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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사람들-류후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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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중 작성일07-02-08 14:56 조회1,71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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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영남사람들 .22] 낙파 류후조
영남사림 반목 없앨 카드
270여년만에 '영남인 宰相'

연갑수<한국외국어대학교 강사> writer_icon.gif기자가 쓴 기사 더보기

낙파 류후조의 친필 유묵.
낙파 류후조의 친필 유묵.
"대관령 남쪽은 본디 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 일컬어진 곳이며, 더욱이 경은 '경의 가문' 사람이다. … 내가 경을 시험해 보고 경험해 보았으니, 꿈을 꿀 것도 없고 점을 쳐 볼 것도 없이 나의 재상은 결정난 것이다."

1866년 정월 고종이 류후조(柳厚祚)를 우의정에 임명하면서 내린 교서의 첫 마디였다. '경의 가문'이라고 한 것은 류후조가 바로 영남의 대표적 명문인 류성룡(柳成龍) 가문이라는 뜻이다. 고종이 류후조를 재상으로 삼으면서 제일 먼저 강조한 것이 그가 영남 출신이라는 것, 특히 영남의 명문 집안 출신이라는 것이었다.

일국의 재상을 임명하면서 새삼스럽게 그의 출신 지역을 제일 먼저 거론한 것은 영남지역 인사를 재상으로 임명한 것이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1590년 류성룡이 재상이 된 이래 영남인으로서는 270여년 만에 두 번째 재상이 탄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남인으로서 더군다나 지방 출신 인물이 재상이 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상당한 파격이었다. 숙종 20년(1694) 갑술 환국 이후 남인들은 권력에서 철저하게 소외되었고, 특히 안동 김씨 등 서울의 노론 유력 가문들이 권력을 독점하던 19세기 전반 세도정치 하에서 남인들은 관직에 오르는 것 자체가 드문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류후조가 일약 재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권력자이던 대원군의 의도 때문이었다. 대원군은 그동안 정권에서 소외되었던 세력들, 즉 종친이나 남인·북인, 무장들의 세력을 신장시킴으로써 노론 외척 가문들을 견제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1864년(고종 1) 6월 북인인 임백경(任百經)이 재상에 임명되기도 하였으나 87세의 고령이던 그는 이듬해 초에 세상을 떠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시 정계에 진출한 남인 중 고위 관원이던 류후조가 재상이 되었던 것이다.

류후조를 등용한 대원군의 의도가 안동 김씨를 비롯한 노론 외척을 견제하려는 것이었지만, 정작 류후조가 철종 연간에 당상관이 될 수 있던 배경에는 안동 김씨의 배려가 있었다는 점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류후조는 늦게 벼슬을 시작하였다. 40세인 1837년(헌종 3) 사마시에 급제한 후 후릉 참봉에 제수된 것이 첫 관직이었다. 상서원, 형조 등의 내직 벼슬을 거쳐, 장수·장흥 등지의 수령이 되었다. 그러나 1851년(철종 2) 장흥부사를 끝으로 벼슬을 사양하고 귀향하였다. 승승장구하던 류후조가 갑자기 사직한 이유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철종 즉위 이후 권력을 독점하게 된 안동 김씨 세력이 반대파들을 숙청하는 과정에서 류후조의 벼슬도 중단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류후조의 휴식은 3년 만에 끝났다. 그리고 그것은 류후조 인생에서 새로운 전기가 되었다. 그의 나이 57세인 1854년(철종 5) 와서(瓦署) 별제로 벼슬을 다시 시작하여 이듬해 2월에 강릉부사에 이르렀다. 강릉부사는 당하관에서 당상관으로 승진할 수 있는 요직으로 집권자의 배려 없이는 가기 어려운 자리인데 류후조가 임명된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강릉부사라 할지라도 문과를 급제한 사람이 아니면 당상관으로 승진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류후조가 환갑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급제한 다음 달에 안동 김문의 재상인 김좌근의 주청에 의해 바로 당상관의 자급을 받았고, 결국 종2품 가선대부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철종 말년에 류후조의 지위가 이미 이처럼 높아져 있었기 때문에 대원군이 집권한 이후 판서를 거쳐 재상에 이를 수 있는 기반이 되었던 것이다.

철종 중반 이후 류후조의 벼슬이 다시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바로 가문의 후광이 있었다. 류성룡의 셋째아들 류진(柳袗:1582~1635)은 안동에서 상주로 옮겨서 우천파(愚川派)의 파조가 되었는데, 류후조는 그의 7세 종손이었다. 류후조의 아버지 류심춘(柳尋春:1762~1834)은 세자 시절의 순조, 익종, 헌종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영남 출신 재상이 예사롭지
류진의 7세 종손인 류후조의 생가. 상주시 중동면 우물리에 있다.2
류진의 7세 종손인 류후조의 생가. 상주시 중동면 우물리에 있다.
않았던 만큼, 류후조에게는 재상들에게 일반적으로 기대하는 국정 수행 능력 이외에 또 한가지의 역할이 요구되었다. 그것은 바로 영남인들의 민심을 추스르고 힘을 모아서 정권의 든든한 기반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런데 19세기 영남에는 사림들이 분열하여 반목하는 중요한 사안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병호시비(屛虎是非)였다. 류후조는 재상으로 임명된 1866년 봄부터 대원군의 지시로 병론과 호론 양자의 보합을 중재하였다. 그러나 60년 간의 반목이 쉽게 수그러들기 어려웠다. 1870년(고종 7) 8월 대원군의 지시에 따라 안동부사가 양측 유생들을 모아서 다시 보합을 시도하였으나 이 때도 실패하였다. 이에 대해 대원군은 병론측이 은근히 이기려는 마음을 갖고 있다며 류후조의 역할에 대하여 크게 실망하였음을 토로하기도 하였다.

결국 대원군의 강력한 의지와 류후조의 중재로 호계서원측의 '대산실기(大山實記)'와 병산서원측의 '여강지(廬江誌)'의 판목을 1870년 12월 관가의 마당에서 함께 깨뜨림으로써 병호시비는 일단 봉합될 수 있었다.

류후조가 영남의 힘을 모으는 일은 비단 병호시비의 중재에만 머무는 것은 물론 아니었다. 가령 1866년 병인양요가 발생하였을 때는 강력한 척사론으로 대원군의 정책을 지지하는 한편, 국가의 궁핍한 재정을 보충하기 위하여 영남의 유림들에게 원납전의 납부를 직접 독려하기도 하였다. 류후조가 병호시비를 중재하고 서양의 침입에 대항하기 위하여 원납전을 독려한 것이 얼마나 성과가 있었는지에 대한 평가는 차분히 따져 볼 일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노론 세도 정권을 견제하기 위하여 대원군 정권은 영남 유림들의 역할에 커다란 기대를 하고 있었으며, 그 중심에는 낙파 류후조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屛虎是非란?

"이황 신위의 동쪽에"

류성룡-김성일派 갈등, 치열한 '위판' 자리다툼

병호시비의 불씨는 이황의 위판을 모신 서원인 안동의 여강서원(廬江書院)에 이황의 대표적 제자인 류성룡과 김성일(金誠一)의 위판을 1620년(광해군 12) 추가로 모시게 된 데 있었다. 즉 이황의 신위를 가운데 두고 어느 분의 신위를 좀 더 높은 자리, 즉 동쪽에 놓을 것인가가 시빗거리였다. 나이는 김성일이 앞섰는 데 반하여, 관직은 류성룡이 높았기 때문에 시비가 생길 수 있었다. 이때는 영남의 거유 정경세(鄭經世)의 결정에 따라 류성룡의 신주를 상위, 즉 동쪽에 모시게 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이황과 그 수제자인 류성룡, 김성일의 위패를 모심으로써 여강서원은 영남의 대표적인 서원 중 하나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1676년(숙종 2)에는 국왕으로부터 '호계서원(虎溪書院)'이라는 액자를 하사받는 영광을 누리게 되면서 이후 호계서원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런데 1805년(순조 5) 영남 유림들이 류성룡, 김성일, 정구(鄭逑:1543~1620), 장현광(張顯光:1554~1637) 등 4명을 문묘에 종사케 하는 상소문을 올리는 과정에서 류성룡과 김성일 중 누구의 성명을 먼저 쓸 것인가를 놓고 대립하다가 문묘 종사 자체가 무산되는 일이 벌어졌다. 일이 이렇게 진행되자 본격적으로 시비가 붙으면서 감정의 골이 깊어졌다. 이후 사소한 시비도 새로운 시비로 번져 나가면서 분란은 더욱 커져 갔다. 특히 1812년(순조 12) 김성일의 학맥을 계승한 이상정(李象靖)을 추가로 배향하는 문제로 양자의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다.

결국 류성룡파는 호계서원과 절연하여 병산서원을 중심으로 병론(屛論)을 형성하고, 김성일파는 호계서원을 독점하면서 호론(虎論)을 형성하면서 반목하기에 이르렀다. 병호시비란 바로 여기서 유래한 말로 결국 병산서원파(류성룡파)와 호계서원파(김성일파)가 서로 시비를 다툰다는 뜻이다. 그런데 김성일과 류성룡은 퇴계의 학통을 양분해 왔기 때문에 이들의 반목은 안동지역 뿐 아니라 영남지역 전체 유림들의 결집력을 약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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