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묘(武廟)를 설치하고 김방경등을 배향하자- 양성지
페이지 정보
솔내영환 작성일07-04-05 10:11 조회1,744회 댓글1건본문
무묘(武廟)를 설치하고 김방경등을 배향하자- 양성지
민족자존을 견지한 선비 눌재 양성지(1415~1482)
양성지는 조선초기 세종~성종대까지 활약한 학자이자 문신으로 본관은 남원, 자는 순부, 호는 눌재(訥齋)이다 또한 스스로
호를 '송파'라 하기도 했다. 1441년 진사시, 생원시에 합격, 이어 식년시에 급제하면서 관직에 오르게 된다. 벼슬은 문신으로서의
최고 영예직인 대제학(정2품으로 '문형'이라고도 함)에까지 올랐는데 우리가 양성지에 대해 주목해야 할 대목이 있다.
그것은 바로 양성지가 일관되게 조선의 자주성을 제고하고자 했고 또한 시종 이를 견지해 나갔다는 것이다 양성지가
살았던 15세기는 소위 명나라와 조선의 주종관계가 확립되어 가던 시기였다 그러한 시대상황에서의 양성지의 행보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1456년 6월 집현전이 폐지되면서 양성지는 세자좌보덕으로 옮기게 되는데 이때에 즈음하여
"명나라에서 우리나라에 국서를 보낼때 혹 왕이라 일컫기도 하고 경이라 일컫기도 하더니 문종대에 와서는
이여(爾汝:너)라고 부르니 통분스럽기 짝이 없다 명에 항의를 해야한다"
라고 역설하며 명나라의 오만함을 서슴없이 성토한 것이다.
그리고 양성지의 저서 [눌재집] '논군도십이사(論君道十二事: 임금의 길 12가지)'편에 보면 민족주체성을 강조하는
취지의 방안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의 주요한 생각을 언급해 보면
첫째 우리의 역사를 바로 알고 우리의 역사에서 배우는 슬기를 지녀야 한다.
"동방의 사람이 한갖 중국에 성(盛)한 것이 있는 줄만 알고 동국(東國)의 일을 상고할 줄 모르니 대단히 옳지 못하다
바라건대 전조(고려)태조의 구민(求民)이나 성종의 정제(定制) 현종의 수성문종(守成文宗)의 양민을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
둘째 우리의 주체적인 풍속을 보존해야 한다
"우리 동방은 대대로 요수의 동쪽에 살아 만리지국(萬里之國)이라 불리어졌다. 3면은 바다로 막혀져 있고 1면은 산을 짊어지고
있어 구역이 저절로 나뉘어지며 풍기도 또한 다르다 단군이래 관청을 베풀고 고을도 두어 주체적인 교화의 덕을 폈다
전조(고려)의 태조는 신서(信書)를 만들어 나라사람을 가르쳤고 의관과 언어는 모두 본래 지닌 풍속을 따랐다 만약에
의관 언어가 중국과 다르지 않다면 민심이 안정되지 못할 것이다"
셋째 문묘에 우리의 선현을 많이 배향해야 한다
"대개 우리나라에 기자(箕子)가 봉함을 받은 후로 홍범 유교가 오래도록 퇴색되지 않았다 당에서는 '군자지국'이라 했고
송에서는 '예의지방'이라 일컬었다 문헌의 아름다움이 중화를 짝할 만한데도 문묘에 배식(配食)하는 자가 설총, 최치원,
고려의 안향 세 사람 뿐이다" (여기서 양성지는 최충, 이제현, 정몽주, 권근 등을 배향해야 한다고 주장함)
넷째 국가의 체통을 세울 것
중국과 마찬가지로 제천행사를 주관할 것과 임금의 탄생일을 황제의 예로 "절(節, 즉 국경일)"로 할 것
그리고 상신(相臣)을 우대하고 왕실에 존호를 올릴 것을 주장한다.
그는 우리나라가 단군이라는 독자적인 민족시조를 가지고 있고, 단군이래 역사적으로 정치적 자치를 유지해왔으며,
문화적으로도 기자(箕子) 이후 중국과 대등한 수준으로 발전되어 군자의 나라라는 명칭을 들었으며, 언어,의관,풍속
등도 중국과 다르다고 했다.
따라서 우리나라는 중국의 제후국(諸侯國)이기는 하지만 천자의 직접통치를 받는 기내(畿內)의 제후가 아니라 정치적 자유와
독자적인 역사와 문화를 가진 민족국가로서의 제후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중국에 대한 사대는 힘의 강약에서 오는 불가피한
현상이지만 그 방법과 자세는 엄격한 한계가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즉 사대는 국가의 자주성과 독립성을 지키고, 국리민복에
지장을 주지 않는 한도 내에서 실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사대외교는
첫째, 사신 파견의 횟수를 종전의 1/3로 줄여서 국가의 경비를 절감하고 중국으로부터 천시받지 않도록할 것,
둘째, 명사(明使)에 대한 지나친 우대를 반성하고 진상품의 액수를 줄이며 금,은,주옥 등 희귀품의 진 헌을 거부할 것,
셋째, 국왕의 생신일을 천자와 마찬가지로 절일(節日)로 승격하며 역대의 선조에 존호를 가상하고, 천자 가 행하는
제천례(祭天禮)를 행할 것을 주장했다.
나아가 중국과 마찬가지로 번부악(藩部樂)을 설치하여 우리의 번방(藩邦)에 해당하는 일본과 여진의 음악을 채용할 것을
주장했다. 《고려사》 편찬에서도 고려시대의 독자적인 연호나 묘호(廟號)를 참칭(讒稱)이라 해 바꿀 필요가 없으며
국가도서(國家圖書)에 독자적인 연호를 제정하여 기재할 것 등을 주장했다.
자칫 문약(文弱)에 빠질것을 경계하고자 문무여일(文武如一) 정책을 주장했다
문과 무를 똑같이 존중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양성지는 문묘와 마찬가지로 무묘를 세워 신라의 김유신,
고구려의 을지문덕, 고려의 유검필, 강한찬, 양규, 윤관, 조충, 김취려, 김경손, 박서, 김방경, 안우, 김득배, 이방실, 최영, 정지,
조선의 하경복, 최윤덕 등을 배향하자는 안을 내놓기도 한다. "문선왕 공자는 향사하면서 무성왕 강태공은 왜 제사하지 않는가.
무성묘도 문묘처럼 설치하고 신라,고구려,고려,본조의 맹장들을 배향으로 하여 향사하라"고 주장한 것이다.
양성지는 26세에 벼슬을 시작해 68세로 생애를 마칠 때까지 세종에서 성종에 이르는 6명의 국왕을 보필해 40여 년 간 관직에
있었고, 이때에 올린 상주문은 330여 조에 이르고 있다. 이 상주문에서 그는 경학,사학,문학,병학,지리,의학,음악,농법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폭넓은 관심과 깊이를 보여주고 있다.
그 중 사학(史學)은 그가 가장 큰 관심을 기울인 분야였다. 단군 이래의 민족사 정립과 교육을 강조해 문과시험에 중국사와
더불어 《삼국사기》,《고려사》 등을 부과할 것과, 국왕의 경연(經筵)에서 국사를 강의할 것을 여러 번 진언했다.
그는 요즈음 표현으로 하면 대륙사학자였다. 요수(遼水)의 동쪽이 우리 강역의 일부임을 주장하고 이를 수복해야
한다는 입장까지 지니고 있었다. 역사를 우리의 눈으로 보니까 역사가 새로 보인 것이었다. 세조가 즉위 다음 해인
1456년 7월에 조선단군(朝鮮檀君)의 신주(神主)를 조선시조단군(朝鮮始祖檀君)의 신위(神位)로 고쳐 정하고,
후조선시조(後朝鮮始祖) 기자(箕子)를 후조선시조 기자의 신위로 고쳐 정하고, 고구려시조를 고구려시조 동명왕의
신위로 고쳐서 정하게 한 것도 양성지의 건의에 따른 것이었다.
세종조부터 성종조까지 6조에 걸쳐 역임하는 동안에 문교(文敎)에 끼친 공로는 제외하고라도, 정치 의견과 언론
어느 것이나 다 당시를 일깨우고 후세의 거울이 되지 않음이 없었다. 그리하여 세조는 그를 '해동의 제갈량(諸葛亮)'
이라고까지 하였다. 때로는 '왕좌지재(王佐之才)'가 있다고까지 했다. 항상 역사의 현실에 착안해 나라를 위하는 긴요한
도리를 꿋꿋이 주장했고, 당시에 사리를 가장 똑바로 이해한 경륜가였다. 중국 고대의 요순(堯舜)만을 유일한 이상적
군주로 떠받드는 시절에 단군을 국조로 모셔 받들기를 주장했으며, 중국의 역사만을 일반 교과서로 사용하던 시절에
우리의 동국사(東國史)도 배울 것을 역설하기도 하였다. 감히 생각하기 어려운 경지가 아닐 수 없다.
온 세상이 중국의 풍속에 휩쓸리는 때에 나라의 고유한 풍속을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뿐 아니라 문신이면서도
군비에 대한 관심 또한 컸다. 우리나라에는 문묘는 있으나 무묘(武廟)가 없으니 마땅히 무묘를 세워 역대의 명장을 모시자고
주장하였다. 고구려 유속을 본받아 봄에는 3월 3일, 가을에는 9월 9일에 교외에서 사격 대회를 열어 사기를 드높이고
무풍(武風)을 장려하자고 했으니, 확실히 당시 사회로 보아 일대 경종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양성지의 갖가지 건의는, 당시 강력한 힘을 지녔던 세조로서도 들어주기가 쉽지 않은 대목이 있었다. 당시로서는
너무나 대담한 것이었을 것이다. 지금 보면 다 옳은 탁견이지만 당시로서는 결코 쉽게 채택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양성지의 문무 동등의 대우 문제만 해도 그렇다. 그의 건의는 결국 실현을 이루지 못하고 점점 '숭문천무(崇文賤武,
문을 숭상하고 무를 천시한다)'의 풍습을 이루어 조정과 온 국민이 문약에 빠지는 결과를 빚었으며 마침내 준비 없는
나라로 만들어 뒷날 왜구의 침략을 앉아서 당하게 하였음은 역사가 가르쳐주고 있다.
내용출처 : [직접 서술] 한국 인물 유학사 제1권(한길사 발간) - 눌재 양성지 편 참조
동산 (sun on the tree) 의 불러그 [동산글방]에서 발췌 옮김
댓글목록
김항용님의 댓글
![]() |
김항용 |
---|---|
작성일 |
양성지공의 주체적인 역사 해석과 외교관, 탁월한 지혜와 국가 정책 제안, 무의 천시 금지와 발전책 제시,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손녀 사위이신 당시 통정대부 이조참의 김희수선조님께서 신도비의 글을 쓰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