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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사람들 -원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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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중 작성일07-02-08 17:07 조회1,48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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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3-29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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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영남사람들 .7] 원효
'일체 걸림 없으면 생사를 벗어나…'
최후까지 불도의 大道 안 물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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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의 영정. 일본 고산사(高山寺)에서 전해 내려온 것으로 18세기 중반 이전 작으로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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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당화상비편. 신라 애장왕대(800~809)에 건립된 원효 관련 현존 최고(最古)급 자료.
불일(佛日)을 처음으로 빛낸, 또는 새벽을 의미한다는 이름의 원효는 진평왕 39년(617), 압량군(押粱郡)의 남쪽, 불지촌(佛地村)의 북쪽, 율곡(栗谷) 사라수(娑羅樹) 아래에서 태어났다. 집이 본래 율곡 서남쪽에 있었는데 어머니가 만삭의 몸으로 이 나무를 지나칠 즈음 해산하였다고 한다. 성은 설(薛)씨요, 아버지는 담날(談捺)나마, 할아버지는 잉피공(仍皮公)이었다. 아명(兒名)이 '서당(誓幢)'이라고 하나 이것은 신라 군대 명칭과 같고 후일 그의 비명 또한 '서당화상비(誓幢和尙碑)'로 기록된 점에서 그 이상의 복합적 의미를 담고 있는 듯하다. 성씨나 조상의 신분으로 보아 6두품(혹은 5두품)의 가계가 아니었나 추측된다.

신라에서 불교는 법흥왕대(514∼540)에 공인되었으니 그로부터 한 세기도 넘지 않을 시점에 출생한 셈이다. 밖으로는 을지문덕이 살수대첩을 이룩한 지 5년만이요, 내적으로는 삼국의 각축전이 첨예화하여 전운이 한반도 전역을 짙게 드리워가던 시점이었다.

젊은 시절 그는 매우 격한 질풍노도의 시절을 보낸 듯하다. 방랑생활을 즐겼고 금역(禁域) 출입에도 거침 없었다고 한다. 그 즈음 불교계는 핵심 진골 승려 자장이 국통으로 통괄하고 있었는데, 그는 율사(律師)로 통칭될 만큼 계율을 중시하던 인물이었다. 이런 시대 원효의 상기한 파격 몸짓은 당대 불교계 흐름에 대한 반항적 성격을 내포한 것이기도 했다. 100명의 고승을 뽑아 인왕경을 강경하는 이른바 백고좌(百高座)에 예비 후보로는 선발되었으나 본선에서 탈락되었음도 이같은 '시대와의 불화' 잔흔인 셈이다. 그러나 정국이 일변하여 무열왕(武烈王)이 등극하면서 황룡사에서 국왕과 대신들을 운집시킨 가운데 득의의 설법을 하게 되니, 스스로 100개의 서까래에는 끼지 못했으나 하나의 대들보가 되었다는 선언이 나온 연유이다.

반면 전 국통 자장은 서울을 떠나 강원도 오대산과 태백산 쪽을 전전하게 되는데 그의 본거지였던 분황사는 원효의 주거지로 바뀌게 된다. 더하여 원효는 요석궁 과공주(寡公主)와 결혼까지 하게 되는데 골품제 사회에서 비록 과부라 하나 왕녀와의 결혼은 6두품 원효로서는 파격적인 일이었다. 결혼 후 원효는 승복을 벗고 거사(居士)라 칭하게 되지만 여인의 품에 안주하지 않고 다시 절집으로 걸어 나와 기층사회를 떠돌며 불교를 널리 전파하였고, 신문왕 6년(686) 혈사(穴寺)에서 임종하니 최후까지 불도의 대도(大道)에서 비겁하거나 물러섬은 없었다. 아들은 요석공주가 낳은 설총이 있었는데 유학을 닦아 해동 유종(儒宗)이 되었음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원효의 사상은 대개 3계열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그 첫째는 화엄사상이요, 둘째로는 아미타신앙, 다른 하나로 화쟁(和諍)사상을 꼽을 만하다.

불교는 개창지 인도에서부터 여러 계열로 분파되었는데, 그중 개혁파 갈래들이 엉겨 대승불교를 이루고 그 내부에 다시 공(空)을 강조하는 반야 계통, 불신(佛身) 통일성에 주력하는 화엄 계통과 함께 민중불교로서 아미타 정토신앙이 성행되었다. 이 가운데 화엄 계열은 중국에서 종파로 다듬어져 성당(盛唐) 시대에 크게 유행했다. 원효는 기층사회에 불교를 포교할 때 화엄의 "일체 걸림 없는 사람은 한 길로 생사를 벗어나리"란 글을 뒤웅박과 노래에 담아 전파했고, 죽기 직전 쓰던 글도 '화엄경소'였음을 보면 일생 이쪽 계열 사상을 중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불교 내에서도 특히 원융무애한 편인 화엄은 교리의 종합 통일을 지향했던 원효에게 적합한 이론 기조가 되었음직하다.

한편 아미타신앙은 민중적 불교로서 염불을 중시하는 경향이다. 삼국유사에는 원효로 말미암아 신라 민중들이 불타(佛陀)의 호를 알고 '나무(南無)'를 할 줄 알게 되었다고 하는데,'나무본사아미타불(南無本師阿彌陀佛)'이란 말처럼 그 염불 주체는 의당 아미타불이었을 것이다. 원효가 기거하던 분황사 여종의 남편인 광덕은 아미타불의 서방 정토 극락세계를 간구하는 애절한 '원왕생가(願往生歌)'를 남겼거니와 사후 여종의 새 남편이 된 엄장 또한 원효의 지도로 극락 왕생할 수 있었다는 기록 등은 원효가 기층 민중과의 연대에 아미타신앙을 주 매개로 삼았음을 확인시키는 사례들이다.그러나 원효 사상의 독자성을 가장 짙게 드러내는 부분은 무어라 해도 화쟁론(和諍論)이다. 사후 120년 전후에 세워진 서당화상비에 이르기를 "청색과 쪽풀은 본체가 같고 얼음과 물은 근원이 같은데, 거울이 수많은 형상을 받아들이고 물이 (천갈래로) 갈라지는 것과 같다. (마멸) 융통하여 서술하고는 그 이름을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이라 하였다. 무리들이 칭찬하지 않는 사람이 없어 모두 이르기를 '좋다'라고 하였다. (중략) 범어로 번역하여 곧 사람들에게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그 나라 삼장이 보배로 귀중히 여긴 연유를 말한다"라고 했다.

본래 원효의 글은 중국과 일본에도 전해졌지만 그 일부가 범어로도 번역되었음이 비문에서 드러나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글이 해당되는지는 자세하지 않다. 다만 일본쪽 기록들에 의하면 상기 십문화쟁론이 진나문도(陳那門徒)들에 의해 인도에 전해졌음은 분명하다.

근래에 들어 화쟁 사상을 남북통일 이념의 일환으로 제시하는 경우가 있다. 물론 원효의 논리는 불교계 내부에 초점 맞춰진 것으로 정치 이데올로기와는 범주가 다르다. 또한 현하 남북관계에 수평적 양시론이 설 자리는 협애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원효는 폭넓은 학인으로서 당대인의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큼 불교 밖 사상에도 두루 폭이 넓었고, 특정 종파를 넘어 본질에서의 하나됨을 직시하는 혜안을 언제나 놓치지 않았다. 이러한 기본 자세는 사상과 정서의 대립이 첨예한 금일 한국 사회에도 그 핏기어린 예각들을 무디게 하고 민족사의 방향을 화해 일치로 인도할 소중한 이정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종교 분쟁과 문명 간 충돌이 지구촌의 새로운 현안으로 떠오른 작금, 증오와 이질(異質)들을 녹여 하나로 화해시킬 새 시대의 패러다임이 자신의 이름처럼 여명의 새벽 빛으로 내재해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김재경<경일대 교수>

<>결혼도 하고…고기도 먹고
원효의 奇行은 왜?

원효(元曉)와 동시대 고승 자장(慈藏)이 근엄한 엘리트 스님, 해동 화엄조(華嚴祖)로 지목되는 의상(義湘)이 단아하고 원융한 풍모인 데 비해, 원효는 포효하는 야생마 같은 스님이었다. 궁성 안에 발을 들여놓지 않는다고 큰 소리 친 거리의 승려 대안(大安), 노비의 아들로 오어사(吾魚寺)의 애주가 스님인 혜공(惠空) 등 주위 도반(道伴)들도 난형난제의 기인들이긴 마찬가지였다.

드높은 명성에 짝하여 원효는 비난도 그만큼 많이 받았고, 송사(訟事)에 연루되어 곤욕도 치렀다. 그러나 신라 하대(下代) 흥륜사 금당에 10명의 고승을 조상(造像)할 때 혜공, 사파(巳巴) 등 측근 도반들과 한 무리로 봉안되는 영광을 얻었다. 명성은 해외에서 더욱 높아 중국과 일본, 심지어 인도에서 그의 글은 두루 연구되고 존경되었다.

원효는 누구인가. 그러나 이 물음에 자신있게 대답할 사람은 별로 없다. 그는 지금도 수수께끼의 인물이다. 왜 결혼했을까. 군승(軍僧)으로 머문 경력은 사실인가. 혜공과 불경 토론하다 느닷없이 낚시해 고기를 잡아 먹음은 무슨 배짱인가. 그 심회를 정확히 헤아릴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는 물밀듯 밀려오는 새로운 동아시아의 최정밀한 사상체계를 온몸으로 껴안고 자기화해 내었음은 분명하다. 한 아이를 출산함에도 회임과 해산의 고통이 격렬하듯, 원효는 아시아인들의 사색의 결정체 불교를 한국인의 피와 살이 섞인 사상으로 재창출하는데 그의 70 평생을 진통 속에 치열히 불태워 바쳤다. 설총은 원효가 떠난 후 경모종천(敬慕終天)의 예를 드렸고, 분황사 원효의 소상(塑像)은 배례하는 아들을 향해 홀연히 고개 돌려 바라보아 후대까지 그런 응시의 모습이었다 한다. 이제 그의 얼굴은 우리를 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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