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군지순례7(음성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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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만 작성일02-05-25 09:12 조회1,768회 댓글0건본문
음성군지(음성군지편찬위원회, 1996)
pp 1281. 徐廷禹(서정우) 가옥
--음성군 감곡면 영산리
--중요민속자료 제143호로 음성군 감곡면 영산리에 있다. 건축년대는 19세기 후
반으로 추측되며, 1924년에 보수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전체적으로 "□"자 모양의
구성이지만 원래의 사랑채는 "一"자 집이었으며, 북쪽으로 대문간을 잇달아 연결
해서 곱은자 집으로 만들었다. 기타 헛간채는 근래에 지어진 임시 건물이다. 안채
는 중부방식으로 부엌, 안방, 웃방을 배열하고 꺾어져서 2칸대청, 건너방을 두었
다. 건너방의 아궁이는 동쪽머리퇴에 두고 앞의 툇마루는 평으로 하였다. 특이한
것은 부엌위에 만들어진 合閣(합각)으로 연기가 빠질 수 있도록 까치구멍으로 했
다. 사랑채는 사랑방을 내세우고, 대문간은 뒤의 측면으로 냈는데 이는 우리나라
공간 구성의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전체적으로 민가 건축의 소박한 맛을 지니고
있다. 군수를 역임한 이필영이 거주하였고, 서정우 부친이 매입하여 현재에 이르
고 있다.《1992년 충천북도지(하)》
《옮기는이 註 : 2002년 3월20일 안동김씨 문온공파 음성공 후손종회 재희 회장
님 명의의 서신중 하단에 "상촌이 안동김씨의 세거지가 된 유래 등 몇가지 유래
를 인쇄하여 동봉합니다.(향토사 연구 자료입니다)"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공
산정(영산2리)의 와가 유래"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공산정에 古瓦家(고와가)는 서
정우 가옥 한 채이므로 앞으로 후손들의 연구과제로 삼고자 음성군지 기록과 함
께 이 서신의 내용을 기록으로 남깁니다.
"安東金氏(안동김씨) 震綱公(진강공 : 초대 음성현감)의 7대손인 鼎仁公(정인공)이
건립한 瓦家(와가)로서 정인공은 영조 48년(1772)에 상촌에서 태어나 74세에 卒
(졸)하였으며 과거에 급제하고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후학들의 교육과 농업에 종
사하며 巨富(거부)를 이루어 현지에 현 와가를 건축하고 24년간 거주하였으며 인
근에서 후덕한 인사로 소문이 자자하였다 함. 바라건데 이 와가를 감곡면 문화재
로 영구보존토록 하기를 소망함.
☞ 이 서신의 작성자께서는 서정우 가옥이 중요민속자료 제143호로 지정되었음을
---아직 모르고 계셨던 듯하며, 정인공은 재희 회장님의 5대조이십니다.
pp.1293∼1296
--金震綱墓(김진강묘) : 음성군 감곡면 상평리 상촌, 任坐(임좌), 안동인, 관은 사
헌부 감찰.
--金始慶墓(김시경묘) : 음성군 감곡면 상평리 송정동, 任坐(임좌), 안동인, 호는
晩隱(만은), 관은 우승지.
--金相翊墓(김상익묘) : 음성군 원남면 덕정리 마편곡, 子坐(자좌), 안동인, 광무
6년 정3품 통정대부가자.
pp.1460 민속. 구비전승.《말만도 못한 계집》
--북쪽 오랑캐인 청나라가 쳐들어온게 병자호란인데 이때 의주부윤으로 있던 임
경업은 적과 싸워 크게 승리하였다. 병자호란의 결과로 조선왕조는 청나라에 대
하여 굴복하였거나와 그 싸움속에서 유일의 승리는 임경업이 거둔 것이었다.
--후에 임경업은 명나라로 망명하여 청나라를 공격하는 일에 앞장을 섰었다. 하
나 명나라가 청나라에게 패하자 임경업은 포로가 되었으며, 조선왕조는 청나라에
굴복한 터라 임경업은 송환을 받아 문초를 하게 되었다. 이 문초 도중에 임경업
은 옥중에서 피살되었으니 당시의 권신인 김자점의 농간에 의한 것이었다
--임경업이 타고 다니던 말은 몰수되어 사복시에 소속되어 있었다. 임경업이 피
살된 날 사복시에서 말을 돌보던 자가 무심히 말했다. "네 주인이던 임경업 어른
은 돌아가셨다." 말은 그 소리를 알아들었던지 먹이를 먹지 않고 크게 세 번 부
르짖더니 쓰러져 죽었다. 직접적으로도 임경업을 죽게 한 자인 김자점은 인물이
음흉하고 간사한 일이 많았었다. 드디어는 반역죄로 처형되었거니와 김자점이 임
경업을 죽이려고 마음먹은 까닭은 이러하였다고 한다.
--즉 임경업은 평소에 자기들과 나라의 앞날을 이야기하다가는 곧잘 "김자점같은
흉물은 나라에 해독만 끼치는 자이니 마땅히 처단되어야 하오."라고 하였었다. 임
경업을 모시고 있던 기생첩은 이러한 말을 자주 들었었다.
--그후 임경업이 명나라로 망명을 간 뒤에 이 기생첩은 김자점의 차지가 되었다.
김자점은 평소에 임경업의 첩이 자색이 있어 쓸만하다고 여겼기에 수단을 가리지
않았던 것이다. 한데 기생첩은 김자점의 소유가 되자 지난날 임경업에게서 듣던
말을 일일이 고자질하여 음흉한 김자점으로 하여금 임경업을 죽이게 까지 하였
다. 그러니 가히 사람 못된 것은 짐승만도 못하다 할 수 있겠다.
--임경업(1594∼1646)의 자는 英伯(영백), 호는 孤松(고송), 명장으로서 드높고 그
를 모신 사당도 여러곳 있다. 김자점은 감곡면 출생이다.
(江上問答(강상문답). 박용구선.〈韓國奇談逸話選(한국기담일화선)〉)
《옮기는이 註 : 김자점이 감곡면 출신이란 기록은 확인되지 않은 내용으로서
--사실이 아닐 것으로 판단됩니다.》
pp 1569. 金震綱(김진강 1523(중종 18)∼1581(선조 14))
--조선 전기의 문신이며, 자는 肅卿(숙경)이고 본관은 安東(안동)이다. 초시에 급
제하여 進士(진사)가 되고 1563년(명종 18) 음성현감을 지내고 뒤에 사헌부 감찰
을 지냈다. 묘는 감곡면 상평리 상촌에 있다. 이후 안동김씨가 음성에서 世居(세
거)한 중시조이다.(문헌 : 음성군지)
pp 1594. 金始慶(김시경 1659(효종 )∼ ? )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斗瑞자(두서)의 아들이다. 자는 善餘(선여)이고, 호는 晩
隱(만은)이라 했으며, 본관은 안동이다. 음성군 감곡면 상평리에 살았다. 1682년
(숙종 8)에 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이해 식년 문과 을과로 급제하고 8곳의
군현의 원을 지냈다. 그 후 내직으로 옮겨 우승지 겸 춘추관편수관 지제교에 이
르렀다. 저서로는 《晩隱集(만은집)》이 있다. 묘는 음성군 감곡면 상평리 송정동
에 있다. (문헌 : 국조방목, 음성군지)
pp 1669. 안동김씨
--始祖(시조) 宣平(선평)의 18대손 (혜)가 음성읍 사정리에 래주하고 세거하다.
--又(우) 일파 현감 震綱(진강)이 감곡면 상평리에 래주하고 세거하다.
--又(우) 일파 금부도사 旿(오)가 원남면 보천리 매봉재에 래주하고 세거하다.
《옮기는이 註 : 또 일파 현감 진강이 감곡면 상평리에 래주 세거하다는 기록으
로 문온공파 음성공 후손이 마치 후안동 일파로 오해될 소지가 있어 군지 담당공
무원에게 이를 정정하여 줄 것을 요구하고 사과를 받았습니다.》
pp 1853. 문화유적.
--自點洑(자점보) : 토둔 서쪽에 있는 洑(보). 조선 인조때 역적 김자점이 장호원
백족산에 아버지의 묘를 썼는데 묘자리가 飛龍上天形(비룡상천형)이라 용이 登天
(등천)하려면 물이 있어야 한다고 하여 이 보를 막았다는 전설이 있다.
▣ 김주회 - 귀한 내용과 자료, 정성스런 활자화! 고맙습니다.
▣ 김태서 - 자료 감사드립니다.
▣ 김재익 -
▣ 김항용 -
▣ 김발용 -
▣ 김영환 -
▣ 김정중 - 시간내서 한번 가겠습니다
▣ 김은회 -
pp 1281. 徐廷禹(서정우) 가옥
--음성군 감곡면 영산리
--중요민속자료 제143호로 음성군 감곡면 영산리에 있다. 건축년대는 19세기 후
반으로 추측되며, 1924년에 보수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전체적으로 "□"자 모양의
구성이지만 원래의 사랑채는 "一"자 집이었으며, 북쪽으로 대문간을 잇달아 연결
해서 곱은자 집으로 만들었다. 기타 헛간채는 근래에 지어진 임시 건물이다. 안채
는 중부방식으로 부엌, 안방, 웃방을 배열하고 꺾어져서 2칸대청, 건너방을 두었
다. 건너방의 아궁이는 동쪽머리퇴에 두고 앞의 툇마루는 평으로 하였다. 특이한
것은 부엌위에 만들어진 合閣(합각)으로 연기가 빠질 수 있도록 까치구멍으로 했
다. 사랑채는 사랑방을 내세우고, 대문간은 뒤의 측면으로 냈는데 이는 우리나라
공간 구성의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전체적으로 민가 건축의 소박한 맛을 지니고
있다. 군수를 역임한 이필영이 거주하였고, 서정우 부친이 매입하여 현재에 이르
고 있다.《1992년 충천북도지(하)》
《옮기는이 註 : 2002년 3월20일 안동김씨 문온공파 음성공 후손종회 재희 회장
님 명의의 서신중 하단에 "상촌이 안동김씨의 세거지가 된 유래 등 몇가지 유래
를 인쇄하여 동봉합니다.(향토사 연구 자료입니다)"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공
산정(영산2리)의 와가 유래"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공산정에 古瓦家(고와가)는 서
정우 가옥 한 채이므로 앞으로 후손들의 연구과제로 삼고자 음성군지 기록과 함
께 이 서신의 내용을 기록으로 남깁니다.
"安東金氏(안동김씨) 震綱公(진강공 : 초대 음성현감)의 7대손인 鼎仁公(정인공)이
건립한 瓦家(와가)로서 정인공은 영조 48년(1772)에 상촌에서 태어나 74세에 卒
(졸)하였으며 과거에 급제하고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후학들의 교육과 농업에 종
사하며 巨富(거부)를 이루어 현지에 현 와가를 건축하고 24년간 거주하였으며 인
근에서 후덕한 인사로 소문이 자자하였다 함. 바라건데 이 와가를 감곡면 문화재
로 영구보존토록 하기를 소망함.
☞ 이 서신의 작성자께서는 서정우 가옥이 중요민속자료 제143호로 지정되었음을
---아직 모르고 계셨던 듯하며, 정인공은 재희 회장님의 5대조이십니다.
pp.1293∼1296
--金震綱墓(김진강묘) : 음성군 감곡면 상평리 상촌, 任坐(임좌), 안동인, 관은 사
헌부 감찰.
--金始慶墓(김시경묘) : 음성군 감곡면 상평리 송정동, 任坐(임좌), 안동인, 호는
晩隱(만은), 관은 우승지.
--金相翊墓(김상익묘) : 음성군 원남면 덕정리 마편곡, 子坐(자좌), 안동인, 광무
6년 정3품 통정대부가자.
pp.1460 민속. 구비전승.《말만도 못한 계집》
--북쪽 오랑캐인 청나라가 쳐들어온게 병자호란인데 이때 의주부윤으로 있던 임
경업은 적과 싸워 크게 승리하였다. 병자호란의 결과로 조선왕조는 청나라에 대
하여 굴복하였거나와 그 싸움속에서 유일의 승리는 임경업이 거둔 것이었다.
--후에 임경업은 명나라로 망명하여 청나라를 공격하는 일에 앞장을 섰었다. 하
나 명나라가 청나라에게 패하자 임경업은 포로가 되었으며, 조선왕조는 청나라에
굴복한 터라 임경업은 송환을 받아 문초를 하게 되었다. 이 문초 도중에 임경업
은 옥중에서 피살되었으니 당시의 권신인 김자점의 농간에 의한 것이었다
--임경업이 타고 다니던 말은 몰수되어 사복시에 소속되어 있었다. 임경업이 피
살된 날 사복시에서 말을 돌보던 자가 무심히 말했다. "네 주인이던 임경업 어른
은 돌아가셨다." 말은 그 소리를 알아들었던지 먹이를 먹지 않고 크게 세 번 부
르짖더니 쓰러져 죽었다. 직접적으로도 임경업을 죽게 한 자인 김자점은 인물이
음흉하고 간사한 일이 많았었다. 드디어는 반역죄로 처형되었거니와 김자점이 임
경업을 죽이려고 마음먹은 까닭은 이러하였다고 한다.
--즉 임경업은 평소에 자기들과 나라의 앞날을 이야기하다가는 곧잘 "김자점같은
흉물은 나라에 해독만 끼치는 자이니 마땅히 처단되어야 하오."라고 하였었다. 임
경업을 모시고 있던 기생첩은 이러한 말을 자주 들었었다.
--그후 임경업이 명나라로 망명을 간 뒤에 이 기생첩은 김자점의 차지가 되었다.
김자점은 평소에 임경업의 첩이 자색이 있어 쓸만하다고 여겼기에 수단을 가리지
않았던 것이다. 한데 기생첩은 김자점의 소유가 되자 지난날 임경업에게서 듣던
말을 일일이 고자질하여 음흉한 김자점으로 하여금 임경업을 죽이게 까지 하였
다. 그러니 가히 사람 못된 것은 짐승만도 못하다 할 수 있겠다.
--임경업(1594∼1646)의 자는 英伯(영백), 호는 孤松(고송), 명장으로서 드높고 그
를 모신 사당도 여러곳 있다. 김자점은 감곡면 출생이다.
(江上問答(강상문답). 박용구선.〈韓國奇談逸話選(한국기담일화선)〉)
《옮기는이 註 : 김자점이 감곡면 출신이란 기록은 확인되지 않은 내용으로서
--사실이 아닐 것으로 판단됩니다.》
pp 1569. 金震綱(김진강 1523(중종 18)∼1581(선조 14))
--조선 전기의 문신이며, 자는 肅卿(숙경)이고 본관은 安東(안동)이다. 초시에 급
제하여 進士(진사)가 되고 1563년(명종 18) 음성현감을 지내고 뒤에 사헌부 감찰
을 지냈다. 묘는 감곡면 상평리 상촌에 있다. 이후 안동김씨가 음성에서 世居(세
거)한 중시조이다.(문헌 : 음성군지)
pp 1594. 金始慶(김시경 1659(효종 )∼ ? )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斗瑞자(두서)의 아들이다. 자는 善餘(선여)이고, 호는 晩
隱(만은)이라 했으며, 본관은 안동이다. 음성군 감곡면 상평리에 살았다. 1682년
(숙종 8)에 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이해 식년 문과 을과로 급제하고 8곳의
군현의 원을 지냈다. 그 후 내직으로 옮겨 우승지 겸 춘추관편수관 지제교에 이
르렀다. 저서로는 《晩隱集(만은집)》이 있다. 묘는 음성군 감곡면 상평리 송정동
에 있다. (문헌 : 국조방목, 음성군지)
pp 1669. 안동김씨
--始祖(시조) 宣平(선평)의 18대손 (혜)가 음성읍 사정리에 래주하고 세거하다.
--又(우) 일파 현감 震綱(진강)이 감곡면 상평리에 래주하고 세거하다.
--又(우) 일파 금부도사 旿(오)가 원남면 보천리 매봉재에 래주하고 세거하다.
《옮기는이 註 : 또 일파 현감 진강이 감곡면 상평리에 래주 세거하다는 기록으
로 문온공파 음성공 후손이 마치 후안동 일파로 오해될 소지가 있어 군지 담당공
무원에게 이를 정정하여 줄 것을 요구하고 사과를 받았습니다.》
pp 1853. 문화유적.
--自點洑(자점보) : 토둔 서쪽에 있는 洑(보). 조선 인조때 역적 김자점이 장호원
백족산에 아버지의 묘를 썼는데 묘자리가 飛龍上天形(비룡상천형)이라 용이 登天
(등천)하려면 물이 있어야 한다고 하여 이 보를 막았다는 전설이 있다.
▣ 김주회 - 귀한 내용과 자료, 정성스런 활자화! 고맙습니다.
▣ 김태서 - 자료 감사드립니다.
▣ 김재익 -
▣ 김항용 -
▣ 김발용 -
▣ 김영환 -
▣ 김정중 - 시간내서 한번 가겠습니다
▣ 김은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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