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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安東)의 연혁(沿革)과 읍호(邑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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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영 작성일07-04-19 15:29 조회1,506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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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동(安東)의 연혁(沿革)과 읍호(邑號)

안동은 원래 신라의 고타야군(古陁耶郡)이었는데 경덕왕(景德王=742~764)이 고창군(古昌郡)으로 고쳤고 신라 경순왕(敬順王=929) 3년에 후백제(後百濟)의 견훤(甄萱)이 고창군을 공격함에 군인(郡人) 김선평(金宣平)과 김행(金幸=후에 權幸)과 장길(張吉)이 고려태조를 도운 공(功)이 있다고하여 군(郡)을 부(府)로 올리고 안동(安東)이라 하였다가 뒤에 다시 영가(永嘉)로 고쳤다. 고려 성종(成宗=982~997)은 길주(吉州)라고 하고 자사(刺史)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였고 현종(顯宗=1018) 9년에는 지길주사(知吉州事)로 고쳤고 후에 다시 안동부(安東府)라 하였으며 명종(明宗=1193) 23년에 남적(南賊)인 김삼(金三=혹은 金沙彌)과 효심(孝心)등이 각주군(各州郡)을 약탈(掠奪)함으로 토평사(討平使)를 보내서 평정(平定)할 때 한 부(府)로서의 공(功)이 있었다고 해서 도호부(都護府)로 승격(昇格)시켰고 또 신종(神宗=1202) 5년에 동경(東京=慶州)야별초(夜別抄)의 패좌(孛佐)등이 여러 역도(逆徒)들을 모아서 반란(叛亂)을 일으키자 부민(府民)들의 방어(防禦)한 공로(功勞)에 의해서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승격시켰다. 충렬왕(忠烈王=1275~1313)때에는 복주목(福州牧)으로 고쳤다가 공민왕(恭愍王)이 홍건적(紅巾賊))을 피해서 남순(南巡)할 때 주민이 충성(忠誠)을 다했다는 뜻에서 공민왕6년(1362) 4월에 다시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로 승격되었는데 조선(朝鮮)에 와서도 그대로 시행하다가 세조(世祖=1495) 5년에 진(鎭)을 설치하고 부사(府使)로서 병마절도부사(兵馬節度副使)를 겸(兼)하게 하였고 얼마후에 부사(副使)는 폐지하였다. 선조(宣祖=1581) 14년에 부(府)로 승격하였고 영조(英祖=1776) 52년에는 현(縣)으로 강등(降等)하였다가 정조(正祖=1785) 9년에 다시 부(府)로 승격 고종(高宗=1895) 32년에 군(郡)이 되었고 1963년 1월 1일 부로 안동읍(安東邑)이 시(市)로 승격되었으며 안동댐이 준공되자 수몰중심지인 월곡면과 도산면을 폐합시키므로서 안동군(安東郡)은 풍산읍(豊山邑)을 위시해서 풍천(豊川) 서후(西後) 북후(北後) 녹전(祿田) 와룡(臥龍) 예안(禮安) 임하(臨河) 임동(臨東) 길안(吉安) 남선(南先) 남후(南後) 일직(一直)의 1읍 12개면이 되었다.


안동대도호부속현(安東大都護府屬縣)

임강현(臨江縣): 지금의 임하면을 중심으로한 일원

풍산현(豊山縣): 풍산면을 중심으로한 일원

일직현(一直縣): 일직면을 중심으로한 일원

감천현(甘泉縣): 예천군 감천면을 중심으로한 일원

길안현(吉安縣): 길안면을 중심으로한 일원

내성현(奈城縣): 봉화군 내성면(乃城面)을 중심으로한 일원

춘양현(春陽縣): 봉화군 춘양면을 중심으로한 일원

재산현(才山縣): 봉화군 재산면을 중심으로한 일원

개단부곡(皆丹部曲): 영주군 단산면(丹山面)을 중심으로한 일원

소천부곡(小川部曲): 봉화군 소천면을 중심으로한 일원


읍호(邑號)

고타야(古陁耶). 고창(古昌). 영가(永嘉). 길주(吉州). 복주(福州). 능라(綾羅). 지평(地平). 일계(一界). 석능(石陵). 고장(古藏). 창영(昌寧=신라이전의 국명). 화산(花山=雰과 府西에 각각 있음). 상락(上洛=상락이라는 읍호는 없으나 지금의 풍산이 옛날의 상락이고 또 상락나루(上洛津)가 풍산에 있으니 대개 낙동강의 상류인 까닭에 상락(上洛)이라 하고 선대봉호(先代封號)도 또한 상락이라 했다.

<기미대동보 수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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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사합니다. 본 홈 자료실에 옮겨 활용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