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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 官職考 04 (1247년 서북면 兵馬判官, 5-6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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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7-03-16 23:59 조회1,518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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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께서는 

1230년대에서 40년대 후반까지, 이때는 몽골의 침략이 본격화된 시기였으므로(1차 1231, 2차 1232, 3차 1235-1239, 4차 1247-8 등)

서북면 병마녹사(7-8품) (?대동강 유역의 석도席道)등 평안도 일원에서의 수많은 항몽전쟁과 홍복원 일당 등 부원배 세력과의 전투에 참가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1281년 제2차 일본정벌을 앞두고, 釋 宓庵(석 복암, =원감국사 충지)이 지은 <도원수 김시중을 축수하는 소[都元帥金侍中祝壽疏]>에 ---일찍이 백여 차례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으며, --- 라는 기록은 이를 적은 것으로 짐작된다.



8) (36세)1247년 서북면 병마판관兵馬判官(5-6품)이 되었을 때, 몽고군이 또 침공해 왔으므로(4차 침공) 여러 성(城-고을)들에서 평안북도 정주 앞바다 위도(葦島)에 들어가서 관청을 유지하고 인민들을 보호하게 되었다.

이 섬에는 평탄한 땅으로서 경작할 만한 곳이 10여 리 가량 있었으나 조수물이 밀려 들어오곤 하였기 때문에 개간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김방경이 방파제(防波堤)를 쌓고 파종하게 하였는데 백성들이 처음에는 이것을 고통스럽게 여겼으나 가을에 이르러 곡식이 잘 되었으므로 그 덕택에 살아 나갈 수가 있었다. 또 섬에는 우물이나 샘이 없어서 항상 육지에 나가서 물을 길어 왔는데 때때로 물 길러 나간 사람들이 붙잡혀 갔었다. 그래서 김방경이 비가 오면 그 물을 저축하게 하여 못을 만들었으므로 그러한 근심이 드디어 없어졌다.


*이후에도 충렬공은 북계(서북면) 병마사(3품) 등 서북면 지역을 여러차례 진무하면서 서북면 백성들의 인심을 얻게 되었다. 이러한 연유로 서북면은 충렬공의 정치적 배경 또는 후원지역이 됨.



병마사 [兵馬使]

고려시대에 양계(兩界) 지방에 설치한 지방 행정기구.

989년(성종 8)에 처음으로 동·서북면에 3품직인 병마사 1명을 설치하여 국경을 다스리게 했지만 이 때는 행정관의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병마사가 군사적·민사적 기능을 가진 지방관으로 정착하는 것은 1029년(현종 20)이었다. 관직은 병마사(3품) 1명, 병마지사(兵馬知事:3품) 1명, 병마부사(兵馬副使:4품) 2명, 병마판관(兵馬判官:5~6품) 3명, 병마녹사(兵馬錄事) 4명을 두었다. 그러나 병마사·병마지사·병마부사 등은 단일 관청에 설치된 상하 관직이 아니라 각기 서로 다른 지역에 설치된 것으로 자기 지역에서 장관의 지위를 누리기는 모두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정식 병마사가 아닌 경우에도 일반적으로 병마사로 통칭되었다.


다만 병마사는 6부상서, 병마지사는 경(卿), 병마부사는 시랑(侍郞)·소경(少卿) 등이 주로 임명되었고, 병마사 가운데서도 동북면보다 서북면이 지위가 높은 경우가 많았다. 병마사는 6개월을 임기로 춘하번(春夏番)과 추동번(秋冬番)으로 구분되었고, 임명 시기는 대체로 1~2월과 7~8월이었다. 병마녹사도 임기가 6개월인데 서북 지방에서는 업무가 많아지면서 7명으로 늘렸다가 1039년(정종 5)에 정역(停役)의 폐단이 생기자 1명으로 줄이기도 하였다. 무신난 이후에는 무신들도 병마사에 임명되었고, 또한 양계의 방수장군(防戍將軍)들은 병마판관을 겸직했는데 1198년(신종 1)에는 병마부사까지 겸직하게 하였다. 병마사가 있는 곳에는 영(營)이 있고 아래에 영리(營吏)가 있었는데 주로 안북도호부(安北都護府)와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 등에 설치하였다.


그 뒤에 몽골의 침략을 받자 동북면병마사는 처음에 저도(猪道)에 두었다가 1258년(고종 45) 죽도(竹道)로 옮겼고, 서북면병마사대동강 유역의 석도(席道)에 두었다가 1269년(원종 10)에 가도(椵道)로 옮겼다. 그러나 동북면에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 서북면에 동녕부(東寧府)가 설치되어 양계가 그 지배하에 들어가면서 1270년 이후에는 완전히 소멸되었다. 다만 명주(冥州)가 쌍성총관부 밖에 있었기 때문에 동계안집사(東界安集使)를 파견하였는데, 1290년(충렬왕 16) 동녕부가 없어지면서 서북면도지휘사(西北面都指揮使)를 파견하여 불완전한 형태나마 양계가 복구되었다.



댓글목록

김봉석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봉석
작성일

  일전에도 본 게시판에 원감국사 위충지가 언급된 적이 있어 소개할 까 합니다.
1226년 출생, 속명은 원개, 본관은 장흥, 17세에 사마시 합격, 19세에 장원하여 영가서기를 지낸바 있으며,당시 몽골군의 거듭된 침략으로 산야는 초토화 되고 수십만의 백성들이 사망 혹은 포로가 되는 참상을 직접 목격하게되자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1254년 29세의 나이로 입산하게 되었다. 많은 시 작품을 통하여 백성들의 고난을 고뇌깊이 읊고 있습니다.
그의 시에,
"전쟁은 사방에서 일어나고,온 천지는 모두 전운일세.
 백성은 끓이고 달이어져,눈에 보이는 것은 슬픔일쎄.
 슬픔속에 아침저녁 지나니,어느때나 가절이 오리오."
그의 시는 이 외에도 수 십편이 "원감록"에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