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계일기(竹溪日記) - 눌암 김찬 선조님 1
페이지 정보
김발용 작성일07-03-24 19:38 조회1,550회 댓글3건본문
조선 중기의 문신인 조응록(趙應祿)의 유고집인 죽계일기(竹溪日記)에 우리 선조님들에 관한 기록이 있어 옮겨봅니다.
이 죽계일기(竹溪日記)는 조선 중종 33년(1538년)에 출생하여 인조 원년(1632년)에 별세하신 죽계(竹溪) 조응록에 의하여 쓰여진 일기로 선조 25년(1592년) 11월 8일부터 광해군 7년(1615년) 12월 29일까지 만 23년간의 기록입니다. 이 시기의 일기로 잘 알려진 이충무공(李舜臣)의 난중일기(亂中日記)가 7년간의 기록인데 반해 죽계일기는 23년간의 기록으로 역사적인 사료 가치도 높다고 합니다.
조응록(趙應祿)
1538(중종 33)∼1623(인조 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경수(景綏), 호는 죽계(竹溪). 찰방 덕기(德期)의 아들이다.
1573년(선조 6)진사가 되고, 1579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사관(史官)을 거쳐 전적(典籍)이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함경도로 피난 가는 세자를 호종하고, 난이 끝난 뒤 통정대부(通政大夫)의 위계에 올랐다.
1599년 풍덕군수가 되고, 1613년(광해군 5)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궁(西宮)에 유폐하는 계축옥사 때 삭직 당하였으나 호성(扈聖)의 공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풍녕군(豊寧君)에 봉하여졌다.
1623년 인조반정 후 광해군 때의 공훈을 삭훈할 때 관작을 추탈당한 이후 임천(林川)의 전리로 돌아가 저서에 힘썼다. 그는 광해군 때 폐모론이 일어나고 대비의 호를 깎아서 서궁이라 칭하게 하는 간당백료(奸黨百僚)의 정청(庭請)에 참여하지 않아 강직한 사람으로 평가되었다.
저서로는 《죽계유고》가 있다.
우리 홈에 소개되었던 김생의 계암일록(溪巖日錄)이 사가(私家) 주변의 일을 기록한 반면, 조응록의 죽계일기(竹溪日記)는 왕실 주변의 일을 기록하여,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과 형식이 흡사하며, 내용 또한 많은 부분이 중복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간혹 실록에 없는 기록이 이 일기에 수록되어 있어 해당 선조님의 연보를 작성할 때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죽계일기(竹溪日記)에 수차례 등장하는 선조님은, 김정일(鼎一, 郡), 김수(晬, 書), 김치(緻, 提), 김대래(大來, 翼), 김찬(瓚, 翼) 선조님입니다.
죽계일기(竹溪日記)의 원문은 국사편찬위원회의 자료이며, 번역본은 1999년 한서대학교부설 동양고전연구소에서 발간한 국역 죽계일기에서 옮겼습니다. 워드의 어려움으로 인하여 선조님과 직접 관련이 없는 부분은 상당 부분 생략하였습니다.
요즘 솔내 대부님께서 눌암 선조님 자료를 연재 중이시니 눌암 선조님 기록부터 소개합니다.
二十四日 癸巳
金瓚拜大憲 金德謹拜龍岡 李夢瑞拜社稷參奉 權泂拜工佐 趙微拜北兵使 愼彦慶拜典籍
1595. 9. 24. 계사.
김찬을 사헌부 대사헌에, 김덕근을 용강현령에, 이몽서를 사직서(社稷署) 참봉에, 권형을 공조 좌랑에, 조경을 북방사에, 신언경을 성균관 전적에 임명하였다.
初七日 甲戌
余見金瓚○李廷馨拜大憲 邊好謙拜定州○備邊司以李德馨 金瓚薦吏判 傳曰此二人不可遷勤其他可爲之人及前吏判或可仍任更爲議啓備邊司以前吏判 洪進仍任之意入啓依 允○院啓柳永詢事不 允
1596. 1. 7. 갑술.
나는 김찬을 만났다.○ 이정형을 사헌부 대사헌에, 변호겸을 정주 목사에 임명하였다. ○ 비변사에서 이덕형과 김찬을 이조 판서로 추천하였다. 전교하시기를, “이 두 사람은 움직일 수 없으니 다른 사람 중에 담당할 만한 사람이나 전임 이조 판서 중에서 유임시킬 만 한 자를 다시 의논하여 아뢰라” 하셨다. 그래서 비변사에서 전 이조 판서 홍진을 그대로 유임시키자는 뜻을 들어와 아뢰니 윤허하셨다. ○ 사간원에서 유영순의 일을 아뢰었다. 그러나 윤허하지 않으셨다.
二十五日 壬辰
崔瓘拜掌令 具思稷拜原州 姜籤拜體察從事官 奇自獻拜兵議 崔錪拜軍器正 尹 길(日+吉)拜戶佐 金瓚拜禮判 成以敏拜刑佐 金澤龍拜兵正 李邦俊拜原都 李文荃拜碧潼 金起缺 拜抱川 李榮日拜務安 鄭虎臣拜高原 鄭期遠拜掌令 柳夢寅拜獻納 尹起禎拜順安 柳希發拜洗馬 孫胤先拜典籍○都體察使書狀晉州牧使 成大業棄官上去其代以成胤文差定事○軍資監啓請許鏛仍任而不 允
1596. 1. 25. 임진.
최관을 사헌부 장령에, 구사직을 원주 목사에, 강첨을 체찰사 종사관에, 기자헌을 병조 참의에, 최전을 군기시 정에, 윤길을 호조 좌랑에, 김찬을 예조 판서에, 성이민을 형조 좌랑에, 김택룡을 병조 좌랑에, 이방준을 원주 도사에, 이문전을 벽동 군수에, 김기빠짐을 포천 현감에, 이영일을 무안 현감에, 정호신을 고원 군수에, 정기원을 사헌부 장령에, 유몽인을 사간원 헌납에, 윤기정을 순안 현령에, 유희발을 세자익위사 세마에, 손윤선을 성균관 전적에 임명하였다. ○ 도체찰사가 서장을 올렸는데, ‘진주 목사 성대업이 관직을 버리고 올라가 버렸으니 그를 대신하여 성윤문으로 차출하여 정해달라’는 내용이었다. ○ 군자감에서 ‘허상을 유임시켜달라.’고 주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으셨다.
初九日 丙午
余受香往于文廟獻官 金瓚奇自獻 趙廷堅分獻官 丁弘祿 申熟 崔時望 執禮 李繼祿 大祝 趙應文 成以敏 典祀官 李舜民 廟司 趙曄 監察 朴耆俊齊會○鄭經世 金藎國拜吏佐 兪大禎拜弼善 黃是拜輔德 洪畯拜平山 李沚拜龍宮○院啓和順縣監 沈發托名義兵冒陳欺岡之疏至蒙五品實職請罷 答曰遞差○柳永慶拜大諫
1596. 2. 9. 병오.
내가 향을 받아 문묘에 가니 헌관 김찬 기자헌 조정견, 분헌관 정홍록 신숙 최시망, 집례 이계록, 대축 조응문 성이민, 전사관 이순민, 묘사(廟祠) 조엽, 감찰 박기준이 일제히 모였다. ○ 정경세와 김신국을 이조 좌랑에, 유대정을 세자시강원 필선(弼善)에, 황시를 세자시강원 보덕(輔德)에, 홍준을 평산 부사에, 이지를 용궁 현감에 임명하였다. ○ 사간원에서 아뢰기를, “화순 현감 심발(沈發)은 의병이라 칭탁하고 외람되이 기만하는 소를 올려서 5품의 실직(實職)을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파직시키소서.”라고 하니, 비답하시기를, “체차시키라” 하셨다. ○ 유영경을 사간원 대사간에 임명하였다.
댓글목록
김윤식님의 댓글
![]() |
김윤식 |
---|---|
작성일 |
대부님, 타이핑이 곤란할 정도로 어깨 근육이 편치 않으시다 들었는데 귀한 자료를 편히 봅니다.
죽계 선생이 1599년에 풍덕 군수를 지냈군요. 김령의 계암일록을 읽는 것과 문영공 할아버지 묘소를 찾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될 듯합니다.
감사합니다.
김좌회님의 댓글
![]() |
김좌회 |
---|---|
작성일 |
감사합니다. 발용님 처음보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김항용님의 댓글
![]() |
김항용 |
---|---|
작성일 |
눌암 선조님 자료들이 이렇게 많이 나오다니 감사합니다. 홈에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