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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원사에 기록되어 있는 충렬공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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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7-02-13 12:18 조회1,50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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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원사(元史)에 기록되어 있는 충렬공 기록

출전 : 국사편찬위원회 홈

[기사제목] 樞密院副使金方慶

[서명] 元史.

[편명] 外夷列傳

[구분] 주석문

 

중국정사조선전.    주석번호/제목 [註138] 樞密院副使金方慶

樞密院副使는 高麗 樞密院의 正3品官이다. 樞密院은 원래 成宗 10年에 中樞院으로 창설되었는데, 獻宗 元年에 樞密院으로 고쳤으며, 忠烈王 元年에 密直司로 고쳤고, 그 뒤에도 變改가 있었다.

金方慶은 字는 本然이고, 新羅 敬順王의 후손으로 翰林學士 孝印의 아들이다. 高宗때 蔭補로 16세에 散員이 되어 式目錄事를 겸하고, 監察御史를 거쳐 西北面兵馬判官에 이르렀다. 이 때에 몽고병의 침입으로 주민들과 함께 葦島에 들어가 저수지를 만들고 방을 쌓는 등 농토를 개간, 농사를 짓게 했다. 1263年(元宗 4) 知御史臺事에 승진, 뒤에 上將軍으로 南京留守에 좌천되었으나 전에 西北面兵馬使로 있을 때에 善政을 베풀었기 때문에 西北面兵馬使가 되었다. 刑部尙書, 樞密院副使를 거쳐 1269年에 元에 사신으로 가 있을 때 林衍이 元宗을 폐하고 安慶公 淐을 세우자 元 世祖가 보낸 孟格圖의 2000 군사와 함께 林衍을 치려고 東京에 이르렀으나 王이 복위된 것을 알고 다시 北京으로 돌아갔다. 1270年에 장군 裵仲孫 등이 承化侯 溫을 왕으로 추대하고 三別抄를 이끌어 亂을 일으켜 珍島로 들어가 연안을 침범하자 이듬해 몽고의 장군 忻都·洪茶丘 등과 함께 진도를 함락시키고 守太尉中書侍郞平章事가 되었다. 賊將 金通精 등이 남은 무리들을 이끌고 耽羅에 들어가서 성곽을 쌓고 항거하자, 1273年 行營中軍兵馬元帥로서 元의 장군 忻都·洪茶丘와 함께 또 다시 三別抄를 쳐서 이를 완전히 평정하였다.

그뒤 侍仲이 되고 元에 들어가 世祖로부터 金鞍 등을 받고 돌아와서 開府儀同三司의 작위를 더 받았다. 1274年 忠烈王이 즉위하자 元에서 合浦에 征東行省을 두고 일본을 정벌할 때 中軍將으로 출정, 25,000명의 연합군과 함께 對馬島를 친 다음 본토로 향하던 도중 풍랑으로 패하고 돌아왔다. 1278年 앞서의 일본원정 중에 左軍帥 金侁이 익사할 때 이를 구하지 않았던 副使 韋得儒를 파면되게 하고, 珍島의 三別抄를 공략할 때 전투를 소홀히 하고 재산을 약탈한 郎將 盧進義의 가산을 몰수케 한 것이 원인이 되어 이들로부터 국왕과 元의 公主 및 達魯花赤을 제거하고 江都에 들어가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무고를 받았다. 이에 忻都·洪茶丘로부터 혹독한 고문을 받고 나서 청도로 귀양갔다가 忠烈王의 변호로 석방되었다.

1281年에 元이 日本征伐을 할 때 高麗軍都元帥로서 출정, 日本 壹岐島를 거쳐 博多에 이르러 승리를 거두었으나 태풍과 적의 기습을 당하여 참패하고 돌아와서 벼슬을 사양하여 推忠靖難定遠功臣에 三重大匡僉議中贊判典理司事世子師로서 致仕하고 上洛郡開國公에 봉해졌다.

≪參考文獻≫

『高麗史』卷104「金方慶列傳」

李丙燾, 『韓國史』(中世篇), 1961.

高柄翊, 「元과의 關係의 變遷」『한국사』7, 1977.

池內宏, 「世祖の日本招諭」『元寇の新硏究』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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