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가보는 원주 산행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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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7-04-06 21:48 조회2,042회 댓글0건본문
1) 충주에서 남한강 줄기를 건너 원주로 들어서니 귀래면이다. 930년대 경순왕이 잠시 머물렀던 귀래면을 지나다. 원조 경순왕의 한때 적거지를 1천년 지난 어느 후손 하나가 지나는 중이다. 박경리의 토지문화관에도 잠시 들려서 문학에 취해 보고...
귀래면의 북쪽에 귀래리가 위치한다. 귀한 분이 오셨다는 뜻에서 귀래라고 하였다 한다. 신라말 경순왕이 이곳에 와 머물렀다는 데서 유래하였는데 미륵산 마애불상과 관련이 있다. 이 마을의 이름을 따서 면이름도 귀래면이 되었다.
귀래면사무소를 지나면서 왼편으로는 경순왕 영정이 있(었)다는 ‘황산사지’가 있고, 앞에는 ‘3층석탑’이, 주봉(676m) 못미쳐에는 ‘마애여래좌상’이 이어지고 있다.
2) 원주시내를 가로질러 치악산 아래에 이르면 원천석 묘역과 석경사가 있다. 1388-1390년 전후의 운곡 원천석(1330-?)과 안렴사공(휘 사렴, 1335-1405) 발자취를 떠올려 본다.
□ 원천석 (1330-?)
고려말 조선초의 은사(隱士)로, 본관은 원주(原州), 자(字)는 자정(子正), 호(號)는 운곡(耘谷)이다. 정용별장(精勇別將) 원열(元悅)의 손자이고, 종부시령(宗簿寺令) 원윤적(元允迪)의 아들로, 원주(原州) 원씨(元氏)의 중시조(中始祖)이다. 어려서부터 재명(才名)이 있었으며, 문장이 여유 있고 학문이 해박하여 국자감(國子監) 진사(進士)가 되었으나, 고려말의 정치가 문란함을 보고 치악산(雉岳山)에 들어가 농사를 지으며 부모를 봉양하였다. 일찍이 이방원(李芳遠)을 가르친 일이 있어 그가 태종(太宗)으로 즉위하여 기용하려고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으며, 태종이 직접 집으로 찾아갔으나 미리 소문을 듣고 피하여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목은(牧隱) 이색(李穡)·야은(冶隱) 길재(吉再)와 같이 높은 지조와 절개를 보였다. 고려말에 정몽주·이색 등 많은 유학자의 스승인 신현(申賢)의 사적이 소각 당하는 화(禍)를 당하자 정몽주는 신현의 사적을 수거하여 치악산에 은거하는 원천석에게 보냈고, 이에 후세에게 전할 중요한 임무를 갖고 화해사전(華海師傳)을 저술하였다. 문학적으로 깊은 소양을 가졌던 원천석은 그가 남긴 운곡시사(耘谷詩史) 속에서 당시의 사회상과 함께 그의 사상과 철학을 엿볼 수 있다. 고려 몰락의 원인이기도 했던 대토지겸병에 의한 사회경제적 혼란에 대해, "무너진 집에 새들만 지저귀니 백성은 도망가고 아전도 보이지 않네. 해마다 민폐만 더했거늘 어느 날 어느 때 즐겁게 지냈으랴. 토지란 토지 권문가에 빼앗겼는데도 포악한 무리들은 문 앞에 연이었네. 묻노니 이 고생 누구의 허물인고 남아있는 주민들 더욱 가엾어라."라고 적고 있는데, 여기에서 대토지겸병으로 인해 생활의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있는 백성들의 모습을 탄식하고 그러한 사태를 매우 심각하게 인식하는 모습에서 그의 대토지겸병의 반대입장을 볼 수 있다. 특히, "흥망(興亡)이 유수(有數)니 만월대(滿月臺)도 추초(秋草)ㅣ로다. 오백년(五百年) 왕업(王業)이 목적(牧笛)에 부쳐시니 석양(夕陽)에 지나 객(客)이 눈물 계워라."라는 회고가(懷古歌)는 널리 알려져 있다. 미수(眉 ) 허목(許穆)은 선생의 묘갈(墓碣)에서, "군자는 숨어살아도 세상을 저버리지 않는다고 하더니 선생은 비록 세상을 피하여 스스로 숨었지만 세상을 잊은 분이 아니었다. 변함없이 도를 지켜 그 몸을 깨끗이 하였다."라고 표현하였다. 이러한 원천석의 정신은 원주의 사상적 흐름에 많은 영향을 끼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 지역의 저변에 흐르고 있다. 유적으로는 석경사(石逕寺)·변암(弁岩)·태종대(太宗臺) 등이 있고, 묘소는 원주시 행구동 석경촌에 있다. 원주 칠봉서원(七峰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 안렴사공(휘 사렴, 1335-1405)
○ (1388년 전후)
그리고 공은 조선조에 불복하고 오직 고려만을 사모하며 그 강개한 충성으로 의리를 같이하는 동지들과 함께 耘谷 元天錫의 집에 모여 壇祀(단사)에 종참하였다. 당시 운곡은 고려말에 군벌이 설치고 국기가 흔들리면서 정치가 어지러워지자 벼슬할 뜻을 버리고 원주 치악산 밑에 숨어 들어가 시국을 개탄하면서 후학을 가르치며 살아가던 터였다.
그런데 혁명 역도들이 우왕, 창왕을 시해하고 훈구 대신들을 몰아내는 것을 보자 비분강개한 충성으로 비록 나라는 망해도 고려의 종사만은 끊어지게 할 수 없다고 하여 치악산 정상에다 계단을 설치하고 단군, 기자, 고려 태조 등의 열성과 변혁을 당한 왕들을 비롯하여 살신성인한 충신들을 종묘제례와 똑같이 제사를 올렸다. 이 단사를 變祀(변사) 또는 革祀(혁사)라고도 불렀는데, 이에 종참한 분들은 공(김사렴)을 비롯하여 이양중, 최청몽, 서?, 탁신, 조승숙, 이집, 최원도, 조유, 김로, 음양동, 하자종, 성여완, 이?, 이원, 겅계성, 우성유, 방직범, 최양, 부종의, 설지유, 김약시 등인데 이에 참사한 분들은 모두 80인 이었다고 한다. <화해사전, 화동인물총기>
○ (1390년 전후)
운곡 원천석 선생이 오은 김사렴을 찾아가니 그 아우 석루 사안이 시석하고 있었다. 그때 도은 이숭인, 목은 이색, 순은 신덕린이 와서 최후의 결별로 만나서 그리든 회포와 처세할 것을 한담하면서, 운곡 원천석에게 역동 우탁 가문과 불훤재 신현 가문이 화당한 사실을 기록하여 주기를 부탁하였다. <1860 화해사전>
화해사전(華海師全)
고려 말의 학자 신현(申賢:1298~1377)의 학문과 언행을 모아 엮은 책. 4권 2책. 신활자본. ‘화해사(華海師)’란 곧 중국의 원나라와 명나라, 그리고 동해 즉 고려의 스승이라는 뜻이니, ‘화해사전’이란 화해사 신현과 관계된 모든 기록이라는 의미이다.
저자의 문인 정몽주(鄭夢周)가 원천석(元天錫)에게 전해 원천석과 범세동(范世東)이 편집해 간행하려 했으나, 고려 말 어지러운 상황 속에 간행을 보지 못하였다. 조선의 건국과 함께 그 후손 또한 몰락해 원(元)·범(范)·공(孔) 삼가(三家)에 비장되어 세상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 1931년 강영직(姜永直)이 군산에서 발견해 원본의 오자 낙서를 바로잡아 편집, 교정해 비로소 간행을 보게 되었다. 처음에는 8권의 규모였으나 중간에 유실되어 4권으로 엮었다. 권두에 강영직의 서문과 동방도통도(東方道統圖)·세계도가 실려 있다.
권1은 비모(備耗)·잠가범(箴家範)·간재홀서(簡齋笏書), 권2는 본조주대(本朝奏對)·원주문답(元主問答)·명조빙문(明朝聘問)·제자문답(諸子問答), 권3은 출처대략(出處大略)·발미(跋尾)·사전계사(師全繼辭)·제자찬사(諸子贊辭)·제자서술(諸子敍述)·동방사문연원록(東方斯文淵源錄), 권4는 부록으로 후학찬사·후학찬술(後學撰述)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두의 〈동방도통도〉에서는 우리 나라 유학의 도통을 단군에서 기자(箕子)로 이어져, 설총(薛聰)·최충(崔食)·김양감(金良鑑)·안향(安珦)·우탁(禹倬)의 차례로 전해져, 우탁이 다시 신현에게 전하고, 신현이 정몽주와 이색(李穡), 그리고 아들 용희(用羲)에게 전한 것이라고 하였다.
정몽주나 이색 등의 문로나 학문의 계통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것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는데, 이 책의 발견으로 신현이 안향과 우탁의 도통을 이들에게 전했다고 밝혀진 것이다.
〈비모〉는 모두 39단락으로 되어 있는데, 주로 송유(宋儒)의 성경설(誠敬說)과 이기심성설(理氣心性說)에 대한 신현의 견해를 엮어 편집한 것이다.
〈잠가범〉은 신현의 아우인 즙(蓀)과 아들 용희 등이 성리학의 여러 문제에 대한 선인의 말을 엮어 편집, 교정하고 여기에 자신의 견해를 더해 신현에게 질정한 내용이다. 역시 그의 성리학에 대한 생각이 나타나 있다.
〈간재홀서〉는 1381년(우왕 7) 용희가 명나라 태조와 신현이 학문 및 도학·의리명분 등의 내용을 문답한 것을 적은 글이다. 〈본조주대〉는 문인들의 기록으로, 충숙왕과 충혜왕 등 임금과의 주대(奏對)를 모아 저자의 학문과 행적의 소재를 밝혔다.
〈원주문답〉과 〈명조빙문〉은 각각 원나라 인종 및 명나라 태조와의 문답 내용인데, 인종과 태조가 모두 저자에게 스승의 예를 갖추고 있어 당시 그의 문망이 어떠했는가를 알 수 있다.
〈제자문답〉은 제자 문인들과 학문의 문제를 두고 문답한 내용이고, 〈출처대략〉은 문인들이 선생의 출처 행적 가운데 앞선 글에서 누락된 것을 습유해 보충한 내용이다. 〈발미〉는 원천석이 이 책을 인간(印刊)한 경위를 적은 것이다.
〈사전계사〉 역시 원천석이 선생의 생애에 관한 사실 중 누락된 것을 모아 정리한 것이며, 〈제자찬사〉는 명나라의 대학자 송렴(宋濂)을 비롯한 고려 말 조선 초 여러 인사들의 신현에 대한 찬사를 모은 것이고, 〈제자서술〉은 정몽주와 원천석 등 문인 및 후학들이 스승의 학행에 대해 추술한 글을 한데 모은 것이다.
〈동방사문연원록〉은 본래 범세동의 〈화동인물총기 璜人物叢記〉에 실렸던 것으로, 앞서 연원도에서의 도통의 연원을 인물별로 구분, 설총에서 정몽주에 이르기까지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후학찬사〉에는 간행에 앞서 정국필(鄭國弼) 외 112인의 찬사를 모아 수록하였고, 〈후학찬술〉은 강영직 등이 이 책의 간행에 앞서 전국 여러 서원과 유림들의 의견을 수렴, 이 책의 가치를 밝힌 내용이다.
권말의 〈화해사전제자안 華海師全諸子案〉에는 이 책에 수록된 229인의 이름을 적어 놓아, 고려 말 유학의 계통과 당대 성리학에 대한 이해의 깊이와 수준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지닌다.
다만 이토록 비중있는 문헌이 조선왕조 500년 동안 전혀 알려지지 않다가, 근대에 와서야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점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신현에 대해서도 아무리 격변기의 와중이었다 해도 ≪고려사≫나 그 밖의 관련 저술에서 거의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는 사실은 본 저작의 진위 여부에 많은 의심을 품게 한다. 이렇게 보면, 이 책은 후인의 두찬(杜撰)이거나 위서(僞書)일 가능성이 다분히 많다.
만약 그렇다면 매우 정교하고 세심한 배려에 의해 이루어진 이 책의 편제를 두고 볼 때, ‘통(統)’에 대한 관념이 강조되기 시작하는 조선 후기의 위작(僞作)일 가능성이 높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더 깊은 천착과 검증이 요구되나,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본서의 내용과 의식의 문제는 그 자체로 또 다른 탐구의 과제를 제시하고 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국립중앙도서관과 규장각도서에 있다.
華海師全 卷之1~7. 7책.
申 相 沙川溫井泳洙亭 소화9년 朝鮮初에 范世東과 元天錫이 共編한 華海師全는 신돈에 의해 압수 소각된 바 있고 그래서 다시 재편집 복간하였으나 그 뒤 정도전에 의하여 또 다시 불태워지는등 사연이 특히 많은 책으로 그 사이 筆寫本이 많이 돌았으며, 刊本과 차이가 많이 나는 것이 많았다. 1860년(철종11)발행본의 後識에 의하면 원래 ‘華海師全’은 耘谷 元天錫의 집안에 보관되어 오다, 申氏 가문에 전해졌는데 1840년(헌종6) 京中의 宗丈이 이 사실을 알고 보고자 했으며, 다른 畿湖의 士林들이 책을 등사해 가기도 했다 한다. 한편 1857년(철종8)에는 公州의 士林들이 자신들의 필사본과 原本을 대조해 보았는데,필사본에 착간이 많았다. 이로 인해 宗人 諸氏들이 新刊을 의논하여 3년이 지난 1860년(철종11)申泰崇등을 중심으로 湖西 庇仁縣 栗里祠에 刊所를 설치하고 간본을 만들기도 했는데, 본 출품물은 소화9년에 발행한 것으로 연활자본이며 李明稙의 序文과 申世休,申相敬, 申桓의 跋文이 있다.
3) 원주시내 한복판, 원주역 앞 원주시청 옆에는 강원감영 고적지가 남아 있다. 1484년 목사공(휘 적, 1428-1499) 세운 강원감영 건물 선화당(宣化當)을 둘러 보다
□ 목사공 김적(牧使公 金石責) (1428년 세종 10년∼1499년 연산 5년)
공은 동추공 김종숙의 3남, 벼슬은 음사로 출사하여 경기도 여주 목사를 역임하였고 보조공신에 책훈되고 후일에 장자인 문경공 만보당 김수동의 훈로로 보국 승록대부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고 영가부원군에 봉해졌다.
*목사공 김적 지묘(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팔야리 금산)
▲선화당(宣化當) [건물]
[위치] 원주시청 별관에 있는 고적이다.
[유래] 일산동 1번지에 있는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 집무하던 정청(正廳)이다. 조선 태조 4년(1395)에 강원감영(江原監營)을 원주에 설치하고 고려 충숙왕(忠肅王) 때 지은 객사(客舍)를 그대로 쓰다가 제 9대 성종(成宗)11년(1480)에 감사 권륜(權綸)과 목사(牧師) 이지(李 )가 신축에 착수하여 4년 후에 목사 김적(金?)이 준공하였는데 임진왜란에 전소되고 제 18대 현종(賢宗)때 감사 이후산(李後山)이 재건하였다. 제 26대 고종(高宗) 32년(1895)에 강원 감영이 폐지되고 춘천에 관찰부(觀察府)를 둠에 따라 원주 진위대(原州鎭衛隊)가 사용하였다. 원성군 군청사로 사용되어 오다가 시군 통합에 따라 현재는 원주시청 별관이 되었다.
[내용] 규모는 정면 7간, 측면 4간이다. 기단의 높이는 평균 435mm로 화강석으로 만들었다. 평면의 구성은 내진주(內陳柱)의 왼쪽에서 정면 3간, 측면 2간은 문짝이 없는 우물마루를 깔았고 그 오른쪽에는 정면 2간, 측면 2간인 방을 두었다. 내부 중간에는 다시 미서기문을 달아서 2개의 방으로도 쓸 수 있게 하였다. 특히 마루방은 4면에 모두 띠살문을 달았다. 지붕은 겹처마에 팔작지붕을 한 단층집으로 중후한 느낌이 드는 건축물이다. 앞에 강원감영문루(江原監營門樓)와 오층석탑(五層石塔), 좌불상(左佛像) 등이 있다.
4) 다시 치악산 아래에 이르러 왼편으로 치악산을 끼고 돌면 금대 매표소에 이른다. 1592년 임진왜란, 목사공(휘 제갑, 1525-1592) 충렬의 현장, 영원산성이다.
□ 김제갑(1525-1592)
조선 중기의 문신(文臣)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字)는 순초(順初), 호(號)는 의재(毅齋)이다. 고려의 명장(名將) 김방경(金方慶)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진사(進士) 김석(金錫)이고, 이황(李滉)의 문인(門人)이다. 1553년(명종 8)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홍문관(弘文館) 정자(正字), 병조좌랑(兵曹佐郞)·정언(正言)을 거쳐 1581년(선조 14) 충청도관찰사를 역임하였고, 1583년 우승지(右承旨)로 있으면서 이이(李珥)와 박순(朴淳)을 탄핵하다가 벼슬에서 물러났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원주목사(原州牧使)로 있다가 왜장(倭將) 삼길성(森吉成)이 거느린 왜군이 관동지방을 휩쓴 뒤에 원주를 침공하여 오자 가족과 고을 백성을 이끌고 영원산성( 原山城)으로 들어가 방어에 임했으나, 왜군의 공격으로 결국 성이 함락되어 부인 이씨(李氏)와 아들 김시백(金時伯)과 함께 순절하였다. 조정에서 그의 충절을 기려 1592년에 이조판서(吏曹判書) 겸(兼) 경연(經筵) 홍문관(弘文館) 대제학(大提學) 예문관(藝文館) 대제학(大提學) 의금부도사(義禁莩事) 성균관(成均館) 춘추관사(春秋館事)에 추증(追贈)하였다. 원주의 충렬사(忠烈祠)와 괴산의 화암서원(華巖書院)에 제향되었다. 1711년(숙종 37)에 '문숙(文肅)'이라는 시호(諡號)가 내려졌다. 1966년 강원도 애국유족부활위원회에서는 원주역전에 그를 추모하는 충렬탑(忠烈塔)을 세웠고, 이곳에는 1670년에 세워진 충렬비(忠烈碑)가 남아있다. 김제갑 목사의 충렬비에 기록된 명문(銘文)에는, "죽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죽어야 할 곳에서 죽는 것이 어려운 것이니, 오직 군자라야만 생명을 버리고 의리를 취하는 것이다. 위급함을 당하여도 평소와 같이 보고 충성심과 분개심을 가다듬어 끝과 시작이 다르지 않았도다. 신하는 충성으로 죽고, 부인은 죽어 정절을 지켰으며, 아들은 죽어 효도를 다하였으니 여기 만고(萬古)에 삼강(三綱)과 오륜(五倫)을 남겼도다. 치악산(雉岳山)이 동쪽에 우뚝 솟고 봉천(鳳川)은 서쪽으로 흐르니 선생의 이름과 함께 길이 갈 것이다."라고 하였다.
5) 다시 시내로 나와 원주역 앞에 이르면, 1670년 세운 김제갑 충렬비(忠烈碑)와 1966년 강원도 애국유족부활위원회에서 세운 김제갑 충렬탑(忠烈塔)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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