계를 주도하던 수선사(修禪社)와 백련사(白蓮社) 세력과는 거리를 일정하게 유지하고 있었다. 수선사와 백련사가 최씨 무신정권의 든든한 정신적 버팀목이 되었던
그렇지만 일연은 이 무렵 보당암에서 수행 정진하고 있었을 뿐이다. 불교계가 대몽항쟁에 적극 나서던 당시 상황에서 그는 수행승의 본분을 충실히 지켜 나갔던 것이다. 그는 1270년 원종(元宗)의 왕정 복고 이후 펼쳐진 새로운 정치 상황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몽고 항쟁시기에도 수행승으로 일관했던 그의 전력이 이후 재편된 불교계를 대표하는 인물이 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을 것이다. 훗날 일연을 강화도의 선월사(禪月社)로 초청하여 중앙 진출을 위한 결정적인 교두보를 마련해준 이는 같은 경상도 출신인 박송비였다. 그는 무신정권의 붕괴 과정에서 일익을 담당한 인물이기도 했다. 원종을 이어 왕좌에 오른 충렬왕 또한 수선사를 대체할 만한 새로운 불교 세력의 지지가 필요했다. 그러한 대체세력으로 경상도를 중심으로 한 가지산문(迦智山門)이 부상하고 있었다. 일연은 이 과정에서 단연 주목받던 승려였다. 이 때문에 충렬왕은 즉위 3년만인 1277년 일연을 운문사로 초청하여 그곳에 주석할 것을 명했다. 가지산문의 구심점 역할을 일연이 맡은 것이다. 따라서 일연의 부상은 대몽항쟁으로부터 원 간섭기로의 전환이라는 시대적 전변, 수선사로부터 가지산문으로의 교체라는 시대적 상황이 빚어낸 결과였던 것이다. 일연은 민족주의자가 아니다? '삼국사기'가 불교사 언급안해 '유사'로 보완 충렬왕의 명으로 운문사에 주석하게 된 일연은 그곳에서 '삼국유사'의 집필에 착수했다.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 단정한 단재 신채호는, 고려 인종대 '묘청(妙淸)의 난'을 1천년 우리나라 역사상 제일 대사건으로 보았다. 그는 낭불(朗佛) 사상의 소유자인 묘청이 일으킨 정변이 유가사상의 소유자인 김부식(金富軾)에 의해 진압됨으로써 우리나라는 사대주의로 들어서게 되었다고 했다. 이때 이후 '삼국사기(三國史記)'를 지은 김부식은 사대주의자로 낙인찍힌 반면, 단군신화(檀君神話)를 수록한 '삼국유사'는 민족의식이 발현된 역사서로 주목받아 왔다. 그렇지만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은 결코 민족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가지산문을 중심으로 원 간섭기 고려 사회가 안정되는 데 일조한 승려였을 뿐이다. 따라서 그의 역사책은 결코 민족주의 의식의 발현으로 씌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가 '삼국유사'를 집필하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삼국유사'는 중국의 역대 '고승전(高僧傳)'의 영향을 받아 저술되었다. 그렇지만 삼국시대 이래의 간략한 연표와 역사를 기술한 '왕력(王曆)' 편과 '기이(紀異)' 편을 따로 설정해 두었다는 점에서 '고승전'과는 달랐다. 아마도 일연은 유학자 출신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불교사를 서술하지 않은 것에 대한 보완 작업으로 '유사(遺事)'를 저술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 작업은 대장경 조판 사업으로 불교 자료를 섭렵한 고려 중기 불교계의 경험과 선승들의 활발한 저술 활동에 힘입은 바 컸을 것이다. 일연의 효성은 유별났다. 그는 9세 때 불가에 입문하여 어머니의 품을 떠났지만, 그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정성껏 모셨다. 그가 주로 비슬산을 중심으로 수행한 것 또한 어머니의 봉양과 관련 깊다. 비슬산은 고향 경산과 가까워 어머니를 돌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1283년 78세의 고령에 이른 일연은 노모 봉양을 위해 대궐에서 물러나 운문사에 주석했다. 그 노모는 이듬해 96세로 세상을 하직했다. 그의 효성에 감동한 조정에서는 군위의 인각사를 수리하여 토지를 주고, 국사의 만년을 편안히 돌보게 하였다. 그런 탓에 '삼국유사'에는 '효선(孝善)' 편이 따로이 설정되어 있다. |
댓글목록
김정중님의 댓글
![]() |
김정중 |
---|---|
작성일 |
1206-1283 일연
1212-1300 충렬공
경북 경산시에서는 2006년 일연스님 탄신 800주년 행사를 다양하게 성황리에 마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