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사람들-김유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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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중 작성일07-02-08 17:10 조회1,506회 댓글0건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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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영남사람들 .44] 김유신 | |||||||||||||||||
망국의 왕족'新'김씨 신라사회 활동 제약
戰功으로 가문 부상, 무열왕가 기둥으로
題字 : 토민 전진원
나당전쟁이 한창이던 673년 7월1일, 신라의 전쟁영웅 김유신(金庾信)이 세상을 떠났다. 595년에 태어나 79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했던 생을 마감한 것이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백제,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것으로 완수되지 않았다. 동맹국이었던 당나라가 신라를 포함한 한반도 전역에 대한 지배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당전쟁은 신라로서는 국가의 존망을 건 치열한 싸움이 될 수밖에 없었다. 김유신이 임종에 이르자 문무왕(文武王)은 친히 문병하는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흐느껴 울었다. "과인에게 경이 있음은 고기에게 물이 있음과 같다. 만일 피하지 못할 일이 생긴다면 백성들을 어떻게 할 것이며, 사직 또한 어떻게 할 것인가?" 김유신의 죽음은 조카 문무왕에게 그만큼 절박하게 다가왔던 것이다. 김유신은 금관가야 왕족의 후예로 태어났다. 증조부 김구해(金仇亥)는 금관가야의 왕이었으나, 532년 나라가 멸망하자 신라에 투항하였다. 그의 가문은 신라 사회에서 진골이란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지만, '신(新)' 김씨라 하여 신라의 전통 귀족과는 구별되었다. 따라서 망국의 왕족 김유신 가문이 신라 사회에서 활동하는 데는 많은 제약이 따랐다. 김유신의 아버지 서현(舒玄)은 길에서 진흥왕의 동생인 숙흘종의 딸 만명(萬明)을 보고 한눈에 반해 중매도 없이 야합하였다. 숙흘종이 이 사실을 알고 만명을 별채에 가두었으나, 만명은 만노군(충북 진천) 태수로 부임하는 서현과 함께 도망하여 그 곳에서 김유신을 낳았다. 김유신은 15세가 되자 화랑이 되었는데, 특별히 주위의 기대를 모았다. 김유신은 후일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으로 즉위하는 김춘추(金春秋)와 집 앞에서 공놀이를 하다가 김춘추의 옷을 찢었다. 그리고 누이 문희에게 그의 옷을 깁도록 했다. 이를 계기로 문희는 임신을 했고, 우여곡절 끝에 혼인할 수 있었다. 김춘추는 화백회의에 의해 폐위된 진지왕(576~579)의 손자였지만, 유력 진골 귀족이라는 점에서 김유신 가문이 혼인하기란 결코 쉽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 신라 사회에서 김유신 가문이 인정받는 길은 전쟁에서 무공을 쌓는 길밖에 없었다. 김유신의 조부 무력(武力)은 554년 관산성(충북 옥천) 전투에서 백제 성왕을 전사시키는 눈부신 전공을 세웠다. 629년 아버지 서현은 사돈인 김춘추의 아버지 용춘(龍春)과 함께 대장군이 되어 고구려의 낭비성을 공격하였다. 유신도 이 전투에 참가하여 성을 함락시키는 큰 전과를 올렸다. 김유신 가문은 신라에서 군공으로 크게 부상하던 신흥 무장가문이었던 셈이다. 새 시대의 개막 642년 백제는 신라의 낙동강 전선 사령부가 있는 대야성(경남 합천)을 기습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이 전투에서 대야성 군주(郡主)였던 김춘추의 사위 품석과 그의 아내가 죽음을 맞았다. 사랑하는 딸과 사위를 잃은 춘추는 백제에 대한 보복을 다짐했다. 그리고 고구려로 청병의 길을 나섰다. 이 때 유신은 춘추와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마시면서, 춘추가 60일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으면 군사 행동을 취할 것을 맹세하였다. 선덕여왕(善德女王) 말년인 647년, 화백회의 의장으로 있던 상대등 비담은 여왕이 나라를 잘 다스리지 못한다는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왕군과 반란군은 각각 월성과 명활성에서 대치하였다. 한밤중에 하늘에서 큰 별이 월성으로 떨어지자 반란군은 여왕의 군대가 패할 징조라 하여 환호성을 질렀다. 여왕이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몰라 하자, 유신은 연에 불을 붙여 하늘로 올리고는, 어젯밤 떨어진 별이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고 소문을 내었다. 그리고는 반란군이 어리둥절해 하는 틈을 타서 신속하게 군대를 출동시켜 이들을 진압하였다. 654년, 선덕여왕을 이은 진덕여왕(眞德女王)이 후사 없이 죽자, 귀족들은 상대등 알천에게 섭정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무력을 장악하고 있던 유신은 귀족 세력을 억누르고 춘추를 국왕으로 즉위시키고 말았다. 폐위 당한 진지왕(眞智王)의 손자 춘추가 국왕으로 즉위한 사건은 신라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는 성골이 아닌 진골로서 즉위한 첫 번째 왕이었다. 더구나 망국의 왕족 김유신과의 결탁이었으니, 그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삼국사기'에서 무열왕의 즉위를 중대(中代)의 시작이라 하거나, '삼국유사'에서 하고(下古)의 시작이라 하여, 새로운 시대로 이해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태종무열왕 김춘추는 즉위 이듬해 문희 소생인
무열왕가와 어수(魚水)의 관계로 태종무열왕의 즉위 이후 당과의 친선 관계가 강화되면서, 신라의 삼국통일 전쟁은 절정으로 치달았다. 660년 5월, 대장군 김유신은 무열왕과 함께 5만 대군을 이끌고 백제 정벌의 길에 올랐다. 그리고 마침내 소정방이 이끄는 당군과 연합하여 8월18일 의자왕의 항복을 받아냈다. 그는 원정의 공로로 대각간이란 관등을 받았다. 그러나 이듬해 평생의 지기였던 무열왕이 죽고, 그의 아들 법민이 즉위하여 문무왕이 되었다. 664년 70세가 된 김유신은 관직에서 물러나려 하였으나, 문무왕은 안석(安席)과 지팡이를 내려 주며 그의 은퇴를 허락하지 않았다. 667년 신라와 당이 고구려 원정에 착수하자 그는 73세의 나이로 다시 원정길에 올랐다. 그러나 평양성 부근까지 진출한 당군이 철수했다는 소식에 되돌아오고 말았다. 이듬해 6월, 다시 고구려 원정군이 편성되었을 때 그는 대당(大幢) 대총관이 되어 정벌을 총지휘하는 자리에 올랐다. 그렇지만 그는 이 원정에 나설 수 없었다. 고령인데다 신경통을 앓고 있으니 서울에 머물러 있으라는 국왕의 특명 때문이었다. 9월 21일 나당 연합군은 마침내 평양성을 함락하고 보장왕의 항복을 받았다. 김유신은 비록 출전하지는 않았으나, 그간의 공로로 태대각간(太大角干)이란 이례적 관등을 제수 받고, 식읍 500호를 받았다. 유신이 죽자 문무왕은 부의(賻儀)로 채색 비단 1천 필과 벼 2천섬을 주고, 군악대 100명을 보내 주었다. 장사를 치른 후에는 비석을 세워 그의 공적을 기록하게 하고, 수묘인(守墓人)을 배치시켰다. 그는 죽어서 왕과 다름없는 대우를 받았던 것이다. 김유신은 사후 성인(聖人)으로까지 추앙되었다. '삼국유사'에는 '만파식적(萬波息笛)' 설화가 전하고 있다. 문무왕의 아들 신문왕이 동해 감은사 앞 바다에 행차하여 신비한 피리를 얻었다는 것이다. 이 설화에서 문무왕과 김유신은 각각 '용'과 '천신(天神)'으로 신라를 지키는 두 성인으로 묘사되었다. 김유신은 죽어서도 무열왕가와 함께 하는 존재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무열왕가가 단절되고 약 50년이 지난 뒤, 흥덕왕(826~836)은 그를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봉하였다. 그는 원 신라인이 아닌 멸망한 금관가야의 후예로서 '대왕'이란 칭호를 얻은 유일한 인물이 되었다. 토지 30결 바쳐 명복 빌어..삼국통일 일등공신의 탄식 김유신 후손들의 몰락 779년 4월, 김유신의 무덤에서 회오리바람이 세차게 일어났다. 티끌과 안개로 캄캄한 가운데 한 장수가 날쌘 말을 타고 있었다. 뒤에는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든 40여명의 군사가 있었는데, 장수를 따라 죽현릉으로 갔다. 죽현릉은 김씨로서 처음 왕위에 오른 미추왕(味鄒王)의 능이었다. 조금 뒤 왕릉 안에서 울면서 탄식하는 소리가 들렸다. "신이 평생 동안 어려운 시국을 구하고 삼국을 통일한 공을 세웠습니다. 하오나 지난 경술년(770)에 신의 자손이 아무런 죄도 없이 죽었고, 왕이나 신하들은 저의 공적을 생각지 않습니다. 신은 차라리 멀리 다른 곳으로 옮겨가서 다시는 나라를 위해 애쓰지 않을 것이니, 왕께서는 허락해 주십시오" 하였다. 왕이 대답하기를 "나와 공이 나라를 지키지 않는다면 저 백성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공은 이전과 다름없이 힘쓰도록 하오" 하였다. 세 번이나 청했지만 들어주지 않자 회오리바람은 되돌아가고 말았다.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혜공왕(惠恭王)은 몹시 두려워하면서, 김유신 무덤으로 대신을 보내 사과하였다. 그리고 김유신이 세운 취선사(鷲仙寺)에 토지 30결을 바쳐 명복을 빌게 하였다. 무열왕가의 마지막 왕인 혜공왕대(765~780), 무엇이 삼국통일의 일등 공신 김유신의 혼을 이처럼 노하게 하였을까. 김유신 가문은 한 때 신라 최고의 영화를 누렸지만, 세월의 흐름 속에서 위상이 한결같지가 않았다. 혜공왕 말기 그 자손들은 이미 권력의 핵심에서 밀려나 있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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