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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사람들-곽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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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중 작성일07-02-08 15:22 조회1,93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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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0-19 09:46:24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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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영남사람들 .41] 곽재우
풍전등화 나라 구하기..분열과 모함속 壬亂 의병 일으켜

김강식<울산대 연구교수> writer_icon.gif기자가 쓴 기사 더보기

망우당이 군사를 불러 모으기 위해 북을 매달아 쳤다는 현고수. 망우당의 외가인 경남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에 있다.
망우당이 군사를 불러 모으기 위해 북을 매달아 쳤다는 현고수. 망우당의 외가인 경남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에 있다.
흔히들 전쟁이 영웅을 낳는다고 한다.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큰 피해를 끼친 임진왜란에서는 해전의 이순신(李舜臣)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실제 전투와 피해는 육지가 훨씬 심각했다. 일본군의 침략으로 관군이 무참히 무너지는 상황에서 분연히 일어나 끝까지 싸워서 조국을 구한 인물이 바로 홍의장군(紅衣將軍) 곽재우(郭再祐·1552~1617)다.

"당초 모든 성이 연달아 함락되자, 여러 진의 장수와 방백들은 모두 깊은 산 속으로 숨어 감히 싸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에 곽재우가 울분을 참지 못하고 성토하기를 '벼슬아치나 백성들이 왕조의 보살핌을 받은 지가 200년이나 되었다. 그럼에도 나라가 위급하게 되자 모두 스스로 보전할 계책만 세우고 임금의 어려움을 돌아보지 않는다. 이제 나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이 나라 300 고을에서 남자가 한 사람도 없는 것이니, 어찌 만고의 수치가 아니겠는가'" (조경남, '난중잡록' 1592년 4월22일)

임진왜란 때 전국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곽재우가 창의의 심정을 토로한 말이다. 그렇지만 그의 창의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못했다. 패주하거나 도망한 지방관이나 장수들이 그를 도와주기는커녕 도리어 모함했기 때문이다. 곽재우는 전란 초기 초계현의 흩어진 장졸들을 모으고, 신반현의 창고 곡식을 끌어내 군량을 확보하고자 했다. 그 때 합천군수 전현룡은 경상감사 김수와 경상우병사 조대곤에게 도적들의 난동이라 보고하고, 그와 의병에 가담한 일행들을 잡아들이도록 촉구했다. 경상도 방어의 총책임자인 감사 김수는 변변한 대응 한 번 하지 못한 채 지리산 깊은 산중의 운봉으로 피신했다. 비겁하기 짝이 없는 김수의 태도에 울화가 터진 곽재우는 감사 처단을 주장하는 격문을 띄웠다. 김수 또한 곽재우를 역적으로 몰아 맞받아치는 등, 양측은 일촉즉발의 위기로 치달았다.

향토 방위와 국가 보위를 위해 나선 곽재우의 순수한 열정이 그만 감사와 병사에 의해 역적의 행동으로 내몰리고 만 것이다. 이때 곽재우를 곤경에서 구해준 이가 초유사로 임명되어 경상도로 급히 달려온 학봉 김성일(金誠一)이었다. 김성일은 전날 곽재우의 부친 곽월(郭越)이 사간(司諫)으로 재직할 때 응교(應敎)를 지낸 사간원의 동료로서, 곽재우의 구명에 적극성을 보였을 뿐만 아니라, 감사와의 갈등을 중재해 주었다. 김성일은 삼가 등지에서 모여든 의병들을 그의 부대에 배속시켜 주기까지 했다. 고령 출신 의병장 김면(金沔)과 인근 지역의 사족들도 그의 구명에 힘이 되어 주었다. 박사제(朴思齊) 등은 여러 읍에 통문을 돌려 여론을 환기시켰고, 의주 행재소에 머물던 국왕 선조에게 사람을 파견하여 구명을 위한 신원소를 올렸다. 이러한 다방면의 노력 덕택에 그는 무사히 의병 활동을 수행할 수 있었다.

달성군 현풍면 솔례가 고향인 곽재우는 현풍 곽씨로, 1552년 경남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 외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황해도 관찰사를 역임한 곽월(郭越)이었다. 목사를 역임한 외조부 강승두(姜承斗)는 의령의 대표적인 사족이었다. 외가에서 자란 그는 의령을 의병의 본거지로 삼았다. 그는 1578년 아버지가 동지사(冬至使)로 명나라에 갈 때 따라간 적이 있었다. 그 때 아버지가 선물로 받은 붉은 비단으로, 임진왜란 당시 옷을 지어 입고 선두에 서서 '하늘이 내린 붉은 옷의 장군'이라는 의미의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 스스로 칭했다.

곽재우 부대는 지역 사족들과의 긴밀한 제휴, 협조 속에서 활동했다는 점에서 특징이 있다. 그는 우선 자신의 노복을 의병에 채워 넣고 가산도 선뜻 내놓았다. 군량 조달 책임자로 임명된 매형 허언심(許彦深)도 노복을 내놓았으며, 군기를 맡은 허자대(許子大), 선봉장 심대승(沈大承), 돌격장 권란(權鸞) 등도 같은 행동을 취했다. 이처럼 곽재우 부대의
솥뚜껑을 닮은 바위가 있는 정암(鼎岩)나루터. 서부 경남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로, 임진왜란때 곽재우의 의병이 대승을 거둔 곳으로 유명하다.2
솥뚜껑을 닮은 바위가 있는 정암(鼎岩)나루터. 서부 경남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로, 임진왜란때 곽재우의 의병이 대승을 거둔 곳으로 유명하다.
정암루와 정암교. 의령읍으로 들어설 때 제일 먼저 만나는 곳이다.3
정암루와 정암교. 의령읍으로 들어설 때 제일 먼저 만나는 곳이다.
핵심 인물 17인은 의령과 삼가를 지역적 기반으로 한 사족들이었다. 이들 부호는 앞을 다투어 소를 잡고 쌀을 내어 군사를 먹였다.

임진왜란은 평범한 야인으로 생을 마감했을지도 모를 곽재우를 조선을 대표하는 의병장으로 우뚝 솟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곡창지대인 전라도로 진격하던 일본군 제3군을 물리친 의령 정암진 전투는 전란 초기의 전황을 결정짓는 중대한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전쟁 발발 이래 최초로 패배를 경험한 일본군은 결국 낙동강을 우회해서 전라도로 진공할 수밖에 없었다. 이 사실을 탐지한 곽재우는 과감하게 선제 공격을 감행하여 낙동강변의 영산, 창녕, 현풍 등지를 수복했다. 이 때문에 일본군은 낙동강 수로를 포기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결국 전라도 진격에 필요한 시간을 많이 허비해 버리고야 말았다.

곽재우의 관로는 험난의 연속이었다. 대의와 의리를 중시하는 남명학파의 적자인 그의 강경한 성격 탓이었다. 그는 불의를 보고는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그는 1585년 별시(別試)에 2등으로 당당하게 급제한 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책문의 내용이 국왕 선조의 뜻에 거슬려 파방(罷榜)이 되면서부터 관직과의 인연은 한없이 멀었다. 일생 동안 29회에 걸쳐 관직이 내려졌지만 그는 14차례만 응했을 뿐이며, 그 기간도 길지 않았다.

종전 이후 곽재우는 산성 수축, 육군의 양성, 선혜법(宣惠法)의 시행을 촉구하는 국정 쇄신책을 건의했다. 하지만 첨예한 붕당의 역학 관계 속에서 건의가 수용되지 않자, 그는 곧장 병을 핑계로 귀향해 버렸다. 이 때문에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전라도 영암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해배(解配) 이후 그는 현풍 비슬산에 들어가 솔잎을 먹으면서 절식(絶食)을 하는가 하면, 영산현의 낙동강 가 창암진에 망우정(忘憂亭)이란 정자를 짓고 여생을 보냈다. '망우'는 근심을 잊고 살겠다는 뜻인데, '망우당'이란 당호는 여기에서 유래한다. 그러나 그는 그르쳐만 가는 나라에 대한 근심을 결코 잊지 않았다. 정국 현안에 대해 끊임없이 제기한 여러 상소에서 그러한 관심의 일단을 읽을 수 있다. 그의 호는 '망우'지만, 실제로는 '불망우(不忘憂)'였던 셈이다.


"온갖 생각 끊으면 음의 기운 사라져"

심신연마수단 道敎의 대표적 인물

곽재우는 한국 도교의 대표적인 인물로 꼽힌다. 당시가 성리학 일변도의 사회였지만, 도가사상을 수용하는 지식인들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피비린내 나는 사화와 당쟁을 겪으면서 은둔 지식인을 중심으로 심신 연마의 수단으로 도교가 유행했다. 곽재우가 바로 그런 인물이었다. 18세기 전반에 살았던 홍만종(洪萬宗)은 한국 역사상 대표적인 단학인(丹學人) 40여 명을 소개한 '해동이적(海東異蹟)'에서 곽재우를 그 중 한 사람으로 꼽았다. 조식잠(調息箴)과 양생명(養生銘)은 도교에 관한 그의 대표적인 글이다.

'온갖 생각을 끊어 버리면 음의 기운이 사라지고, 헛된 인연을 단절하면 양의 기운이 자라난다. 음의 기운이 다하고, 양의 기운이 순수해지면 단(丹)이 성숙된다. 단이 성숙되면 신이 날아다니는 선의 지계(地界)가 된다' ('망우당전집'1, '유묵')

이처럼 곽재우는 단학에 조예가 깊었다. 그것은 현실 정치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낀 다음, 자신의 수련에 정진한 결과였다. 조식(調息)은 숨을 고른다는 뜻으로 단전호흡을 말한다. 그는 자신이 체험한 선의 경지를 다음과 같이 시로 표현했다.

'아래로 장강(長江)이요, 위로는 산인데 /망우정 한 채 그 사이에 자리했네 /망우선자가 시름을 잊고 누웠는데 /밝은 달과 맑은 바람을 마주보며 한가로이 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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