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답게 산다는 것”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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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영 작성일07-02-10 11:17 조회1,478회 댓글0건본문
모든 걸 잃어도 늘 넉넉한가
1519년 서른네 살 김정국(金正國·1485~1541)은 정계에서 쫓겨났다. 기묘사화로 선비들이 죽어나갈 때였다. 동부승지의 잘 나가는 벼슬을 지냈던 그는 시골집으로 낙향했다. 고양군 망동리에 정자를 짓고 스스로 ‘팔여거사(八餘居士)’라 불렀다. ‘팔여’는 여덟 가지가 넉넉하다는 뜻. 녹봉도 끊겼는데 ‘팔여’라고? 한 친구가 생뚱맞은 새 호의 뜻을 물었다. 은퇴한 젊은 정객(政客)은 웃으며 말했다.
“토란국과 보리밥을 넉넉하게 먹고,
따뜻한 온돌에서 잠을 넉넉하게 자고,
맑은 샘물을 넉넉하게 마시고,
서가에 가득한 책을 넉넉하게 보고,
봄꽃과 가을 달빛을 넉넉하게 감상하고,
새와 솔바람 소리를 넉넉하게 듣고,
눈(雪)속에 핀 매화와 서리 맞은 국화 향기를 넉넉하게 맡는다네.
한 가지 더. 이 일곱 가지를 넉넉하게 즐기기에 ‘팔여’라 했네.”
김정국의 말을 듣고 친구는 ‘팔부족(八不足)’으로 화답한다.
“진수성찬을 배불리 먹고도 부족하고,
휘황한 난간에 비단병풍을 치고 잠을 자면서도 부족하고,
이름난 술을 실컷 마시고도 부족하고,
울긋불긋한 그림을 실컷 보고도 부족하고,
아리따운 기생과 실컷 놀고도 부족하고,
좋은 음악 다 듣고도 부족하고,
희귀한 향을 맡고도 부족하다
한 가지 더. 이 일곱 가지 부족한 게 있다고 부족함을 걱정하더군.”
안대회 지음|푸른역사 “선비답게 산다는 것”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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