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확관 관련된 시문- 청음 김상헌. 다산 목대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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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7-05-14 11:08 조회1,488회 댓글1건본문
『淸陰先生集』(金尙憲)권4, 오언율시,
「鐵原府伯金正卿言三釜落水窮處有一村 眞避亂之地 路險不得到 悵望賦之[正卿名矱]」
楣靈湫上 深藏避世村 生涯自耕鑿 洞府別乾坤
黃綺高風遠 朱陳舊俗存 一廛容我住 何必問桃源
『淸陰先生集』권4, 오언율시,
「豐田驛 自壬辰兵後無館宇 行旅病之 府伯金正卿新構小堂 堂成而余行適至 余至而久旱適雨 喜而賦之」
古驛堂新闢 春官奉使廻 東民三月望 好雨此時來
喜色歸農畝 歡情溢酒杯 天時與人事 今日摠佳哉
김상헌(金尙憲)1
1570(선조 3)∼1652(효종 3). 조선 인조·효종 때의 상신(相臣). 본관은 안동. 자는 숙도(叔度), 호는 청음(淸陰)·석실산인(石室山人:중년 이후 楊州 石室에 退歸해 있으면서 사용)·서간노인(西磵老人:만년에 安東에 은거하면서 사용). 서울출생.
돈녕부도정(敦寧莩正) 극효(克孝)의 아들이며, 우의정 상용(尙容)의 동생이다.
3세 때 큰아버지인 현감 대효(大孝)에게 출계(出系)하였다.
1590년(선조 23) 진사가 되고 1596년 전쟁중에 보인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부수찬·좌랑·부교리를 거쳐 1601년 제주도에서 발생한 길운절(吉雲節)의 역옥(逆獄)을 다스리기 위한 안무어사(安撫御史)로 파견되었다가 이듬해 복명, 고산찰방(高山察訪)과 경성도호부판관(鏡城都護府判官)을 지냈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문과중시에 급제, 사가독서(賜暇讀書)한 후 교리·응교·직제학을 거쳐 동부승지가 되었으나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 배척에 앞장선 정인홍(鄭仁弘)을 탄핵하였다가 광주부사(廣州府使)로 좌천되었다.
1613년 칠서지옥(七庶之獄)이 발생,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金悌男)이 죽음을 당할 때 혼인관계(김상헌의 아들 光燦이 김제남의 아들 $협01의 사위가 됨.)로 인해 파직되자 집권세력인 북인의 박해를 피하여 안동군 풍산으로 이사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이조참의에 발탁되자 공신세력의 보합위주정치(保合爲主政治)에 반대, 시비(是非)와 숙특(淑慝:善惡)의 엄격한 구별을 주장함으로써 서인 청서파(淸西派)의 영수가 되었다.
이어 대사간·이조참의·도승지·부제학을 거쳐, 1626년(인조 4) 성절 겸 사은진주사(聖節兼謝恩陳奏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이후 육조의 판서 및 예문관·성균관의 제학 등을 지냈다.
1632년 왕의 생부를 원종(元宗)으로 추존하려는 데 반대하여 벼슬에서 물러났다.
1635년 대사헌으로 재기용되자 군비의 확보와 북방 군사시설의 확충을 주장하였고, 이듬해 예조판서로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주화론(主和論)을 배척하고 끝까지 주전론(主戰論)을 펴다가 인조가 항복하자 안동으로 은퇴하였다.
1639년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요구한 출병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청나라에 압송되어 6년 후 풀려 귀국하였다.
1645년 특별히 좌의정에 제수되고, 기로사에 들어갔다. 효종이 즉위하여 북벌을 추진할 때 그 이념적 상징으로 대로(大老)라고 존경을 받았으며, 김육(金堉)이 추진하던 대동법에는 반대하고 김집(金集) 등 서인계 산림(山林)의 등용을 권고하였다.
윤근수(尹根壽)의 문하에서 경사(經史)를 수업하고, 성혼(成渾)의 도학에 연원을 두었으며, 이정구(李廷龜)·김유(金#유34)·신익성(申翊聖)·이경여(李敬輿)·이경석(李景奭)·김집 등과 교유하였다.
1653년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1661년(현종 2) 효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양주 석실서원(石室書院), 정주 봉명서원(鳳鳴書院), 개성 숭양서원(崧陽書院), 제주 귤림서원(橘林書院), 정평 망덕서원(望德書院), 함흥 창덕서원(彰德書院), 경성 경산서원(鏡山書院), 의주 기충사(紀忠祠), 광주 현절사(顯節祠), 상주 서산서원(西山書院), 종성 화곡서원(華谷書院), 안동 서간사(西磵祠), 예안 운계사(雲溪祠), 정평 모현사(慕賢祠)에 제향되었다.
시문과 조천록(朝天錄)·남사록(南槎錄)·청평록(淸平錄)·설교집(雪窖集)·남한기략(南漢紀略) 등으로 구성된 《청음전집》 40권이 전한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茶山集』(睦大欽)권1, 칠언절구,
「直中次金正卿韻二首」
(一) 前宵孤夢返山門 松桂蒼蒼雪裏存 自是故園多物色 賦歸何待鑑湖恩
(二) 自古儒流不異門 況吾交契夙心存 靑綾伴直殆天假 到底無非聖主恩
『茶山集』권2, 칠언절구, 「
和金正卿別業韻」
多君卜築占名區 物外風煙又一秋 磴道逶迤臨鏡面 林亭隱約坐巖頭
平沙雁落潮侵岸 古渡人空月上舟 安得便從仙侶去 醉攀丹桂共淹留
목대흠(睦大欽)
1575(선조 8)∼1638(인조 1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사천(泗川). 자는 탕경(湯卿), 호는 다산(茶山) 또는 죽오(竹塢).
이조참판 첨(詹)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증병조판서 정건(鄭謇)의 딸이다.
1601년(선조 34) 진사가 되고, 1605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07년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을 거쳐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이어 부응교(副應敎)·집의(執義)를 거쳐, 1612년 광주목사(廣州牧使)를 지내고 공조참판·부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으로 종군하여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다.
1632년 예조참의가 되고 이듬해 강릉부사가 되었는데, 민심을 얻어 나중에 유애비(遺愛碑)가 세워졌다. 천성이 고결하고 시문에 뛰어났다. 통훈대부(通訓大夫)·홍문관교리(弘文館校里)·지제교 겸 경연시독관(知製敎兼經筵侍讀官)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다산집 茶山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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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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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잘읽었습니다. 홈 김확란에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