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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인보 서문(壬寅譜 序文) - 김규묵(金圭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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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영 작성일07-02-25 08:48 조회1,514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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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인보 서문(壬寅譜 序文)

무릇 족보(族譜)라는 것은 그 선세(先世)를 계승(繼承)하고 그 족속(族屬)을 서기(敍記)하는 것이다 우리 김씨(金氏)는 태보공(太輔公)을 시조(始祖)로 하고 충렬공(忠烈公)을 중시조(中始祖)로 해서 멀리 신라(新羅)와 고려(高麗)를 지나 조선(朝鮮)에 이르기까지 세대(世代)가 멀고 씨족(氏族)이 더욱 번성(繁盛)하여 명공석학(名公碩學)과 훈열문장(勳烈文章)이 찬란(燦爛)하고 쟁쟁하여 국사(國史)에 밝게 실려있는 것을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 그 후에 자손(子孫)들이 별과 같이 팔도(八道)에 흩어져 살고 있어 각각 자기(自己)의 조상(祖上)을 그 현조(顯祖)로 하고 각각(各各) 그 족보(族譜)를 따로해서 올바른 계통(系統)이 있을 수 없드니 이것이 선조 경진(宣祖庚辰)년과 영조 기미(英祖己未)년 정조 무술(正祖戊戌)년과 순조 을유(純祖乙酉)년에 대보(大譜)를 만든 것이 이러한 까닭이다 그러나 그 역대(歷代) 연조(年條)가 대개 사실(事實)과 틀리는 것이 많았다. 정조 갑진(正祖甲辰=一七八四)년에 대안군 지문(大安君誌文)을 그 실전(失傳)했던 묘소(墓所)에서 발견(發見)하여 이에 대안군 휘 은열(大安君 諱殷說)이 경순왕(敬順王)의 넷째 아들(第四子)임을 알게 되었고 그 밑으로 삼세(三世)가 시랑공(侍郞公) 태사공(太師公) 상락공(上洛公)으로 면면(綿綿)히 서로 이어왔음을 가히 상고(詳考)하여 의심(疑心)할 여지가 없고 또 그 년기(年紀)를 상고하고 그 세대(世代)를 계산하여본즉 태보공생년(太輔公生年) 을축년(乙丑年)으로부터 지금의 임인(壬寅)년에 이르기까지 一千八百三十八년이 되고 규묵(圭黙)은 태보공(太輔公)에서 五十八세(世)가 되니 一세(世)를 三十년으로 계산(計算)하면 대략(大略) 서로 부합(符合)되며 득현씨(得顯氏)의 무술보(戊戌譜) 변증(辨證)과 용백씨(用栢氏)의 정묘보(丁卯譜)의 발명(發明)이 각각 근거(根據)가 될 수 있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로 본다면 겨레가 비록 번성(蕃盛)해도 오히려 그 계촌(計寸)을 알수 있고 세대(世代)가 비록 멀어도 계대(繼代)를 알수 있으니 어찌 우리 김씨(金氏)의 다행(多幸)한 일이 아닌가.

옛사람이 이른바 “조심스럽게 그 아는바를 존중(尊重)하고 그 고증(考證)을 상세(詳細)히 해서 고증하기 어려운 것을 억지로 만들지 말라”고 말함이 거의 근사(近似)한 것이다.

지난 갑술(甲戌)년에 지삼군부사(知三軍府事) 선필(善弼)씨가 이 보사(譜事)를 시작하였을 때 나는 젊은 나이로 교정역(校正役)에 참열(參列)하였더니 재력(財力)이 부족하여 완성(完成)치 못하고 오랫동안 한탄(恨嘆)하여 왔었다. 기해(己亥)년 가을에 서울의 제종(諸宗)들과 더불어 시작했으나 준공(竣工)하지 못하고 드디어 철수하고 목주(木州=現 木川)로 돌아가서 모.모 제공(某.某諸公)들과 그 역사(役事)를 주간(主幹)하고 그 사본(寫本)을 보충(補充)해서 二년이 지난 후에 완공(完工)을 보게되니 무릇 三十一권(券)이 되었다. 이에 선조(先祖)의 소목(昭穆목)의 차례가 있게 되고 자손(子孫)의 항열(行列)이 귀일(歸一)하게 되니 비로소 같은 계통(系統)의 의의(意義)를 얻게 되었다.

족보(族譜)가 은성(殷盛)하게 이루어졌으니 서문(序文)이 없어서는 아니됨으로 삼가 그 사실(事實)을 위와 같이 서술(敍述)하노라.


세(歲) 임인 중추 하한(仲秋下澣)

충렬공 二十二세손 규묵(圭黙) 근서(謹序)

댓글목록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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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연일 감사합니다. 홈 <족보 소개>란에 올리겠습니다.

김윤식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윤식
작성일

  평택 아저씨, 올려주시는 귀한 자료 잘 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