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확(金矱)과 관련한 시문(詩文)[1] *교산 허균. 동악 이안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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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7-05-14 10:55 조회1,398회 댓글1건본문
교산 허균
惺所覆瓿稿』(許筠)권1, 詩部 1, 楓嶽紀行,
「金水潭正卿墅作[前妻娚矱也 同年司馬]」
層嶂帶茅茨 煙蘿斂暝姿 誰知靜者意 不負故人期
日落巖泉媚 風生竹樹悲 東峯有初月 謝眺得新詩
수담(水潭) 김 정경(金正卿)의 별장에서 짓다
전처남(前妻娚) 확(矱)인데, 나와 같은 해에 사마(司馬)에 합격하였다.
층층진 메 띳집을 빙 둘렀는데 / 層嶂帶茅茨
등라(藤蘿)엔 어둔 연기 활짝 걷혔네 / 煙蘿斂暝姿
고요한 자의 뜻을 뉘라 알리요 / 誰知靜者意
친구의 기약을 아니 저버려 / 不負故人期
해가 지니 돌샘은 한결 더 곱고 / 日落巖泉媚
바람 이니 대나무는 슬퍼하누나 / 風生竹樹悲
동녘 봉에 초생달 돋아오르니 / 東峯有初月
사조는 새론 시를 얻겠군그래 / 謝朓得新詩
『惺所覆瓿稿』권9, 文部6, 書,
「與金甥正卿書」
見手滋 如挹芝宇 況承慰問切至 欣感交幷 官爵是外物 一斥奚病 僕之平生 爲裕甫所毀了者甚多 頃自湖南屆全州 則裕甫適丁母憂 初喪處事 縱曰頗甚才盡 外客安從而知之乎 有人毀裕甫者 引僕爲證 洛下人初見僕 爭問其由 裕甫曾陷我以在服不謹 則其初喪 用印盜出官物 濫杖下人等事 我縱目覩 豈可掛諸口吻 有若報復者然 是以 問者百人 俱皆以不能知答之 用是致疑於僕 遂謂今反相結 至忝於謀議云 則冤孰甚焉 養吾聞此言而來語 則在僕初無是事 固當自辨 裕甫之迫問奇宋二家 豈亦僕勸而爲之乎 見忤之端 寔出於玆 厥後兄家結婚於內 賤隷數人承裕甫旨 欲間冢宰於上 造出諺書搆諸貴人 遂起紛擾之端 其致疑固其所也 今士大夫姻家新婦之季父 不敢以諺書通于其姑 矧阙中嚴邃之地乎 久則自當釋然 聊不與辨 僕素不喜榮官 今得一事自罷 秋雨乍收 近當一馬往訪仙山 仍爲東還計 此時君若在潭墅 則過宿數宵 劇談今古 甕頭潼醴 可以餉不飮客 而石筍沙鼈 足以供案肴 須掃風軒以俟 終不負約 只此
처남 김 정경(金正卿)에게 준 글
수서(手書)를 받아 얼굴을 보는 것 같은데, 더구나 위문이 지극하니 기쁨과 느꺼움이 한꺼번에 밀려오네. 관작은 외물(外物)이라, 한 번 배척받았다 해서 어찌 근심하겠는가.
내 평생에 유보(裕甫 이홍로(李弘老)의 자)로 인해 훼방을 당한 것이 심히 많았다. 지난번 호남으로부터 전주에 당도했을 적에 유보가 마침 모친의 상을 당해서 초상의 처사가 비록 대단히 미진했다 할지라도 외방(外方)에서 온 객이 어떻게 그 일을 알 수 있었겠는가. 유보를 욕하는 사람 가운데 어떤 이가 나를 끌어들여 증인으로 삼으려 하니, 사람들은 나를 보자마자 다투어 그 경위를 묻곤 하였네. 그러나 유보는 일찍이 내가 복중(服中)의 상제로서 행실에 근실치 못하다 하여 욕을 했던 적이 있으니, 그가 초상 중에 도장을 사용해서 관물을 도둑질해내고 하인을 마구 때린 따위의 일을 설사 내가 눈으로 보았다 한들 어찌 그것을 입에 담아 마치 보복하는 것처럼 할 수 있겠는가. 이 까닭에 묻는 사람이 백이 넘었으나 모두 잘 모른다고 답을 했었네. 이 때문에 의심이 나에게 미치게 되어 마침내 이르기를 '이제는 오히려 서로 결탁하여 모의하는 데 이르렀다.'고들 하니, 원통함이 이보다 심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양오(養吾 이지완(李志完)의 자)가 이 말을 듣고 와서 말을 하니, 내 자신에 있어서는 애당초 이런 일이 없었던 바라 내 입으로 변론해 두려는 것이네.
유보가 기(奇)ㆍ송(宋) 두 집안에 다그쳐 물은 것도 어찌 또한 내가 친하여 그런 것이겠는가. 미움을 받게 된 발단이 진실로 이에서 나온 것이네. 그 후에 형님댁에서 대내(大內)와 혼인을 맺을 때 천례(賤隷) 수인이 유보의 명을 받아 총재를 위에다 이간질하기 위해 언서(諺書)를 조작해서 귀인들을 얽어매자 드디어 분요의 발단이 일어나게 되었으니, 그 의심을 부른 것은 진실로 당연한 일이네. 오늘날 사대부의 인가(姻家)에서도 신부의 계부(季父)가 감히 언어로써 그 시어머니에게 통할 수는 없는 터인데, 하물며 궁궐 속의 엄하고 깊은 곳에서 어찌 그리한단 말인가. 오래 있으면 저절로 밝혀질 것이기에 변명하지 않으려 했던 것이었네.
나는 본디 벼슬의 영달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이제 한 사단을 얻어 절로 파직하게 되었으니, 가을 비가 잠깐 걷히면, 마땅히 한 필 말을 타고 자네 집을 찾아 보고 인하여 동쪽으로 돌아갈 계획을 세웠네. 이 때쯤 자네가 만약 별장에 있으면 지나는 길에 며칠을 묵으면서 고금을 극담키로 하세. 단지에 남은 단술로는 술 못하는 손을 대접할 수 있겠고, 석순(石筍)과 자라로는 술상 안주로 족할 것이니, 모름지기 바람 난간을 치우고 기다리게. 끝내 약속을 저버리지 않을 것일세. 이만 그치네
허균(許筠)
1569(선조 2)∼1618(광해군 1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단보(端甫), 호는 교산(蛟山)·학산(鶴山)·성소(惺所)·백월거사(白月居士).
동악 이안눌
東岳先生集』(李安訥)권17, 東遷錄 하,
「奉謝原州金明府[矱]正卿手札見問 送燒酒一甁 鷄兒二首」
(一) 多謝平原牧 開緘手自題 我觀今日意 君與古人齊
對使先斟酒 呼童旋殺鷄 羈艱成一飽 不省醉如泥
(二) 山村閏六月 一日度如年 小市稀新穀 空廚冷暮煙
誰言羈客苦 却荷故人怜 擧室啼飢處 陶然自醉眠
(三) 七尺癯形一老僧 異方羈滯病侵凌 峽深本自無先業 鄕僻何曾有舊朋
莊粟縮儲妨夏閏 市鹽增價怯年登 終朝啖菜窮居味 欲報隣州寫未能
이안눌(李安訥)
1571(선조 4)∼1637(인조 1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자민(子敏), 호는 동악(東岳).
행(荇)의 증손으로 진사 형(泂)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경주이씨이다. 재종숙부인 사헌부감찰 필(泌)에게 입양되었다. 이식(李植)의 종숙(從叔)이다.
18세에 진사시에 수석합격하였으나 동료들의 모함을 받자, 과거 볼 생각을 버리고 문학에 열중하였다. 동년배인 권필(權鞸)과 선배인 윤근수(尹根壽)·이호민(李好閔) 등과 교우를 맺었는데, 이러한 모임을 동악시단(東岳詩壇)이라고 하였다.
29세 때 다시 과거에 나아가 문과에 급제하였다. 여러 언관직(言官職)을 거쳐 예조와 이조의 정랑으로 있다가 1601년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성균직강(成均直講)으로 옮겨 봉조하(奉朝賀)를 겸하였다. 공조로 옮겼다가 주시관(主試官)으로 호서와 관서에 나갔으며, 다시 예조에 들어왔다가 단천군수가 되었다.
1607년 홍주목사·동래부사를 거쳐 1610년 담양부사가 되었으며, 1년 만에 병을 이유로 돌아왔다.
3년 후에 경주부윤이 되었다가 곧 호조참의 겸 승문원부제조로 임명되었다. 동부승지에서 좌부승지가 된 뒤 사직하고 강화부사가 되었다. 어머니의 3년상을 마치고, 인조반정으로 예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비방하는 말들이 생겨 사직하였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에 방관하였다는 이유로 귀양을 갔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사면되어 강도유수(江都留守)에 임명되었다.
1631년 함경도관찰사가 되었으며, 다음해 예조판서 겸 예문관제학을 거쳐 충청도도순찰사에 제수되었다.
조정에서 청렴근면한 관리를 뽑는 데 들게 되어 숭정대부(崇政大夫)의 가자(加資)를 받고, 형조판서 겸 홍문관제학에 임명되었다. 이해(1636년) 겨울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병중의 몸을 이끌고 왕을 호종하여 남한산성으로 갔다가 환도한 뒤에 병세가 악화되어 죽었다.
특히 시작에 주력하여 문집에 4, 379수라는 방대한 양의 시를 남기고 있다. 두보(杜甫)의 시를 만번이나 읽었다고 하며, 시를 지을 때 일자일구도 가벼이 쓰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당시(唐詩)에 능하여 이태백에 비유되었고 글씨도 잘 썼다. 정철(鄭澈)의 〈사미인곡〉을 듣고 지은 〈문가 聞歌〉가 특히 절창이라 일컬어졌고, 임진왜란이 끝난 다음 동래부사로 부임하여 지은 〈동래사월십오일 東萊四月十五日〉은 사실적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국난을 형상화시킨 장편시로서, 왜적이 동래에 쳐들어왔을 때 관민이 함께 막으려다 장렬하게 전사한 사연을 담고 있다.
그의 시는 고답적 표현을 버리고 절실한 주제를 기발한 시상으로 표현한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그의 문집에 실린 시는 자신이 옮겨다닌 고장을 중심으로 묶여 있어서 그 지방의 민중생활사 및 사회사적 자료를 담고 있으며, 특히 그의 생애가 임진왜란·병자호란의 양란에 걸쳐 있으므로 국난에 피폐해진 당시의 상황을 추적하여 볼 수 있다.
또한, 명나라로 사행가면서 지은 그의 시에서는 대명교섭사(對明交涉史)의 자료를 발견할 수 있다. 숭록대부의정부좌찬성 겸 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에 추증되었다. 담양의 구산서원(龜山書院)과 면천의 향사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혜(文惠)이다.
저서로는 《동악집》 26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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