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군지순례6-2(괴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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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만 작성일02-05-24 08:47 조회2,316회 댓글0건본문
pp 1009. 제12편 인물. 성씨.
---전략)우리고장의 인맥을 살펴보면 대종을 이루고 있는 안동김씨 문중의 金悌
甲(김제갑)은 임진왜란때 원주목사로 節死(절사)하고 그의 부인 전주이씨와 아들
金時伯(김시백)이 함께 순사하여 「一隅孤城 萬古三綱(일우고성 만고삼강)」이란
어필로 된 賜旌(사정)이 있고 金時獻(김시헌)은 제갑의 아들로 예조참판을 역임하
고 역학에 밝았다. 金時敏(김시민)은 임진난때 진주목사로 晋州大捷(진주대첩)에
서 순사하였고 그의 종제 金時若(김시약)은 임진난때 의병을 일으켜 괴산 선봉장
으로 싸웠으며, 김시민의 손자 金得臣(김득신)은 詩名(시명)이 높고 安豊君(안풍
군)에 봉해졌다.(후략)
pp 1011. 제1장 역사적 인물.
61. 金忠甲(김충갑 1515∼1575)
---자는 恕初(서초) 호는 龜岩(구암). 悟竹山人(오죽산인), 본관은 안동으로 진사
金錫(김석)의 아들이다. 1546년(명종 1)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지평, 헌납, 북평사
를 거쳐 안악군수가 되었으며 요승 보우를 주할 것을 누차 상소한 바 있었으나
乙巳黨人(을사당인)으로 몰려 삭직되었다가 선조초에 放還(방환)되었다. 묘는 중
원군 살미면 무릉동에 있다.(문헌 : 괴산군지)
62. 金孝甲(김효갑 1520∼1560)
---자는 行初(행초) 호는 曼軒(만헌), 米眞(미진), 본관은 안동. 구암 김충갑의 동
생이며 毅齋(의재) 金悌甲(김제갑)의 중형이다. 1553년(명종 8) 문과에 仲完 김제
갑과 同榜(동방) 급제하여 내한, 정언, 수찬을 거쳐 아산현감에 이르렀다.
(문헌 : 괴산군지)
63. 金悌甲(김제갑 1525∼1592)
---조선조의 문신, 자는 順初(순초) 호는 毅齋(의재) 본관은 안동이고, 고려의 명
장 김방경의 후손이며, 진사 김석의 아들이다. 이황의 문인으로 1553년(명종 8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1555년(명종 10) 홍문관 정자가 되고, 3년후 병조좌랑을 거
쳐 1573년(선조 6) 정언, 1581년(선조 14) 충청도 관찰사에 올랐다. 1589년(선조
22) 창성부사가 되고, 1592년 임진왜란때 원주목사로 왜장 森吉成(삼길성)의 군사
가 쳐들어오자 관. 의병을 이끌고 싸우다가 전사하였으며, 이어 아들 김시백과 부
인 이씨도 순절했다. 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원주의 忠烈祠(충렬사)와 花巖書
院암(화암서원)에 제향되었으며, 諡號(시호)는 文肅(문숙)이다. 1966년 강원도 애
국유족부활위원회에 의해 원주역 광장에 그의 충렬탑이 세워졌다. 그의 묘소는
중원군 앙성면 발천리에 있다가 1989년 3월에 능촌리로 옮겼다.
(문헌 : 명종. 선조실록, 조선금석총람, 괴산군지)
66. 金時獻(김시헌 1560∼1613)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子徵(자징) 호는 艾軒(애헌), 김제갑의 아들이다.
1588년(선조 21) 식년문과에 급제하고 검열. 사간. 전한. 정언. 사인 겸 보덕. 집의
등을 역임하고 1597년 동부승지. 우부승지. 충청도 관찰사를 거쳐 대사성에 올랐
다. 그후 대사간. 병조참의. 우승지. 좌승지 등을 역임 1602년(선조 35) 召募官(소
모관)으로 경상도에 갔다가 유생들로부터 호색하다고 탄핵을 받고 오위 부사직으
로 좌천되었다. 그후 復讐使(복수사)와 종사관으로 신립이 전사한 탄금대를 돌아
보고 임진왜란 후의 민심을 순무하고 城柵(성책)의 수축을 명했으며, 이듬해 동지
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04년 순천군수, 다음해 병조참의, 이어 좌승지, 1607
년(선조 40) 양양부사. 병조참판을 역임했다. 선조가 죽은 후 동지춘추관사로
「선조실록」의 편찬에 참여, 1611년(광해군 3) 예조참판을 거쳐 도승지에 올랐
다. 역학에 밝았다. 묘소는 중원군 앙성면 영죽리에 있다.
(문헌 : 선조실록, 괴산군지)
68. 金仁甲(김인갑 1534∼1594)
---자는 善初(선초) 진사 김석의 다섯째 아들이며 毅齋(의재) 金悌甲(김제갑)의
아우이다. 1568년(선조 1) 진사를 거쳐 1578년(선조 11) 장영도 찰방이 되었고 영
산. 비안현감을 역임하였으며 좌찬성에 추증되었다.(문헌 : 괴산군지)
97. 金時若(김시약 1564∼1627)
---조선조 丁卯胡亂(정묘호란) 때의 節臣(절신)으로 자는 箕吾(기오), 비안현감
김인갑의 아들이며 충무공 김시민의 종제이다. 서애 유성룡의 천거로 훈련원 첨
정, 만호, 첨사 등을 역임하다가 1596년(선조 29)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괴산 선봉
장으로 倡義兵(창의병)을 이끌고 왜적과 싸웠는데 관찰사의 천거를 받아 별장이
되었다. 정유왜란이 일어나자 관병과 의병을 이끌고 창원. 옥천에서 왜군 24명을
죽였다. 그뒤 통영군관을 거쳐 창성부 첨절제사가 되었고, 1627년(인조 5) 정묘호
란에 창성이 함락되고 그의 두 아들과 함께 적의 포로가 되어 피살되었다. 병조
참판에 추증되었고 1683년(숙종 9) 旌門(정문)이 세워졌다.
(문헌 : 선조. 인조실록, 괴산군지)
108. 金 緻(김 치 1577∼1625, 註 : 緻는 오기되어 있는 바 바로 잡아 표기함)
---조선조의 문신으로 자는 士精(사정), 호는 南峯(남봉). 深谷(심곡), 본관은 안
동이며 충무공 김시민의 아들이다. 1597년(선조 30)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設書(설
서)를 거쳐 1608년 사가독서를 했다. 광해군 때 司僕寺正(사복시정). 이조참의. 동
부승지. 대사간을 거쳐 병조참지에 올랐으나 독직사건으로 파면되었다. 인조반정
후 대북사건으로 몰려 유배되었다가 동래부사를 거쳐 1625년(인조 3) 경상도 관
찰사가 되었다. 이조참판에 증직되고 安興君(안흥군)에 봉해졌다. 저서로 「深谷
秘訣(심곡비결)」이 있다. (문헌 : 광해군일기, 인조실록, 괴산군지)
114. 金時讓(김시양 1581∼1643)
---조선시대 문신으로 初名(초명)은 時言(시언), 자는 子中(자중), 호는 荷潭(하
담), 본관은 안동, 비안현감 김인갑의 아들이다. 1605년(선조 38) 정시문과에 급제
하여 삼사. 세자시강원을 거쳐 이조랑을 지내고, 1611년(광해군 3) 전라도 도사가
되어 향시를 주관할 때 詩題(시제)에 왕의 실정을 비유한 문제를 출제했다는 이
유로 종성에 유배되었다가 1616년 영해로 移配(이배)되었다. 1623년 仁祖反正(인
조반정)으로 풀려 예조좌랑. 병조정랑. 수찬을 거쳐 교리로 있을 때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도체찰사 이원익의 종사관으로 출전했고 응교를 거쳐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가 정묘호란 후 평안도 관찰사를 거쳐 1731년(註 : 1631년의 오기) 병조판
서에 오르고 8도 도원수. 4도 체찰사 등을 하면서 斥和(척화)를 주장했다.
---그후 강화유수. 호조판서. 병조판서. 4도의 관찰사를 역임 지중추부사를 거쳐
1641년 「선조실록」을 개수할 때 판중추부사 겸 판춘추관사로 이에 참여했으나
맹인이 되어 사직하고 충주로 내려가 있다가 병사했다. 典籍(전적)과 經史(경사)
에 밝았으며 인조때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시호는 忠翼(충익), 회령의 향사에 제
향되었다.
--저서로는「荷潭破寂錄(하담파적록)」「荷潭集(하담집)」「 溪記聞(부계기문)」
이 있다. 묘는 괴산읍 능촌리 방아재에 있으며 1670년(현종 11)에 대제학 趙絅(조
경)이 짓고, 한성부 우윤 李正英(이정영)이 쓴 신도비를 세웠다.
(문헌 : 인조실록, 국조명신록, 괴산군지)
125. 金 絅(김 경 1599∼1675)
---본관은 안동, 龜岩(구암) 金忠甲(김충갑)의 손자로 문과에 급제하여 翰林(한
림)을 지냈다.(문헌 : 괴산군지)
127. 金壽翼(김수익 1600∼1673)
---조선조의 문신으로 자는 星老(성노), 호는 靑岳(청악), 본관은 안동, 현령 金光
(김광위)의 아들이다. 1624년(인조 2) 사마시에 합격하여 참봉이 되고, 1630년
별시문과에 합격하여 전적. 예조랑. 지제교를 지내다가 1636년 병자호란 때 남한
산성에 왕을 扈從(호종)하고 치욕적인 화의가 성립된 후 斥和論者(척화론자)로서
스스로 근신하다가 1640년 괴산군수. 응교. 의주부윤. 병조참의 이듬해 제주목사
로 부임되었으나 탐관오리로 탄핵받아 영남에 유배되어 1658년(효종 9)에 放還
(방환)되어 여주목사를 지냈다. 시호는 忠景(충경)이고 저서로 「靑岳集(청악집)」
이 있다.(문헌 : 인조. 효종실록, 국조인물고, 괴산군지)
129. 金得臣(김득신 1604∼1684)
---조선조의 시인. 문신으로 자는 子公(자공), 호는 栢谷(백곡), 龜石山人(구석산
인), 본관은 안동이고, 진주목사 김시민의 손자이며, 부제학 김치의 아들이다.
---1642년(인조 20) 진사가 되고 蔭補(음보)로 참봉이 되었다. 1662년(현종 3) 증
광문과에 급제하여 정. 지제교 등을 거쳐 嘉善大夫(가선대부)에 이르고 安豊君(안
풍군)에 봉해지고 숙종조에 청백리에 올랐다. 그러나 장차 사화가 있을 것을 예견
하여 벼슬을 버리고 괴산읍 능촌리에 있는 槐安壹(괴안일, 현재의 醉默堂(취묵
당))에 내려와 은거하였다. 史記(사기)의 伯夷傳(백이전)을 1억 1만 3천번을 읽고
그의 서재 이름을 億萬齋(억만재)라 하였으나, 뛰어난 문장이 세상에 알려지고 효
종은 그의 龍湖漢江詩(용호한강시)를 보고 감탄하였다고 한다.
저서로「栢谷집(백곡집)」「終南叢志(종남총지)」가 있다. 묘소는 증평읍 율리에
있다.(문헌 : 현종. 숙종실록, 국조인물고, 괴산군지)
131. 金 徽(김 휘 1607∼1677)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敦美(돈미), 호는 四休亭(사휴정). 晩隱(만은). 본관은
안동이고, 하담 김시양의 아들이다.
---1642년(인조 20)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봉교가 되고 1646년 愍懷嬪(민회빈)이
억울하게 사사되자 그 배후를 규명하라고 상소했다가 파직되었다. 1649년(효종
즉위) 부수찬에 기용, 이조정랑. 사간. 도승지. 경상도 관찰사 등을 역임 1666년
(현종 7) 남인의 탄핵으로 삭직 당했고 1668년 형조참판이 되고, 대사헌을 거쳐
1675년(숙종 1) 이조판서를 지내고 이듬해 예조판서가 되었다. 그림을 잘 그렸다.
(문헌 : 근역서화징. 괴산군지)
135. 金世達(김세달 1625∼1674)
---자는 士章(사장), 본관은 안동으로 고려 충신 안렴사 金士廉(김사렴)의 11세손
이며 괴산군 청천면 무능리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 그의 재종숙인 성천부사 김언의 임소 책방에서 글을 배우고 있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난 다음해인 1637년 호병이 평안도의 요충인 성천고을을 침공하
자 부사 김언이 관병을 단속하여 경골, 창암산성을 수호하는 한편 의병을 널리모
아 적의 대병과 혈전을 거듭하다가 전세가 급박하여 전황과 적세를 자세히 기록
한 장계를 조정에 올리고저 할 때 적의 포위망을 탈출할 가능성 있는 소년인 공
에게 전계할 것을 명하는 한편 어린 재종질로 하여금 무사 귀향토록 조처했다.
공은 급히 행장을 수습하여 산중으로 도망하여 장계서찰을 작은 칼로 썰어서 순
서대로 심지를 꼬아 행장질 끈을 만들어 지고 죽기를 한하고 주야 배도하여 서울
로 치달아 올라갔다. 경사에 이른 공은 행장 끈을 풀어 연폭하니 내용이 소상하
여 이를 조정에 올리니 왕이 들으시고 기특히 여겨 인견하고 성장후 관직에 녹용
토록 윤음을 내렸다. 병자호란이후 사색당쟁으로 나라가 혼란하여 벼슬에 뜻이
없어 고향에 은거하며 후학지도에 여생을 바쳤다. 사후에 예조판서 운봉 강백년
이 연주하여 공조판서에 증직되고 묘는 청천면 고성리에 있다.
(문헌 : 현종실록)
150. 金可行(김가행 1654∼1731)
---자는 敬夫(경부), 본관은 안동으로 백곡 김득신의 손자이며 金天揆(김천규)의
아들이다.
---1711년(숙종 37)에 연천현감이 되어 청렴하게 善治(선치)하니 관찰사가 啓
(포계)하고 읍민이 생사당을 세워 칭송하였으며, 1728년(영조 4) 종묘서 령으로
종군하여 양무 1등훈에 녹선되었다. 그의 영정은 괴산읍 능촌리 영정각에 봉안되
어 있다.(문헌 : 괴산군지)
155. 金 素(김 소 16세기 중엽)
---본관은 안동, 비안현감 김인갑의 후손으로 괴산군 사리면 사담리 하도에서 태
어났다.
---1648년(인조 29)에 문과에 급제하여 충청관찰사와 여러 도의 관찰사를 지냈으
며 선정을 베풀었다. 묘는 괴산군 사리면 보광산에 있다.(문헌 : 괴산군지)
158. 金龜錫(김구석 1684∼1774)
---자는 聖應(성응), 호는 樂樂窩(낙낙와) 본관은 안동으로 괴산군 증평읍 남하리
에서 출생했다. 1725년(영조 1)에 진사가 되었으며 1728년 양치도가 난을 일으키
자 창의하여 討賊(토적)하였는데 오히려 賊臣(적신)의 무고를 입어 어전에서 국문
을 받게 되었으나 그의 이치가 정연하고 언사가 명백하므로 왕이 잘못이 없음을
特宥(특유)하고 恩顧(은고)를 내렸다. 이조판서가 그를 가르켜 이사람이 진실로
響曲(향곡)의 사대부라 하고 찬탄하여 기용코자 하였으나 년로함으로 사양하고
고향으로 퇴휴하였다. 죽은 후 통훈대부 군자감정에 증직되었다.(문헌 : 괴산군지)
178. 金圭年(김규년 1812∼1884)
---자는 禎瑞(정서), 본관 안동, 진사 우갑의 10세손이다. 고종조에 진사하였으나
영달에 뜻을 두지 아니하고 문사들과 교우함으로써 평생을 지냈다.
(문헌 : 괴산군지)
180. 金泰熙(김태희 1816∼1898)
---자는 聖友(성우), 본관은 안동으로 충렬공 방경의 후손이다. 1852년(철종 3)에
무과에 급제하여 첨사. 공주영장을 역임하였다. 그의 네 아들 모두 무신이었으니,
장남 용원은 1880년(고종 17) 증광무과에 급제하여 사천현감이 되었고 2남 필원
은 1882년(고종 19) 무과에 급제하여 오위장이 되었으며, 3난 응원은 1881년(고종
18)에 4남 종원은 1882년(고종 19)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옛날 어느 도승이 서면(사리면) 보평은 김영장의 세거지가 되리라 예언하였다
는 전설이 그대로 부합하였다. 묘는 괴산군 청안면 장암리에 있다.
(문헌 : 괴산군지)
195. 金相一(김상일 1852∼1935)
---자는 景明(경명), 호는 ()山(()산). 金鳳山人본(금봉산인), 본관은 안동으로 진
사 김규년의 손자이다. 울진. 용궁. 예천. 함평. 청풍 등 여러 고을 군수를 역임하
여 선정을 베풀었고 벼슬이 가선대부에 이르렀다. 괴산군 용관읍 남쪽에 선정비
가 세워졌고 괴산군 소수면 수리에도 송덕비가 세워졌다.(문헌 : 괴산군지)
197. 金恒默(김항묵 1860∼1937)
---초명은 龍浩(용호), 자는 應王(응왕), 호는 石淵(석연) 안동 진사 김우갑의 11
세손이며, 영년의 아우이다.筮仕(서사)로 고종황제의 심임을 받아 벼슬이 가선대
부 시종원 부경(참판)에 이르렀다. 당시 일제 의 침략으로 국운이 점차 쇠퇴함을
울분강계하여 벼슬을 버리고 괴산군 칠성면 성산에 우거하면서 유명한 선비들과
시문으로 자적하였다. 그가 살던 집은 현재 지방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다.
(문헌 : 조선상여승람)
198. 金東浩(김동호 1860∼1921)
---자는 振宗(진종), 호는 荷一(하일), 본관은 안동이며 진사 김우갑의 11세손이
며 김영년의 아들이다. 蔭仕(음사)로 벼슬이 비서원 비서감승에 이르렀다. 서장관
으로 민병석판서를 따라 청나라 북경에 들어가 고명한 서예가 翁方綱體(옹방강
체)를 배운바 있어 당대 명필가로 명성을 떨쳤고 현재 그의 유품이 많이 남아있
다.(문헌 : 조선상여승람)
220. 金泰鏞(김태용 1905∼1972)
---자는 韓雄(한웅), 호는 聾世(농세), 본관은 안동으로 안렴사 김사렴의 후손이
며 김용회의 아들이다. 천성이 너그럽고 기개가 강직하여 士友(사우)들의 경모를
받았으며 일찍이 개화에 눈을 떠 지역내에 후학들이 교육할 없어 자라나는 학동
들이 배우지 못하고 있는 점을 묵과할 수 없어 사리면 이곡리에 사는 이태호씨를
찾아 논의하고 사재 1백석지기를 희사하여 이태호씨가 희사한 대지 1,220평 위에
3개의 교실을 신축하여 학교를 세웠다. 육영사업에도 공헌했으며, 그는 종사랑전
위참봉으로 괴산향교 전교를 지냈다. 그의 덕행과 인망은 유림인들의 추앙을 받
았다. 후에 화곡국민학교 동창생 일동과 지방유지들이 그의 덕을 기리기 위하여
송덕비를 학교앞에 세웠다.(문헌 : 송덕비문)
221. 金在喆(김재철 1907∼1933)
---김재철은 본관은 안동. 호는 蘆汀(노정)으로 1907년 괴산군 청안면에 출생하
여 경성제일고보를 거쳐 1931년 경성제국대학 문학과를 졸업하고 평양사범대학에
서 교편을 잡고 있다가 1933년 사망했다. 그의 학문적 업적으로는 국어학분야로
"palatalization에 대하여"와 "조선어화의 조선어"라는 논문과 국문학분야로 "조선
연극사"와 "노정잡고"라는 저서가 있는데 이 중 "조선연극사"는 이 방면의 고전
으로 꼽히고 있다.
(문헌 : 김태준, "노정 김재철선생 소전", 서울대학교 동아문화연구소, 국어국문학사전)
pp 1077. 제2장 독립유공자.
25. 金相翊(김상익 1852∼1933)
---본관은 안동으로 괴산군 소수면 수리에서 출생하였으며 고종조 의금부도사를
역임하였다. 1910년 경술 한일합방으로 망국의 울분을 참지 못하고 현직을 버리
고 일가족을 이끌고 경상북도 상주군 화북면 용화리 늘티 장바위로 낙향하였다.
---당시 이곳 일대가 항일의병 양병의 본거지로 총책을 맡은 한봉수 의병대장과
손잡고 슬하에 장남 세응, 차남 한응, 3남 정응, 4난 성응, 5남 낙응 등 5형제와
온 가족이 피복제조 세탁과 무기제작 수리 그리고 고향인 수리에 추수해 놓은 수
백석의 양곡을 陸 (육태)로 운반하여 군량으로 보급하고 밤에는 독립운동 낮에
는 왜병과 拉奪(납탈) 등 갖은 고초를 당하면서 수백석지기 재산을 소진하고 고
향에 돌아와 호구지책에 급급하면서도 여생을 후회없이 마쳤다. 1945년 8월15일
해방후 4남 성응이 독립유공자의 유족이며 독립유공자라하여 충청북도 초대 내무
부장에 취임한 바 있으며 6.25동란때 이로 인하여 납치되어 피살당하였다.
(문헌 : 공적비문)
26. 金鏞應(김용응 1870∼1945)
---본관은 안동이며 괴산군 소수면 수리에서 출생하였고 章陵參奉(장릉참봉)을
지냈다. 1910년 경술 한일합방으로 國破君亡(국파군망)하니 분연히 독립운동에 가
담하여 상해임시정부와 긴밀한 연락하에 국내에서 군자금조달에 활약하다가 왜경
에 체포되어 광주형무소에서 6개월간 복역한 사실이 있으며 8.15 광복후에 이승
만박사가 반민특위위원장에 추천하여 취임케 하려 하였으나 마침 병환으로 취임
치 못하고 그의 손이 중죄를 범하였으나, 조부의 독립운동을 한 공로로 인하여
이승만대통령의 특별 배려로 감형의 혜택을 받은 사실이 있다.
(문헌 : 문중세진록)
▣ 김항용 - 감사합니다.
▣ 김태서 - 자료 감사드립니다.
▣ 김영환 -
▣ 김발용 - 감사합니다
▣ 김재익 -
▣ 김주회 - 감사합니다.
▣ 김은회 - 감사합니다.
---전략)우리고장의 인맥을 살펴보면 대종을 이루고 있는 안동김씨 문중의 金悌
甲(김제갑)은 임진왜란때 원주목사로 節死(절사)하고 그의 부인 전주이씨와 아들
金時伯(김시백)이 함께 순사하여 「一隅孤城 萬古三綱(일우고성 만고삼강)」이란
어필로 된 賜旌(사정)이 있고 金時獻(김시헌)은 제갑의 아들로 예조참판을 역임하
고 역학에 밝았다. 金時敏(김시민)은 임진난때 진주목사로 晋州大捷(진주대첩)에
서 순사하였고 그의 종제 金時若(김시약)은 임진난때 의병을 일으켜 괴산 선봉장
으로 싸웠으며, 김시민의 손자 金得臣(김득신)은 詩名(시명)이 높고 安豊君(안풍
군)에 봉해졌다.(후략)
pp 1011. 제1장 역사적 인물.
61. 金忠甲(김충갑 1515∼1575)
---자는 恕初(서초) 호는 龜岩(구암). 悟竹山人(오죽산인), 본관은 안동으로 진사
金錫(김석)의 아들이다. 1546년(명종 1)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지평, 헌납, 북평사
를 거쳐 안악군수가 되었으며 요승 보우를 주할 것을 누차 상소한 바 있었으나
乙巳黨人(을사당인)으로 몰려 삭직되었다가 선조초에 放還(방환)되었다. 묘는 중
원군 살미면 무릉동에 있다.(문헌 : 괴산군지)
62. 金孝甲(김효갑 1520∼1560)
---자는 行初(행초) 호는 曼軒(만헌), 米眞(미진), 본관은 안동. 구암 김충갑의 동
생이며 毅齋(의재) 金悌甲(김제갑)의 중형이다. 1553년(명종 8) 문과에 仲完 김제
갑과 同榜(동방) 급제하여 내한, 정언, 수찬을 거쳐 아산현감에 이르렀다.
(문헌 : 괴산군지)
63. 金悌甲(김제갑 1525∼1592)
---조선조의 문신, 자는 順初(순초) 호는 毅齋(의재) 본관은 안동이고, 고려의 명
장 김방경의 후손이며, 진사 김석의 아들이다. 이황의 문인으로 1553년(명종 8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1555년(명종 10) 홍문관 정자가 되고, 3년후 병조좌랑을 거
쳐 1573년(선조 6) 정언, 1581년(선조 14) 충청도 관찰사에 올랐다. 1589년(선조
22) 창성부사가 되고, 1592년 임진왜란때 원주목사로 왜장 森吉成(삼길성)의 군사
가 쳐들어오자 관. 의병을 이끌고 싸우다가 전사하였으며, 이어 아들 김시백과 부
인 이씨도 순절했다. 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원주의 忠烈祠(충렬사)와 花巖書
院암(화암서원)에 제향되었으며, 諡號(시호)는 文肅(문숙)이다. 1966년 강원도 애
국유족부활위원회에 의해 원주역 광장에 그의 충렬탑이 세워졌다. 그의 묘소는
중원군 앙성면 발천리에 있다가 1989년 3월에 능촌리로 옮겼다.
(문헌 : 명종. 선조실록, 조선금석총람, 괴산군지)
66. 金時獻(김시헌 1560∼1613)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子徵(자징) 호는 艾軒(애헌), 김제갑의 아들이다.
1588년(선조 21) 식년문과에 급제하고 검열. 사간. 전한. 정언. 사인 겸 보덕. 집의
등을 역임하고 1597년 동부승지. 우부승지. 충청도 관찰사를 거쳐 대사성에 올랐
다. 그후 대사간. 병조참의. 우승지. 좌승지 등을 역임 1602년(선조 35) 召募官(소
모관)으로 경상도에 갔다가 유생들로부터 호색하다고 탄핵을 받고 오위 부사직으
로 좌천되었다. 그후 復讐使(복수사)와 종사관으로 신립이 전사한 탄금대를 돌아
보고 임진왜란 후의 민심을 순무하고 城柵(성책)의 수축을 명했으며, 이듬해 동지
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04년 순천군수, 다음해 병조참의, 이어 좌승지, 1607
년(선조 40) 양양부사. 병조참판을 역임했다. 선조가 죽은 후 동지춘추관사로
「선조실록」의 편찬에 참여, 1611년(광해군 3) 예조참판을 거쳐 도승지에 올랐
다. 역학에 밝았다. 묘소는 중원군 앙성면 영죽리에 있다.
(문헌 : 선조실록, 괴산군지)
68. 金仁甲(김인갑 1534∼1594)
---자는 善初(선초) 진사 김석의 다섯째 아들이며 毅齋(의재) 金悌甲(김제갑)의
아우이다. 1568년(선조 1) 진사를 거쳐 1578년(선조 11) 장영도 찰방이 되었고 영
산. 비안현감을 역임하였으며 좌찬성에 추증되었다.(문헌 : 괴산군지)
97. 金時若(김시약 1564∼1627)
---조선조 丁卯胡亂(정묘호란) 때의 節臣(절신)으로 자는 箕吾(기오), 비안현감
김인갑의 아들이며 충무공 김시민의 종제이다. 서애 유성룡의 천거로 훈련원 첨
정, 만호, 첨사 등을 역임하다가 1596년(선조 29)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괴산 선봉
장으로 倡義兵(창의병)을 이끌고 왜적과 싸웠는데 관찰사의 천거를 받아 별장이
되었다. 정유왜란이 일어나자 관병과 의병을 이끌고 창원. 옥천에서 왜군 24명을
죽였다. 그뒤 통영군관을 거쳐 창성부 첨절제사가 되었고, 1627년(인조 5) 정묘호
란에 창성이 함락되고 그의 두 아들과 함께 적의 포로가 되어 피살되었다. 병조
참판에 추증되었고 1683년(숙종 9) 旌門(정문)이 세워졌다.
(문헌 : 선조. 인조실록, 괴산군지)
108. 金 緻(김 치 1577∼1625, 註 : 緻는 오기되어 있는 바 바로 잡아 표기함)
---조선조의 문신으로 자는 士精(사정), 호는 南峯(남봉). 深谷(심곡), 본관은 안
동이며 충무공 김시민의 아들이다. 1597년(선조 30)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設書(설
서)를 거쳐 1608년 사가독서를 했다. 광해군 때 司僕寺正(사복시정). 이조참의. 동
부승지. 대사간을 거쳐 병조참지에 올랐으나 독직사건으로 파면되었다. 인조반정
후 대북사건으로 몰려 유배되었다가 동래부사를 거쳐 1625년(인조 3) 경상도 관
찰사가 되었다. 이조참판에 증직되고 安興君(안흥군)에 봉해졌다. 저서로 「深谷
秘訣(심곡비결)」이 있다. (문헌 : 광해군일기, 인조실록, 괴산군지)
114. 金時讓(김시양 1581∼1643)
---조선시대 문신으로 初名(초명)은 時言(시언), 자는 子中(자중), 호는 荷潭(하
담), 본관은 안동, 비안현감 김인갑의 아들이다. 1605년(선조 38) 정시문과에 급제
하여 삼사. 세자시강원을 거쳐 이조랑을 지내고, 1611년(광해군 3) 전라도 도사가
되어 향시를 주관할 때 詩題(시제)에 왕의 실정을 비유한 문제를 출제했다는 이
유로 종성에 유배되었다가 1616년 영해로 移配(이배)되었다. 1623년 仁祖反正(인
조반정)으로 풀려 예조좌랑. 병조정랑. 수찬을 거쳐 교리로 있을 때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도체찰사 이원익의 종사관으로 출전했고 응교를 거쳐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가 정묘호란 후 평안도 관찰사를 거쳐 1731년(註 : 1631년의 오기) 병조판
서에 오르고 8도 도원수. 4도 체찰사 등을 하면서 斥和(척화)를 주장했다.
---그후 강화유수. 호조판서. 병조판서. 4도의 관찰사를 역임 지중추부사를 거쳐
1641년 「선조실록」을 개수할 때 판중추부사 겸 판춘추관사로 이에 참여했으나
맹인이 되어 사직하고 충주로 내려가 있다가 병사했다. 典籍(전적)과 經史(경사)
에 밝았으며 인조때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시호는 忠翼(충익), 회령의 향사에 제
향되었다.
--저서로는「荷潭破寂錄(하담파적록)」「荷潭集(하담집)」「 溪記聞(부계기문)」
이 있다. 묘는 괴산읍 능촌리 방아재에 있으며 1670년(현종 11)에 대제학 趙絅(조
경)이 짓고, 한성부 우윤 李正英(이정영)이 쓴 신도비를 세웠다.
(문헌 : 인조실록, 국조명신록, 괴산군지)
125. 金 絅(김 경 1599∼1675)
---본관은 안동, 龜岩(구암) 金忠甲(김충갑)의 손자로 문과에 급제하여 翰林(한
림)을 지냈다.(문헌 : 괴산군지)
127. 金壽翼(김수익 1600∼1673)
---조선조의 문신으로 자는 星老(성노), 호는 靑岳(청악), 본관은 안동, 현령 金光
(김광위)의 아들이다. 1624년(인조 2) 사마시에 합격하여 참봉이 되고, 1630년
별시문과에 합격하여 전적. 예조랑. 지제교를 지내다가 1636년 병자호란 때 남한
산성에 왕을 扈從(호종)하고 치욕적인 화의가 성립된 후 斥和論者(척화론자)로서
스스로 근신하다가 1640년 괴산군수. 응교. 의주부윤. 병조참의 이듬해 제주목사
로 부임되었으나 탐관오리로 탄핵받아 영남에 유배되어 1658년(효종 9)에 放還
(방환)되어 여주목사를 지냈다. 시호는 忠景(충경)이고 저서로 「靑岳集(청악집)」
이 있다.(문헌 : 인조. 효종실록, 국조인물고, 괴산군지)
129. 金得臣(김득신 1604∼1684)
---조선조의 시인. 문신으로 자는 子公(자공), 호는 栢谷(백곡), 龜石山人(구석산
인), 본관은 안동이고, 진주목사 김시민의 손자이며, 부제학 김치의 아들이다.
---1642년(인조 20) 진사가 되고 蔭補(음보)로 참봉이 되었다. 1662년(현종 3) 증
광문과에 급제하여 정. 지제교 등을 거쳐 嘉善大夫(가선대부)에 이르고 安豊君(안
풍군)에 봉해지고 숙종조에 청백리에 올랐다. 그러나 장차 사화가 있을 것을 예견
하여 벼슬을 버리고 괴산읍 능촌리에 있는 槐安壹(괴안일, 현재의 醉默堂(취묵
당))에 내려와 은거하였다. 史記(사기)의 伯夷傳(백이전)을 1억 1만 3천번을 읽고
그의 서재 이름을 億萬齋(억만재)라 하였으나, 뛰어난 문장이 세상에 알려지고 효
종은 그의 龍湖漢江詩(용호한강시)를 보고 감탄하였다고 한다.
저서로「栢谷집(백곡집)」「終南叢志(종남총지)」가 있다. 묘소는 증평읍 율리에
있다.(문헌 : 현종. 숙종실록, 국조인물고, 괴산군지)
131. 金 徽(김 휘 1607∼1677)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敦美(돈미), 호는 四休亭(사휴정). 晩隱(만은). 본관은
안동이고, 하담 김시양의 아들이다.
---1642년(인조 20)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봉교가 되고 1646년 愍懷嬪(민회빈)이
억울하게 사사되자 그 배후를 규명하라고 상소했다가 파직되었다. 1649년(효종
즉위) 부수찬에 기용, 이조정랑. 사간. 도승지. 경상도 관찰사 등을 역임 1666년
(현종 7) 남인의 탄핵으로 삭직 당했고 1668년 형조참판이 되고, 대사헌을 거쳐
1675년(숙종 1) 이조판서를 지내고 이듬해 예조판서가 되었다. 그림을 잘 그렸다.
(문헌 : 근역서화징. 괴산군지)
135. 金世達(김세달 1625∼1674)
---자는 士章(사장), 본관은 안동으로 고려 충신 안렴사 金士廉(김사렴)의 11세손
이며 괴산군 청천면 무능리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 그의 재종숙인 성천부사 김언의 임소 책방에서 글을 배우고 있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난 다음해인 1637년 호병이 평안도의 요충인 성천고을을 침공하
자 부사 김언이 관병을 단속하여 경골, 창암산성을 수호하는 한편 의병을 널리모
아 적의 대병과 혈전을 거듭하다가 전세가 급박하여 전황과 적세를 자세히 기록
한 장계를 조정에 올리고저 할 때 적의 포위망을 탈출할 가능성 있는 소년인 공
에게 전계할 것을 명하는 한편 어린 재종질로 하여금 무사 귀향토록 조처했다.
공은 급히 행장을 수습하여 산중으로 도망하여 장계서찰을 작은 칼로 썰어서 순
서대로 심지를 꼬아 행장질 끈을 만들어 지고 죽기를 한하고 주야 배도하여 서울
로 치달아 올라갔다. 경사에 이른 공은 행장 끈을 풀어 연폭하니 내용이 소상하
여 이를 조정에 올리니 왕이 들으시고 기특히 여겨 인견하고 성장후 관직에 녹용
토록 윤음을 내렸다. 병자호란이후 사색당쟁으로 나라가 혼란하여 벼슬에 뜻이
없어 고향에 은거하며 후학지도에 여생을 바쳤다. 사후에 예조판서 운봉 강백년
이 연주하여 공조판서에 증직되고 묘는 청천면 고성리에 있다.
(문헌 : 현종실록)
150. 金可行(김가행 1654∼1731)
---자는 敬夫(경부), 본관은 안동으로 백곡 김득신의 손자이며 金天揆(김천규)의
아들이다.
---1711년(숙종 37)에 연천현감이 되어 청렴하게 善治(선치)하니 관찰사가 啓
(포계)하고 읍민이 생사당을 세워 칭송하였으며, 1728년(영조 4) 종묘서 령으로
종군하여 양무 1등훈에 녹선되었다. 그의 영정은 괴산읍 능촌리 영정각에 봉안되
어 있다.(문헌 : 괴산군지)
155. 金 素(김 소 16세기 중엽)
---본관은 안동, 비안현감 김인갑의 후손으로 괴산군 사리면 사담리 하도에서 태
어났다.
---1648년(인조 29)에 문과에 급제하여 충청관찰사와 여러 도의 관찰사를 지냈으
며 선정을 베풀었다. 묘는 괴산군 사리면 보광산에 있다.(문헌 : 괴산군지)
158. 金龜錫(김구석 1684∼1774)
---자는 聖應(성응), 호는 樂樂窩(낙낙와) 본관은 안동으로 괴산군 증평읍 남하리
에서 출생했다. 1725년(영조 1)에 진사가 되었으며 1728년 양치도가 난을 일으키
자 창의하여 討賊(토적)하였는데 오히려 賊臣(적신)의 무고를 입어 어전에서 국문
을 받게 되었으나 그의 이치가 정연하고 언사가 명백하므로 왕이 잘못이 없음을
特宥(특유)하고 恩顧(은고)를 내렸다. 이조판서가 그를 가르켜 이사람이 진실로
響曲(향곡)의 사대부라 하고 찬탄하여 기용코자 하였으나 년로함으로 사양하고
고향으로 퇴휴하였다. 죽은 후 통훈대부 군자감정에 증직되었다.(문헌 : 괴산군지)
178. 金圭年(김규년 1812∼1884)
---자는 禎瑞(정서), 본관 안동, 진사 우갑의 10세손이다. 고종조에 진사하였으나
영달에 뜻을 두지 아니하고 문사들과 교우함으로써 평생을 지냈다.
(문헌 : 괴산군지)
180. 金泰熙(김태희 1816∼1898)
---자는 聖友(성우), 본관은 안동으로 충렬공 방경의 후손이다. 1852년(철종 3)에
무과에 급제하여 첨사. 공주영장을 역임하였다. 그의 네 아들 모두 무신이었으니,
장남 용원은 1880년(고종 17) 증광무과에 급제하여 사천현감이 되었고 2남 필원
은 1882년(고종 19) 무과에 급제하여 오위장이 되었으며, 3난 응원은 1881년(고종
18)에 4남 종원은 1882년(고종 19)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옛날 어느 도승이 서면(사리면) 보평은 김영장의 세거지가 되리라 예언하였다
는 전설이 그대로 부합하였다. 묘는 괴산군 청안면 장암리에 있다.
(문헌 : 괴산군지)
195. 金相一(김상일 1852∼1935)
---자는 景明(경명), 호는 ()山(()산). 金鳳山人본(금봉산인), 본관은 안동으로 진
사 김규년의 손자이다. 울진. 용궁. 예천. 함평. 청풍 등 여러 고을 군수를 역임하
여 선정을 베풀었고 벼슬이 가선대부에 이르렀다. 괴산군 용관읍 남쪽에 선정비
가 세워졌고 괴산군 소수면 수리에도 송덕비가 세워졌다.(문헌 : 괴산군지)
197. 金恒默(김항묵 1860∼1937)
---초명은 龍浩(용호), 자는 應王(응왕), 호는 石淵(석연) 안동 진사 김우갑의 11
세손이며, 영년의 아우이다.筮仕(서사)로 고종황제의 심임을 받아 벼슬이 가선대
부 시종원 부경(참판)에 이르렀다. 당시 일제 의 침략으로 국운이 점차 쇠퇴함을
울분강계하여 벼슬을 버리고 괴산군 칠성면 성산에 우거하면서 유명한 선비들과
시문으로 자적하였다. 그가 살던 집은 현재 지방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다.
(문헌 : 조선상여승람)
198. 金東浩(김동호 1860∼1921)
---자는 振宗(진종), 호는 荷一(하일), 본관은 안동이며 진사 김우갑의 11세손이
며 김영년의 아들이다. 蔭仕(음사)로 벼슬이 비서원 비서감승에 이르렀다. 서장관
으로 민병석판서를 따라 청나라 북경에 들어가 고명한 서예가 翁方綱體(옹방강
체)를 배운바 있어 당대 명필가로 명성을 떨쳤고 현재 그의 유품이 많이 남아있
다.(문헌 : 조선상여승람)
220. 金泰鏞(김태용 1905∼1972)
---자는 韓雄(한웅), 호는 聾世(농세), 본관은 안동으로 안렴사 김사렴의 후손이
며 김용회의 아들이다. 천성이 너그럽고 기개가 강직하여 士友(사우)들의 경모를
받았으며 일찍이 개화에 눈을 떠 지역내에 후학들이 교육할 없어 자라나는 학동
들이 배우지 못하고 있는 점을 묵과할 수 없어 사리면 이곡리에 사는 이태호씨를
찾아 논의하고 사재 1백석지기를 희사하여 이태호씨가 희사한 대지 1,220평 위에
3개의 교실을 신축하여 학교를 세웠다. 육영사업에도 공헌했으며, 그는 종사랑전
위참봉으로 괴산향교 전교를 지냈다. 그의 덕행과 인망은 유림인들의 추앙을 받
았다. 후에 화곡국민학교 동창생 일동과 지방유지들이 그의 덕을 기리기 위하여
송덕비를 학교앞에 세웠다.(문헌 : 송덕비문)
221. 金在喆(김재철 1907∼1933)
---김재철은 본관은 안동. 호는 蘆汀(노정)으로 1907년 괴산군 청안면에 출생하
여 경성제일고보를 거쳐 1931년 경성제국대학 문학과를 졸업하고 평양사범대학에
서 교편을 잡고 있다가 1933년 사망했다. 그의 학문적 업적으로는 국어학분야로
"palatalization에 대하여"와 "조선어화의 조선어"라는 논문과 국문학분야로 "조선
연극사"와 "노정잡고"라는 저서가 있는데 이 중 "조선연극사"는 이 방면의 고전
으로 꼽히고 있다.
(문헌 : 김태준, "노정 김재철선생 소전", 서울대학교 동아문화연구소, 국어국문학사전)
pp 1077. 제2장 독립유공자.
25. 金相翊(김상익 1852∼1933)
---본관은 안동으로 괴산군 소수면 수리에서 출생하였으며 고종조 의금부도사를
역임하였다. 1910년 경술 한일합방으로 망국의 울분을 참지 못하고 현직을 버리
고 일가족을 이끌고 경상북도 상주군 화북면 용화리 늘티 장바위로 낙향하였다.
---당시 이곳 일대가 항일의병 양병의 본거지로 총책을 맡은 한봉수 의병대장과
손잡고 슬하에 장남 세응, 차남 한응, 3남 정응, 4난 성응, 5남 낙응 등 5형제와
온 가족이 피복제조 세탁과 무기제작 수리 그리고 고향인 수리에 추수해 놓은 수
백석의 양곡을 陸 (육태)로 운반하여 군량으로 보급하고 밤에는 독립운동 낮에
는 왜병과 拉奪(납탈) 등 갖은 고초를 당하면서 수백석지기 재산을 소진하고 고
향에 돌아와 호구지책에 급급하면서도 여생을 후회없이 마쳤다. 1945년 8월15일
해방후 4남 성응이 독립유공자의 유족이며 독립유공자라하여 충청북도 초대 내무
부장에 취임한 바 있으며 6.25동란때 이로 인하여 납치되어 피살당하였다.
(문헌 : 공적비문)
26. 金鏞應(김용응 1870∼1945)
---본관은 안동이며 괴산군 소수면 수리에서 출생하였고 章陵參奉(장릉참봉)을
지냈다. 1910년 경술 한일합방으로 國破君亡(국파군망)하니 분연히 독립운동에 가
담하여 상해임시정부와 긴밀한 연락하에 국내에서 군자금조달에 활약하다가 왜경
에 체포되어 광주형무소에서 6개월간 복역한 사실이 있으며 8.15 광복후에 이승
만박사가 반민특위위원장에 추천하여 취임케 하려 하였으나 마침 병환으로 취임
치 못하고 그의 손이 중죄를 범하였으나, 조부의 독립운동을 한 공로로 인하여
이승만대통령의 특별 배려로 감형의 혜택을 받은 사실이 있다.
(문헌 : 문중세진록)
▣ 김항용 - 감사합니다.
▣ 김태서 - 자료 감사드립니다.
▣ 김영환 -
▣ 김발용 - 감사합니다
▣ 김재익 -
▣ 김주회 - 감사합니다.
▣ 김은회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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