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공(휘 칠양) 할아버지 묘소 앞 석물은 조선 초기 양식의 장명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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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작성일07-04-29 02:05 조회2,236회 댓글5건본문
군사공(휘 칠양) 할아버지 묘소 앞 석물은 조선 초기 양식의 장명등
소박한 선초의 장명등
강진 선영의 군사공(휘 칠양) 할아버지 묘소 앞에 있는 U자형 석물은 오랫동안 어떤 용도의 석물인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 석물이 처음 만들어질 당시에는 우리 문중에서 잘 알고 있었으나 어느 때부턴가 전해지지 않게 된 모양입니다. 이 때문에 강진 시제를 모시러 갈 때면 이 석물이 무엇인지 늘 궁금했었습니다.
▲군사공(휘 칠양) 할아버지 묘소 앞 석물
최근에 솔내 대부님께서 경기도박물관에서 펴낸 <경기 묘제 석조 미술(상)> 한 질을 주셨습니다. 어제 이 책에 실린 공양왕릉 사진을 보다가 무릎을 치는 사진이 눈에 띄었습니다. 부랴부랴 하남 대부님께 연락해서 강진 선영에 있는 석물 사진을 받고 공양왕릉에 조성된 석물과 비교했더니 상당히 유사했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나들이 겸 식구들과 함께 다녀왔습니다. 집 근처라 조르르 달려가 모처럼 잔디밭에서 즐거운 토요일 오후를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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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양왕릉의 장명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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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들은 공양왕릉의 장명등을 감상을 겸해서 여러 각도에서 찍은 겁니다. 상당히 간소한 양식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공양왕릉을 전체적으로 조망한 것이 아래쪽 사진입니다. 장명등은 봉분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으며, 좌우에 문인석 2쌍과 앞쪽에 돌짐승(석수)이 배치돼 있습니다.
장명등은 측면이 깨져서 콘크리트로 붙여 놓았더군요. 몸체만 원래 장명등이고, 윗부분인 개석(蓋石)은 후대에 만든 것 같습니다. 장명등은 한 쌍으로 보이는데, 돌짐승 앞에 놓인 깨진 돌이 나머지 장명등 같습니다.
이야기가 옆으로 벗어났군요. 다른 사진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사진은 이직(1362~1431) 묘소의 장명등입니다. 개석은 후세에 만든 것이고, 몸체만 옛것입니다. 하부에 장식적 요소가 좀더 복잡해지긴 했으나 개석 바로 아랫부분은 상당히 간소합니다.
▲이직 묘 장명등
아래 사진은 최사강(1385~1443) 묘 장명등입니다. 이직 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창(窓) 부분이 간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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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사강 묘 장명등(1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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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다른 장명등들도 창 부분이 같습니다. 사진 왼쪽부터 경정공주(1384~1455) 묘, 한확(1403~1456) 묘, 윤사흔(1422~1485) 묘에 각각 설치된 장명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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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들과 비교할 때 군사공 할아버지 묘소 앞에 설치된 U자형 석물은 개석이 없어진 장명등인 것이 분명합니다. 또한 양식을 비교할 때 이 장명등보다 앞서 만들어진 공양왕릉의 장명등과 훨씬 더 닮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로 보아 군사공 할아버지 묘 장명등은 조선 초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의 의문
장명등은 봉분 중앙에 배치돼 있습니다. 아직 예외 사례는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쌍분일 경우에는 봉분과 봉분 사이에, 봉분이 셋일 경우에는 가운데 봉분 중앙에 정확히 맞춰져 있습니다. 공양왕릉이나 윤사흔 묘(아래 사진)의 경우를 보면 얼른 이해가 되실 겁니다.
그런데 군사공 할아버지의 경우에는 봉분 중앙이 아니라, 한쪽으로 많이 벗어나 있습니다. 마치 쌍분일 경우 중앙에 배치하는 사례와 같습니다. 이 장명등이 처음 조성된 상태 그대로라면 군사공 할아버지 봉분 옆에 할머니 묘소가 있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문제는 며칠 후 현지에서 다시 살펴볼 생각입니다. 종친 여러분의 도움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윤사흔(1422~1485) 묘 장명등. 봉분 중앙에 배치돼 있다.
<추가 기록> 2007년 5월 10일 04:59 김윤식 기록 추가
2007년 5월 2일 판서공 시제 당일 강진 토마리 선영에서 확인 결과를 추가합니다.
군사공 할아버지 묘소에 있는 장명등은 현재 봉분 오른쪽 뒤에 있습니다.
군사공 할아버지 묘소 앞 제절은 비교적 넓은 편입니다.
이로 보아 장명등은 원래 위치가 아니라 옮겨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또한 장명등을 바라보고 오른쪽이 그리 넓지 않은 것으로 보아 할머니께서는 원래부터 합장으로 모신 것 같습니다.
댓글목록
김태영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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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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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개석이 없어진 조선초기 양식의 장명등...
강진 시제 참석때 마다 궁금했는대 이제야 의문점이 풀렸습니다.
현재 위치는 후에 변경되었을수도 있고 개석도 주위에 뭍혀 있을수도 있습니다.
현재 장대석으로 놓여있는 구비도 뒤집어 확인도 해보고 싶습니다.
자세한 소개 감사드립니다.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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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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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집중력과 끈기, 추리력의 귀한 결과입니다.
깨진 장명등 개석이라도 주위에서 찾아진다면---
구비가 장대석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놀라운 이랴기를 들었습니다.
다시 원자리로 가야 하지 않을까요?
신비보다 구비가 몇 백배 더 값어치가 있을텐데----
김정중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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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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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눈이 번쩍 떨어집니다~! 모두가 둘러서서 의문을 제기하며 갖은 추측을 하던 돌이지요
그때도 축문을 태우는 곳이냐 뭐냐 하면서 갸우뚱 했는데 결국 불과 관련은 있는것 같네요.
고증이 되어 윗 부분을 복원하면 문중사에 또 한 획을 긋게 되겠군요
이번 시제때 발표하여 여러 어른들과 확인 및 의논 하여 실행 했으면 오죽 좋으련만......
안사연 화이팅!!
김상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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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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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여말 선초 인물들의 묘소 앞 장명등 양식을 통해 장명등으로 판명되어 마음이 후련합니다.이젠,장명등의 위치에 따른 배위 묘소의 추정,아니면 새로이 묘역을 조성할 때 개석이 없었던 이유로 장명등이 하나의 독립된 석물로 간주되어 현재의 위치로 옮겨 놓았는지에 대한 문제만 풀면 되겠군요.이는 묘역조성기 등을 통해 고찰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철저한 고증으로 "U字형 석물에서 장명등"으로 거듭나기까지 혼신을 다해주신 윤식님의 노고에 박수를 보내드리며 내일, 배꽃이 환한 들판이 펼쳐지는 남도로 향하시는 강진시제길 잘 다녀오시길 바랍니다.
김윤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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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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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솔내 대부님께서 귀한 책을 주신 덕분에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솔내 대부님 감사합니다. 현지 확인 결과는 본문에 추기 형태로 덧붙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