눌암선조님 자료-동강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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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7-03-16 11:21 조회1,485회 댓글1건본문
東岡先生文集卷之八
箚
論金孝元擬司諫箚辛巳五月○同僚柳成龍,白惟讓,金瓚,金晬,韓孝純。
伏以頃日。銓曺以金孝元擬於副諫。而上敎以爲致朝廷不靖者。皆非也。臣等於此。固有以知聖念務欲安靖朝廷而然也。雖然。竊伏思惟。似亦有未安者。不敢無說。惟聖明察焉。夫國之設官。非爲其口實。臣之事國。惟貴於直道。茹柔吐剛者。渾世同流而鮮後災。當事匪躬者。孤立屢憎而多致患。所以明王包容孤直而奬進狷狂。非爲人臣之利。乃國家之長計也。今孝元非有懷私僨事之失。只欲當官盡職而孤立致患耳。其是非曲直之實。聖鑑所明燭。國人所共知。而猶以是爲敎。則恐非所以爲人臣之勸。而朝廷好惡。或未能合宜也。設使孝元眞有自致不靖之失。敗官負職之罪。則廢之可也。退之可也。夫孰曰不可。今無是失。但以其職分之事。任怨招患。而目之以不靖。則權度不明。人心解體。殊非盛朝擧措服人之道也。然則臣等此論。非直爲一人之進退而已也。伏願殿下廓日月之明而枉直必照恢。乾坤之量而細大不遺。使忠讜競勸。衆職修擧。則朝廷自然尊嚴。而無不靖之患矣。
東岡 金宇顒(김우옹)
1540(중종 35)∼1603(선조 3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의성. 자는 숙부(肅夫), 호는 동강(東岡) 또는 직봉포의(直峰布衣). 성주(星州)출신. 아버지는 삼척부사 희삼(希參)이다.
조식(曺植)의 문인으로 1558년(명종 13) 진사가 되고 1567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권지부정자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1573년 홍문관정자가 되고, 이어서 수찬·부수찬을 거쳐 다시 수찬이 되었으나, 이두문(吏讀文)을 가르치는 책임자로서 학생들의 성적이 오르지 못한 데 대한 문책을 받아 전적으로 좌천되었다.
1576년 부교리가 되고 이어 이조좌랑·사인 등을 지냈으며, 1579년에는 부응교가 되어 붕당의 폐를 논하였다. 그해 사가독서(賜暇讀書)하도록 되었으나 소를 올려 사양하고 이듬해 선위사(宣慰使)로 일본 사신 겐소(玄蘇)를 맞이하였는데, 사신의 접대에 여악(女樂) 금지하도록 진언하였다.
1582년 홍문관직제학, 이듬해 대사성이 되고, 대사간을 거쳐 1584년 부제학이 된 뒤 전라도관찰사·안동부사를 역임하였다.
1589년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정여립(鄭汝立)과 조식의 문하에서 함께 수학하였다는 이유로 회령에 유배되었다가, 1592년 임진왜란으로 사면되어 의주 행재소(行在所)로 가서 승문원제조로 기용되고, 이어서 병조참판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명나라 찬획(贊劃) 원황(袁黃)의 접반사(接伴使)가 되고, 이어 동지중추부사로 명나라의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을 위한 문위사(問慰使)가 되었으며, 왕의 편지를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에게 전하였다. 그해 상호군을 거쳐 동지의금부사가 되어 왕을 호종하고 서울로 환도하여, 한성부좌윤·혜민서제조 등을 역임하였다.
1594년 대사성이 되고, 이어서 대사헌·이조참판을 거쳐 1597년 다시 대사성이 되었으며, 이어서 예조참판을 역임하였다.
1599년 사직하고 인천에서 한거하다 이듬해 청주로 옮겨 그곳에서 죽었다.
유성룡(柳成龍)·김성일(金誠一) 등과 가까워 정치적으로도 이들과 입장을 같이하는 동인(東人)으로서, 서인 정철(鄭澈)·이경률(李景慄)·이징(李澂) 등이 쟁단을 일으키려 한다 하여 파직을 주장하기도 하였으나, 이이에 대하여만은 존경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청주의 봉계서원(鳳溪書院), 성주의 회연서원(檜淵書院)·청천서원(晴川書院), 회령의 향사(鄕祠)에 제향되었다.
1661년(현종 2)에 문집이 간행되었으며 1723년(경종 3)에는 이현일(李玄逸)이 지은 신도비가 세워졌다.
저서로는 《동강집 東岡集》·《속자치통감강목 續資治通鑑綱目》 등이 있으며, 편서로 《경연강의 經筵講義》가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댓글목록
김좌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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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좌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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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항용님 감사합니다. 이 자료는 처음입니다. 이번 기회에 안사연님들께서 도와 주시니 많은 자료가 나올 것 같습니다. 눌암 김찬의 후손으로서 감개무량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