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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지역의 충열공 후예들 김제정(金濟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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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회 작성일07-03-03 11:25 조회1,866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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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정 ,金濟鼎 (1578 ~ 1627)
김제정(金濟鼎)은 조선시대의 무신으로 본관은 안동이고 자는 첨중(僉中)은 태중(泰仲)이다. 효자 김익정의 현손인 김사철(金師哲)의 손자로 1578년(선조 12) 전의면 양곡리에서 태어났다.
1605년(선조 38)에 무과에 급제하여 금부(禁府) 직에 있다가, 1624년(인조 2) 진주방어사(晉州防禦使)를 역임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 때에 강홍립(姜弘立)과 김경서(金景瑞)가 싸워보지도 않고 적에게 투항하자 인산방어사(燐山防禦使)로서 의주부윤 이완(李莞)과 힘을 합쳐 적에게 대항하였다. 그러나 적의 세력에 눌려 이완이 전사하였고, 김제정 또한 적의 화살이 쉴새 없이 날아오는 적진에서 무수히 많은 적군의 목을 베었으나 마침내 힘이 다하여 전사하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듣고 조정에서는 예관(禮官)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게 하였으며, 비변사의 요청으로 병조참의에 증직하였고, 이와 함께 그의 처자에 대하여도 깊은 애도를 표하고 제사에 쓰일 토지를 하사하였다.
그 후 영조 때 ‘같은 정묘호란 때의 충신인 남이흥(南以興)과 이완이 정려를 받은 것과는 다르게 김제정 만이 누락되어 한탄스럽다’는 김제정의 7세손인 김노찬(金魯粲) 등의 상언과 우승지 조영진(趙英鎭)의 상소에 의하여 1774년(영조 50)에 치제문을 내리고, 제전(祭田)을 내려 영묘(靈廟)와 정려(旌閭)를 세우도록 명하였다. 또한 ‘충장(忠壯)’이란 시호를 내렸으니, 몸을 바쳐 나라를 위해 죽은 것을 ‘충(忠)’이라 하고, 절의를 세우고 이롭게 죽은 것을 ‘장(壯)’이라 하였다.
현재 정려는 퇴락하여 허물어지고 명정현판만이 후손인 김수회(金壽會)의 집에 보관되어 있으며, 그 후손들이 전의면 달전리에 많이 거주하고 있다.
(연기군지, 연기인물지, 연기지역의 충열공 후예들, 연기군 충효열유적, 전의향토지)

용골 산성의 전투에서 중군(中軍) 김종민(金宗敏)의 시종 역전한 상황이 장계 내용에 여러 번 나오니

우선 논상하여 권장하는 뜻을 보이소서.”

하니, 답하기를,

“당상으로 승진시키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남이흥(南以興)·김준(金浚)·장돈(張暾)·전상의(全尙毅)·김양언(金良彦) 등에게는 이미 포증(褒贈)의 명이 계셨습니다. 그러나 김준의 아들 유성(有聲)과 김준의 첩 양녀 김씨 성을 가진 여인이 동시에 함께 죽었으니 더욱 가상합니다. 정표하시어 절의를 권면하소서. 의주성(義州城) 안에 있던 장수들은 방비를 잊고 있다가 습격을 받은 것으로서 잘못이 없지 않기 때문에 즉시 포상(褒賞)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듣건대 이완(李莞) 등이 군사를 모아 거리에서 싸워 매우 많은 적을 죽였고 힘이 다하여 패했다 하니 그 중에서 뚜렷이 드러난 이완·최몽량(崔夢亮)·여영원(呂榮元)·김제정(金濟鼎)·양극(梁) 등에게는 모두 추증(追贈)하게 하소서. 능한 산성(凌漢山城)이 함락되던 날 선천 부사(宣川府使) 기협(奇恊)은 단의(段衣)도 벗지 않는 채 적을 쏘다가 살해되었습니다. 본성을 지키던 신하들은 모두 포로가 되었는데 기협만이 홀로 죽었으니 더욱 가상합니다. 포증(褒贈)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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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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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홈 전서공파란에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