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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주(石洲)에게(허균) - 김 정경(金正卿)의 영평(永平) 별장에 닿으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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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영 작성일07-05-14 11:36 조회1,555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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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주(石洲)에게 준 글

서울에 있을 적에 형이 강도(江都)에서 보낸 편지를 받아보니, 나의 벼슬 잃음을 위로한 말씀이었습니다. 이때 나는 이미 수레를 단속하여 도성문을 나오는 참이었는데, 찾아 온 사환이 편지를 놓고 떠나겠다 하기에 총망중이라 답장을 쓰지 못했으니, 우물쭈물 결례한 죄를 피할 길이 없습니다.

나는 집을 떠난 이틀 만에 김 정경(金正卿)의 영평(永平) 별장에 닿으니 천학(泉壑)과 계산(溪山)의 아름다움은 지난해에 못지 않았으나, 다만 한스러운 것은 대관(臺館)이 허물어진 것을 다시 세우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방안에 들어가니 단술이 항아리에 가득하여 향의(香蟻 술독에 뜬 쌀을 벌레에 비유한 것)가 한창 굼실거리니 형을 초치해다가 큰 술잔으로 권하지 못한 것이 한스러울 뿐이었습니다. 형이 이 말을 들으면 반드시 군침을 흘릴 것입니다. 지금에 이르러도 성벽에는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의 호)ㆍ하곡(荷谷 허봉(許篈)의 호)의 시가 남아 있어 청초하여 읊을 만했고 또 자민(子敏 이안눌(李安訥)의 자)의 시가 있었으나 바빠서 화운을 하지 못했습니다.

성소부부고 제9권 문부 6(文部六) - 서(書)


권필 [權韠, 1569~1612]

본관 안동. 자 여장(汝章). 호 석주(石洲). 정철(鄭澈)의 문인. 과거에 뜻이 없어 시주(詩酒)로 낙을 삼고, 가난하게 살다가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끝내 취임하지 않았다. 강화부(江華府)에 갔을 때 많은 유생들이 몰려오자 이들을 모아 가르쳤고, 이정구(李廷龜)가 대문장가(大文章家)로 알려진 명나라 사신(使臣) 고천준(顧天俊)을 접반하게 되어 문사(文士)를 엄선할 때 야인으로서 이에 뽑혀 문명을 떨쳤다.

이에 앞서 임진왜란 때는 주전론(主戰論)을 주장하였고, 광해군 초에 권신(權臣) 이이첨(李爾瞻)이 교제하기를 청하였으나, 끝내 거절하였다. 광해군 비(妃) 유씨(柳氏)의 아우 유희분(柳希奮) 등 척족(戚族)들의 방종을 궁류시(宮柳詩)로써 비방하자, 광해군이 대로(大怒)하여 시(詩)의 출처를 찾던 중, 1612년 김직재(金直哉)의 옥(獄)에 연루된 조수륜(趙守倫)의 집을 수색하다가 그의 시가 발견되어 친국(親鞫) 받은 뒤 유배되었다. 귀양길에 올라 동대문 밖에 이르렀을 때 사람들이 주는 술을 폭음하고 이튿날 죽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사헌부지평에 추증되었으며, 광주(光州) 운암사(雲巖祠)에 배향되었다. 《석주집(石洲集)》과 한문소설 《주생전》이 현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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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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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사합니다. 김확란에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