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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우당 근처에 있는 마애불 이야기-경향신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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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7-03-22 11:45 조회1,810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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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한강을 걷다](32) 계신리 마애여래입상·이포
입력: 2007년 03월 16일 15:08:24
-새기다만 얼굴하나, 헛 살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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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강 물길을 오가는 사람들을 지켜주던 마애불, 마애불 앞으로 삼산천이 흐르며 멀리 보이는 강이 남한강이며 강 건너는 여주 대신면이다.

비 그친 뒤의 봄은 겨울과도 같았다. 바람은 한없이 모질었으며 감탕처럼 녹았던 땅은 다시 꽁꽁 얼어붙고 말았다. 황려, 곧 여주가 고향인 이규보는 ‘꽃샘바람(妬花風)’이라는 시에서 노래한다. 꽃필 땐 모진 바람도 많다고 말이다. 마치 비단을 가위질하듯이 섬세하게 아름다운 꽃을 피워 놓고 또 미친 것 같은 거센 바람을 몰고 와서는 꽃을 떨어뜨리는 아이러니 앞에서 그는 다시 노래한다. 바람의 직책은 만물을 고무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이미 핀 꽃만이 아름다워 바람조차 불지 않는다면 그 나머지는 어떻게 할 것이며, 꽃 피는 것도 아름답지만 꽃 지는 것 또한 자연의 이치이니 슬퍼할 일 아니라고 노래하니 그 말 틀리지 않은 것 같다.

흥천면을 지나 금사면으로 향하는 물줄기는 여강 중에서도 하류인 기류(沂流)이며 예전에는 천령(川寧)이라고도 했다. 여말 선초의 많은 시인묵객들이 앞다투어 살기를 청했으니 당연히 그들이 노래한 아름다운 풍광이 강물에 넘실거린다. 또 이곳을 통틀어 백애촌(白厓村)이라고도 했다. 다산(茶山)은 ‘택리지에 발함(跋擇里志)’이라는 글에서 남한강 물길을 따라 사람이 살기 좋은 곳으로 두 곳을 꼽았는데 그 한 곳은 충주의 목계이며 다른 곳이 백애이다. 이중환(1690~1752)은 ‘택리지’에서 백애촌을 일러 말하기를 “강가에서 가장 이름난 마을이며, 주민들은 오로지 배로 장사를 하는데 그 이익이 농사를 짓는 것보다 낫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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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애불을 바라보며 왼쪽의 새기다가 만 인면상.
이곳에 고려 말의 문사 척약재(척若齋) 김구용(1338~1384)이 살았다. 비록 귀양살이긴 했지만 그는 자신의 집을 육우당(六友堂)이라 이름 짓고 목은 이색에게 기문을 부탁했다. 그 기문에 따르면 처음에는 눈·달·바람·꽃을 벗 삼아 사우당(四友堂)이라고 했다가 후에 강과 산을 더해 육우당이라 했다고 한다. 목은 또한 기문에 이르기를 “산은 우리 어진 이들이 즐겨하는 것이라 산을 보면 나도 어질어지고, 물은 우리 지혜로운 이가 즐겨하는 것이라 강을 보면 나도 지혜로워진다”고 했으며 척약재가 사는 곳은 “산이 푸르고 물이 맑아 밝은 거울이나 비단 병풍과 같다”고 했다.

더구나 목은이 그 기문을 지을 당시는 이미 부모님을 모두 여의었을 때였으나 천령이 외가였던 척약재는 귀양을 살면서도 어머니를 모시고 있었다. 목은은 그것이 몹시도 부러웠던 모양이다. “경지(敬之, 김구용의 자)는 어버이를 모시는 여가에 강물에 배 띄우고, 산에는 나막신으로 올라, 맑은 바람 앞에 서서 떨어진 꽃잎을 헤아리도다. 눈을 밟아서 중(僧)을 찾고, 달을 대하여 손(客)을 청하니 사시로 즐거움이 역시 지극하도다”라고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 육우당은 어디에 있는지 흔적은 물론 그 자리조차 가늠하지 못한다. 그것은 ‘동몽선습(童蒙先習)’을 지은 조선 중기의 문사 모재(慕齋) 김안국(1478~1543)의 범사정(泛사亭)과 동고정(東皐亭) 또한 마찬가지이다. 모재는 유난히 이 일대를 사랑하여 ‘이호(梨湖)16경’을 읊었는데 상서로운 아지랑이와 우거진 숲, 떠도는 남기(嵐氣)와 쌓인 취미(翠微), 연꽃을 구경하고 매화를 찾고, 물놀이와 들놀이, 눈 위에 가는 나귀와 비올 제 도롱이, 밭갈이 노래와 목동의 피리소리, 안개 낀 나무와 달 아래 배, 바람 안은 돛과 고기잡이배의 불이 그것이다.

그런가하면 집 안에는 팔이당(八怡堂)도 지었다. 회암당(晦庵塘)은 주자(朱子)의 못을 일컫고, 염계련(濂溪蓮)은 주돈이의 연꽃, 강절풍(康節風)은 소강절의 바람, 장주어(莊周魚)는 장자의 물고기, 장한순(張翰蓴)은 장한의 순나물, 영운초(靈運草)는 사영운의 풀, 연명류(淵明柳)는 도연명의 버드나무를 말하며 마지막으로 태백월(太白月)은 이태백의 달을 뜻하는 것이니 풍류가 넘치고도 남았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 남은 것은 없다. 다만 그들의 문집에 지워지지 않는 시구만 남아 전할 뿐이니 씁쓸함이 강물에 배어있다. 빼어난 경치는 사라지고 정자마저 자취가 없으니 강을 따라 걷는 나그네가 발길 멈출 곳은 그 어디인가. 이제 더 이상 배가 다니지 않는 빈 나루터에는 표지석만 쓸쓸하게 서 있을 뿐 서먹하기만 했다. 겨우 한 곳, 다리 쉬며 마음 내려놓을 수 있는 곳은 계신리 부처울 마을의 석불사이다. 절이라기보다 쇠락한 암자라고 해야 마땅할 절 마당에서 강으로 나가면 그곳에 마애불이 있다. 무학대사(無學大師·1327~1405)가 한양과 신륵사를 오가는 배 안에서 긴 삿대로 단숨에 새겼다고 전해지는 마애불이다. 오후 햇살을 받은 마애불은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충주의 창동 마애불과 함께 남한강 물길을 오가는 사람들을 지켜주던 수호신이건만 우락부락하지 않고 단아하다.

이 마애불 또한 창동 마애불과 마찬가지로 바로 강과 잇대어 있는 바위에 부처님을 새겼으니 이처럼 강물이 철썩이는 곳에 새겨진 부처님은 나라 안에서 창동과 이곳 두 곳밖에 없는 것이다. 앞서 말한 대로 마을 사람들 사이에는 여말 선초의 선승인 무학대사가 새겼다는 설화가 전해져 오지만 마애불의 양식은 나말 여초의 양식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통일신라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가 하면 세 겹으로 된 광배를 둘러싸고 있는 화염문(火炎紋)은 고려 초기의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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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정작 내가 이곳을 찾은 까닭은 마애불을 미술사의 안목으로 분석하거나 민중들이 설정해 놓은 설화를 현학적으로 파헤쳐 마애불의 조성시기와 설화의 인물이 동시대가 아니라는 것을 따지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마애불 곁에 새기다가 만 얼굴이 있기 때문이다. 처음 그를 대했을 때 나는 섬뜩 놀라고 말았다. 그는 새벽이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비록 오늘은 오후에 찾았지만 이 마애불에 기대서서 이호(梨湖)로 떠오르는 태양이 자아내는 정경을 바라보는 것은 남한강이 베푸는 남모르는 비경이다. 툭하면 그것을 탐닉하러 찾아들었고 마침 그 순간에 부드러운 동살을 머금은 마애불은 더욱 찬란하게 빛나곤 했다. 그러니 마애불의 아름다움과 남한강의 수려한 풍광이 극대화된 그 순간에 그곳에 서 있을 수 있는 것은 어쩌면 황홀한 경험이기도 했다. 그러니 어찌 내가 그 모습에 취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러던 어느 날, 무심코 찾아든 오후에 나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새벽녘에 수십 번을 찾았던 곳이건만 단 한 차례도 만나지 못했던 얼굴 하나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눈과 코만 있는 얼굴을 하고 말이다. 그러나 더욱 기가 막혔던 것은 그 얼굴이 마애불의 상호와 불과 1m 남짓 떨어진 곳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보지 못했다는 것은 사물을 대할 때 늘 대롱을 통해 봤다는 것과도 같다. 그날, 자책이 심했다. 더불어 나그네란 관견(管見)도 필요하지만 조감(鳥瞰) 또한 동시에 갖춰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우친 날이기도 했다. 길을 가다가 만나는 것들, 그 무엇을 보든 늘 다른 사람들보다 세세히 살피는 눈을 자랑으로 여기며 자만에 젖어 있었던 내가 보기 좋게 한방 먹은 꼴이었다. 그날, 해가 저물 때까지 바라본 것은 바위에 못다 새긴 그 얼굴이 아니었다. 오히려 허튼 눈을 달고도 밝은 눈을 달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며 살아 온 내 모습이었다.

그날 이후, 남한강의 이호가 한 눈에 바라보이며 마애불이 있는 이 바위벼랑은 마음 흐트러질 때마다 찾는 비장처가 되었으니 적어도 나에게는 드물게 아름다운 곳이기도 하다. 오늘 또한 다르지 않다. 해가 기울어 갈수록 철새들이 무리지어 날고 마애불은 더욱 빛나건만 나는 마치 숲속에 은닉해 둔 둥지에 깃든 새 마냥 웅크리고 있을 뿐이다. 강이란 숨을 곳이 없는 곳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물속으로 들어가지 않는 한 강을 걷는다는 것은 나를 드러내기만 할 뿐 감출 곳이 마땅치 않은 것이다. 그러나 이 마애불이 있는 부처바위는 강을 걷다 지친 나그네가 스스로를 숨길 수 있는 안가(安家)와도 같은 곳이다.

그러니 해가 아직 멀쩡하여 파사성에 오를 수도 있겠건만 강변으로 내려가 새 발자국을 좇으며 게으름을 떨 뿐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은 이제 여강이 끝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의 표현이었을는지도 모른다. 이제 내일이면 파사성에 올라서 지나온 여강을 되돌아보고 앞으로 가야 할 양강(楊江)의 구비를 가늠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지누〉

댓글목록

김윤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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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흔적조차 없어졌건만 일전에 옛 천녕현을 지나면서 애틋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부님 흥미로운 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김윤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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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육우당이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지만 그럴싸한 자리를 골라 재현해 놓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