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관성씨순례6.(대구김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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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만 작성일02-05-16 19:49 조회2,170회 댓글0건본문
● 분관성씨순례Ⅵ.(대구김씨)
제1장 우리문중의 연원.(상기 족보 pp931∼933)
---우리 대구김씨 3파(함경도 길주파, 서포파, 평안도 용만파)의 족보를 개관하
면 다같이 경순왕 후손임을 시인하고 있다. 그러나 중간계보에 있어서 각기 견
해가 구구하여 이것이 합보가 성사되지 않은 근본적 원인이 된 것 같다. 우리
용만파의 계묘, 무자 양보(兩譜)에는 경순왕 제19자 휘영을 시조로 하여 호견공
까지 34세를 열기하였는데 임신보에서는 과감히 삭제하고 입만시조 호견공부터
새로 시작하였으며 길주파는 입북시조 달공부터 시작하였고 서포파는 그나마
상계 실전으로 진무원종2등공신 대성공을 중시조로 하여 각기 경순왕 이후의
선세계보는 일응 불문에 붙이고 있는데 서포파의 지파로 보이는 경성파와 강서
종(두파 족보는 입수하지 못하였으나 길주파 족보 서문에서 별보를 한 사실을
찰지(察知)함)이 수보(修譜)시에 하나는 경순왕 후예 휘행(荇)의 제2자가 달공이
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하나는 달공은 경순왕 후예 휘백(栢)의 장자라 주장하였
다. 결론부터 말하면 강서종인의 주장이 정당하였다. 달씨의 부친은 휘백이요
백씨는 구안동김씨(신안동김씨와는 무관) 중시조 충렬공 휘방경의 제4자 휘륜
의 계남(季男) 휘영요의 제3자(季男)이다. 즉 달씨는 충렬공 휘방경의 고손이다.
경성파가 주장한 행씨는 백씨와 6촌형제간이며 그 후예는 장자 『장』은 거처
구안동김씨의 유력한 파를 형성하고 있다.(구안동김씨족보 참조) 따라서 우리
대구김씨는 구안동김씨에서 분관하였으며 구안동김씨는 경주김씨에서 분관한
것이다. 즉, 경순왕 제4자 은열공을 시조로 하는 경주김씨에서 분관한 상락군
이청을 시조로 하고 충렬공 휘방경을 중시조로 하는 구안동김씨를 거쳐 그의
고손인 병사공참의 휘달씨로부터 대구김씨로 분관한 것이다. 신라김씨 분관록
과 모든 김씨족보에 기록되어 있는 대구김씨 시조 좌랑 부형공은 달씨의 차남
이며 우리의 입만시조 호견공과 그의 형 호연공은 그의 아들이다. 이리하여 길
주파는 달공의 장손계 후예이고 호연공은 서포파의 시조이고 대성공은 중시조
이며 호견공은 용만파 시조가 되어 대구김씨 함평 3파를 형성하였다.(경성파와
강서종은 길주파와 별보를 한 것으로 보아 서포파 인 듯 하다)
---우리 대구김씨의 조거지(祖居地)가 대구 도화촌이었음은 주류 3파가 다같이
전하고 있다. 분관시조 병사공(참의공) 달씨가 함경도 길주로 유배될 때 장남
여연씨는 동반 시측케 하였고 차남 부형씨는 모친과 함께 고향에 남겨두고 이
후(爾后) 대구김씨로 행세할 것을 지시하였다고 본다. 달공 유배당시 그이(의)
백부 『송(松)』공은 개국원종공신으로 그 후손이 단천에 거주하고 있었으며(구
안동김씨족보 참조) 그의 4촌 『철(哲)』공은 이태조 함흥 행재시 ○위장으로
있었든 일들의 연유로 여연씨는 해지(該地)에 정착 대구김씨로 행세하여 오늘
의 길주파를 이루었다. 한편 부형공은 기후 등과하여 좌랑 벼슬에 올랐는데 이
때 비로소 대구김씨가 세간에 알려짐과 동시 대구김씨의 대표적 인물로 기억
전래되어 경순왕 후예의 모든 김씨족보에는『대구김씨는 좌랑(佐郞) 부형지후
(富亨之後)』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구안동김씨족보에 달공으로서 끝맺음을 하
고 그 이후는 대구김씨로 분관하였다고 구전되어온 사실은 달공이 대구김씨로
분관한 시조임을 입증하고 있다. 본인이 안동김씨대종회를 찾아 초인사를 교환
했을 때 『과연 구전이 틀림은 없구먼. . . . 말만 백씨의 장자 달씨가 대구김씨
로 분관되었다고 전해오고 있을 뿐. . . . 실제 대구김씨는 처음본다』고 박장대
소하든 감격적인 순간은 본인의 뇌리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호연,
호견 형제분은 부형공의 아들로서 호견공은 벼슬이 교수관에 이르렀는데 연산
군이 등극하자 연산군모비윤씨의 폐위사건에 보복이 올 것을 예견하고 연산원
년 을묘에 서둘러 도화촌을 떠나 서로 방향을 달리하여 형인 호연공은 종가를
찾아 함경도 길주로, 아우인 호견공은 평안도 용만(의주 용천)으로 각각 이거하
셨다. 이거 후에도 두분 다같이 계속하여 대구김씨로 본관을 삼아 오늘의 서포
파와 용만파를 형성하였다.(우리 족보의 호견공란하에 잉행별보이대구위본(浩堅
公欄下에 仍行別譜以大邱爲本) 이상에 언급한 바와 같이 부형씨와 호연, 호견
양씨간의 부자관계는 두분 이거이후 남한에는 단 한집의 토착 대구김씨가 존재
하지 않은 것으로서 충분히 입증된다.
《다음은 분관성씨순례Ⅶ 수성최씨편입니다.》
▣ 김영환 -
▣ 김태서 -
▣ 김항용 -
▣ 김발용 -
▣ 김주회 - 감사합니다.
▣ 김태영 -
제1장 우리문중의 연원.(상기 족보 pp931∼933)
---우리 대구김씨 3파(함경도 길주파, 서포파, 평안도 용만파)의 족보를 개관하
면 다같이 경순왕 후손임을 시인하고 있다. 그러나 중간계보에 있어서 각기 견
해가 구구하여 이것이 합보가 성사되지 않은 근본적 원인이 된 것 같다. 우리
용만파의 계묘, 무자 양보(兩譜)에는 경순왕 제19자 휘영을 시조로 하여 호견공
까지 34세를 열기하였는데 임신보에서는 과감히 삭제하고 입만시조 호견공부터
새로 시작하였으며 길주파는 입북시조 달공부터 시작하였고 서포파는 그나마
상계 실전으로 진무원종2등공신 대성공을 중시조로 하여 각기 경순왕 이후의
선세계보는 일응 불문에 붙이고 있는데 서포파의 지파로 보이는 경성파와 강서
종(두파 족보는 입수하지 못하였으나 길주파 족보 서문에서 별보를 한 사실을
찰지(察知)함)이 수보(修譜)시에 하나는 경순왕 후예 휘행(荇)의 제2자가 달공이
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하나는 달공은 경순왕 후예 휘백(栢)의 장자라 주장하였
다. 결론부터 말하면 강서종인의 주장이 정당하였다. 달씨의 부친은 휘백이요
백씨는 구안동김씨(신안동김씨와는 무관) 중시조 충렬공 휘방경의 제4자 휘륜
의 계남(季男) 휘영요의 제3자(季男)이다. 즉 달씨는 충렬공 휘방경의 고손이다.
경성파가 주장한 행씨는 백씨와 6촌형제간이며 그 후예는 장자 『장』은 거처
구안동김씨의 유력한 파를 형성하고 있다.(구안동김씨족보 참조) 따라서 우리
대구김씨는 구안동김씨에서 분관하였으며 구안동김씨는 경주김씨에서 분관한
것이다. 즉, 경순왕 제4자 은열공을 시조로 하는 경주김씨에서 분관한 상락군
이청을 시조로 하고 충렬공 휘방경을 중시조로 하는 구안동김씨를 거쳐 그의
고손인 병사공참의 휘달씨로부터 대구김씨로 분관한 것이다. 신라김씨 분관록
과 모든 김씨족보에 기록되어 있는 대구김씨 시조 좌랑 부형공은 달씨의 차남
이며 우리의 입만시조 호견공과 그의 형 호연공은 그의 아들이다. 이리하여 길
주파는 달공의 장손계 후예이고 호연공은 서포파의 시조이고 대성공은 중시조
이며 호견공은 용만파 시조가 되어 대구김씨 함평 3파를 형성하였다.(경성파와
강서종은 길주파와 별보를 한 것으로 보아 서포파 인 듯 하다)
---우리 대구김씨의 조거지(祖居地)가 대구 도화촌이었음은 주류 3파가 다같이
전하고 있다. 분관시조 병사공(참의공) 달씨가 함경도 길주로 유배될 때 장남
여연씨는 동반 시측케 하였고 차남 부형씨는 모친과 함께 고향에 남겨두고 이
후(爾后) 대구김씨로 행세할 것을 지시하였다고 본다. 달공 유배당시 그이(의)
백부 『송(松)』공은 개국원종공신으로 그 후손이 단천에 거주하고 있었으며(구
안동김씨족보 참조) 그의 4촌 『철(哲)』공은 이태조 함흥 행재시 ○위장으로
있었든 일들의 연유로 여연씨는 해지(該地)에 정착 대구김씨로 행세하여 오늘
의 길주파를 이루었다. 한편 부형공은 기후 등과하여 좌랑 벼슬에 올랐는데 이
때 비로소 대구김씨가 세간에 알려짐과 동시 대구김씨의 대표적 인물로 기억
전래되어 경순왕 후예의 모든 김씨족보에는『대구김씨는 좌랑(佐郞) 부형지후
(富亨之後)』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구안동김씨족보에 달공으로서 끝맺음을 하
고 그 이후는 대구김씨로 분관하였다고 구전되어온 사실은 달공이 대구김씨로
분관한 시조임을 입증하고 있다. 본인이 안동김씨대종회를 찾아 초인사를 교환
했을 때 『과연 구전이 틀림은 없구먼. . . . 말만 백씨의 장자 달씨가 대구김씨
로 분관되었다고 전해오고 있을 뿐. . . . 실제 대구김씨는 처음본다』고 박장대
소하든 감격적인 순간은 본인의 뇌리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호연,
호견 형제분은 부형공의 아들로서 호견공은 벼슬이 교수관에 이르렀는데 연산
군이 등극하자 연산군모비윤씨의 폐위사건에 보복이 올 것을 예견하고 연산원
년 을묘에 서둘러 도화촌을 떠나 서로 방향을 달리하여 형인 호연공은 종가를
찾아 함경도 길주로, 아우인 호견공은 평안도 용만(의주 용천)으로 각각 이거하
셨다. 이거 후에도 두분 다같이 계속하여 대구김씨로 본관을 삼아 오늘의 서포
파와 용만파를 형성하였다.(우리 족보의 호견공란하에 잉행별보이대구위본(浩堅
公欄下에 仍行別譜以大邱爲本) 이상에 언급한 바와 같이 부형씨와 호연, 호견
양씨간의 부자관계는 두분 이거이후 남한에는 단 한집의 토착 대구김씨가 존재
하지 않은 것으로서 충분히 입증된다.
《다음은 분관성씨순례Ⅶ 수성최씨편입니다.》
▣ 김영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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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항용 -
▣ 김발용 -
▣ 김주회 - 감사합니다.
▣ 김태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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