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백범(47) 격랑의 시작 ( 안중근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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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작성일02-05-16 19:17 조회1,551회 댓글0건본문
안중근 安重根 [1879~1910.3.26]
개요
독립운동가.
본관 : 순흥
별칭 : 아명 안응칠
활동분야 : 독립운동
출생지 : 황해도 해주
주요수상 :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962)
주요저서 : 《동양평화론》
내용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본관 순흥(順興)이며, 아명 안응칠(安應七)이다. 황해도 해주(海州)에서 출생했다. 한학(漢學)을
수학했으나 오히려 무술에 더 열중하였다. 1895년 아버지를 따라 가톨릭교에 입교하여 신식 학문에
접하고 가톨릭 신부에게 프랑스어를 배웠다.
1904년 홀로 평양에 나와 석탄상(商)을 경영하고 이듬해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는 것을 보자
상점을 팔아 1906년 그 돈으로 삼흥(三興)학교(후에 오학교(五學校)로 개칭)를 세우고, 이어
남포(南浦)의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인수, 인재 양성에 힘쓰다가 국운(國運)이 극도로 기울자
합법적인 방법으로는 나라를 바로잡을 수 없다고 판단, 1907년 연해주(沿海州)로 망명하여
의병운동에 참가하였다. 이듬해 전제덕(全齊德)의 휘하에서 대한의군참모중장(大韓義軍參謀中將) 겸
특파독립대장(特派獨立大將) 및 아령지구(俄領地區) 사령관의 자격으로 엄인섭(嚴仁變)과 함께
100여 명의 부하를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국내로 침투, 일군(日軍)과 격전을 벌였으나 실패,
노에프스키[烟秋]에서 망명투사들이 발간하는 《대동공보(大同公報)》의 탐방원(探訪員)으로
활약하는 한편 동료들에게 충군애국(忠君愛國) 사상을 고취하는 데 진력하였다.
1909년 동지 11명과 죽음으로써 구국투쟁을 벌일 것을 손가락을 끊어 맹세, 그 해 10월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러시아 재무상(財務相) 코코프체프와 회담하기 위해 만주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사살하기로 결심하고, 동지 우덕순(禹德淳)과 상의하여 승낙을 얻고 동지
조도선(曺道先)과 통역 유동하(柳東河)와 함께 이강(李岡)의 후원을 받아 행동에 나섰다.
1909년 10월 26일 일본인으로 가장, 하얼빈역에 잠입하여 역전에서 러시아군의 군례를 받는 이토를
사살하고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川上俊彦], 궁내대신 비서관 모리 타이지로[森泰二郞],
만철이사(滿鐵理事) 다나카 세이타로[田中淸太郞] 등에게 중상을 입히고 현장에서 러시아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곧 일본 관헌에게 넘겨져 뤼순[旅順]의 일본 감옥에 수감되었고 이듬해 2월, 재판에서
사형이 선고되었으며, 3월 26일 형이 집행되었다.
글씨에도 뛰어나 많은 유필(遺筆)이 있으며 옥중에서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을 집필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 김윤만 - 안중근의사의 세례명은 도마(토마)이고 침묵의 한국천주교에 햇불이셨으며, 몇년전 김수환 추기경님께서도 안의사 파문(?)과 관련하여 위대한 사과문을 발표하시기도 하였습니다.
▣ 김태서 -
▣ 김항용 -
▣ 김재익 -
▣ 김주회 -
▣ 김주회 - 윤만 종친님! 김수환 추기경 관련 안의사 파문(?) 이야기 간단히 소개해 주세요
▣ 김태영 -
개요
독립운동가.
본관 : 순흥
별칭 : 아명 안응칠
활동분야 : 독립운동
출생지 : 황해도 해주
주요수상 :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962)
주요저서 : 《동양평화론》
내용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본관 순흥(順興)이며, 아명 안응칠(安應七)이다. 황해도 해주(海州)에서 출생했다. 한학(漢學)을
수학했으나 오히려 무술에 더 열중하였다. 1895년 아버지를 따라 가톨릭교에 입교하여 신식 학문에
접하고 가톨릭 신부에게 프랑스어를 배웠다.
1904년 홀로 평양에 나와 석탄상(商)을 경영하고 이듬해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는 것을 보자
상점을 팔아 1906년 그 돈으로 삼흥(三興)학교(후에 오학교(五學校)로 개칭)를 세우고, 이어
남포(南浦)의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인수, 인재 양성에 힘쓰다가 국운(國運)이 극도로 기울자
합법적인 방법으로는 나라를 바로잡을 수 없다고 판단, 1907년 연해주(沿海州)로 망명하여
의병운동에 참가하였다. 이듬해 전제덕(全齊德)의 휘하에서 대한의군참모중장(大韓義軍參謀中將) 겸
특파독립대장(特派獨立大將) 및 아령지구(俄領地區) 사령관의 자격으로 엄인섭(嚴仁變)과 함께
100여 명의 부하를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국내로 침투, 일군(日軍)과 격전을 벌였으나 실패,
노에프스키[烟秋]에서 망명투사들이 발간하는 《대동공보(大同公報)》의 탐방원(探訪員)으로
활약하는 한편 동료들에게 충군애국(忠君愛國) 사상을 고취하는 데 진력하였다.
1909년 동지 11명과 죽음으로써 구국투쟁을 벌일 것을 손가락을 끊어 맹세, 그 해 10월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러시아 재무상(財務相) 코코프체프와 회담하기 위해 만주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사살하기로 결심하고, 동지 우덕순(禹德淳)과 상의하여 승낙을 얻고 동지
조도선(曺道先)과 통역 유동하(柳東河)와 함께 이강(李岡)의 후원을 받아 행동에 나섰다.
1909년 10월 26일 일본인으로 가장, 하얼빈역에 잠입하여 역전에서 러시아군의 군례를 받는 이토를
사살하고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川上俊彦], 궁내대신 비서관 모리 타이지로[森泰二郞],
만철이사(滿鐵理事) 다나카 세이타로[田中淸太郞] 등에게 중상을 입히고 현장에서 러시아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곧 일본 관헌에게 넘겨져 뤼순[旅順]의 일본 감옥에 수감되었고 이듬해 2월, 재판에서
사형이 선고되었으며, 3월 26일 형이 집행되었다.
글씨에도 뛰어나 많은 유필(遺筆)이 있으며 옥중에서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을 집필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 김윤만 - 안중근의사의 세례명은 도마(토마)이고 침묵의 한국천주교에 햇불이셨으며, 몇년전 김수환 추기경님께서도 안의사 파문(?)과 관련하여 위대한 사과문을 발표하시기도 하였습니다.
▣ 김태서 -
▣ 김항용 -
▣ 김재익 -
▣ 김주회 -
▣ 김주회 - 윤만 종친님! 김수환 추기경 관련 안의사 파문(?) 이야기 간단히 소개해 주세요
▣ 김태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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