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과 우리가문 04-1 (金時若김시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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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2-05-25 16:40 조회2,091회 댓글0건본문
임진왜란과 우리가문 04-1 (金時若김시약)
제학공파 : 김익달-김고-김맹렴-김철균-김수형-김언묵-김석-김충갑-★3남김시민, ★6남김시약
▣ 충효로 생을 마친 의병장 김시약 (2000, 추모사업 준비위원회)
⊙ 괴산 의병의 선봉장 김시약 연보--- 글쓴이 이봉선
○ 金時若 (1554-1628)의 자는 巽吾(손오)이며 아호는 琴軒(금헌)으로 시호는 忠肅公으로 의주부윤과 창성부사를 지냄
--- 1564년(명종19년) 4월 18일 황해도 안악군수를 지낸 金忠甲의 庶子임
--- 출생지 : 충북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로 추정
--- 후손들이 만든 사적에는 출생지를 괴산군 청천면 대전이라 하였으나 가장 바른 기록으로 남아있는 김시약사후 김정원이 만든 행장에 출생지에 대한 언급이 없음 (김정원은 정묘호란때 김시약을 따라 종군한 김대곤의 아들임)
--- 출생지는 아닐지 몰라도 살던 곳은 덕평이 분명함. 문집을 남기지 않은 옛 사람들은 출생지를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임
○ 고려 충렬왕조의 명장으로 일본을 공략한 최초의 인물인 金方慶의 12대손이며 구안동김씨 제학공파의 金錫의 손자이며 金忠甲의 아들로 金時敏의 서제임
--- 金忠甲은 아들을 6형제나 두었는데 金時若이 서자로 6번째 아들로 형인 金時敏을 많이 닮아 충무공 김시민이 매우 사랑했다고 함
● 1592년 10월 임진왜란 3대첩인 진주성전투에 형인 충무공 김시민을 따라 종군
--- 김시약이 29세 되던 해로 형을 도와 전공을 세우고 형이 사망하자 군대를 지휘함 (행장의 기록)
--- 조선왕조실록에는 곤양군수 이광악이 지휘한 것으로 되어 있으며, 형이 죽자 이광악 장군을 도와 진주성 싸움을 마무리한 것으로 보임 (이광악 장군의 묘소는 괴산군 불정면 삼방리 연지마을에 있음)
● 29세인 1592년 형이 진주에서 왜적의 유탄에 사망하자 김시민의 시신을 모시고 고향인 괴산으로 돌아와 괴산에 장사를 지냄
--- 김시민의 묘소는 당초에 김시약이 괴산에 장사를 지낸후 그후에 충주시 살미면으로 이장하였다가 충주댐이 건설되어 수몰되자 다시 괴산으로 이장함
● 33세인 선조29년 (1596년) 2월
--- 괴산의병의 선봉장이 되어 괴산군수 이봉의 군대와 괴산의 민초의병으로 구성된 의병의 선봉장이 됨
--- 진주에서 형인 김시민이 왜적에게 죽음을 당하고 원주에서는 김시민, 김시약 형제의 숙부인 김제갑이 부인 및 차남과 함께 순국하고, 고향인 괴산이 왜적에게 유린되자 울분을 이기지 못해 의병에 뛰어든 것으로 보임
--- 진주성 싸움에서 싸워 이긴 경험과 김시약의 용맹성으로 괴산의병의 선봉장이 된 것으로 보임
● 34세인 선조30년 (1597년) 9월
--- 충북의 옥천과 경남의 창원에서 왜적과 전투하여 왜적 24명의 목을 벤 공적을 세움
● 35세인 선조31년 (1598년) 4월
--- 김시약이 특이한 전공을 세워 선조임금이 조사해서 보고하도록 함
● 39세인 선조34년 (1601년) 12월
--- 부산의 동래에서 김시약이 의병을 모집함
○ 61세인 인조2년 (1624년) 종2품인 의주부윤이 됨
--- 신분상의 약점인 서자로서 올라갈 수 있는 최고의 품계인 종2품의 품계에 오름
○ 64세인 인조5년(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남
--- 후금의 군대가 침입하여 의주에서 이순신의 장조카인 의주부윤 이완을 살해함 (정묘호란의 첫 번째 장수로 희생자가 이완임)
--- 의주에서 이완을 살해한 후금의 군대가 역시 압록강변으로 김시약이 관할하던 창성으로 들이닥침
--- 격렬한 전투 끝에 두 아들인 장남 김긍 및 차자인 김규가 생포됨
--- 의주에 압송되어 후금이 항복을 권유하였으나 항복하지 않아 두 아들과 함께 온 몸이 찢기어 죽는 처참한 죽음을 당함
--- 이때에 종숙(5촌)인 김시약을 따라 종군한 종질 김대곤이 김시약의 9세된 3째아들 김통과 창성을 탈출하여 고향인 괴산으로 돌아옴
○ 아들인 김통과 장손자인 김득기가 고향이며 자손들이 사는 괴산군 청천면 덕평마을 앞산에 시신없이 초혼장의 장례를 지냄
○ 인조시대 : 4촌동생인 병조판서 김시양이 사도 순찰시에 의주에 도착하여 나라를 위해 죽어 의주의 압록강변에 아무렇게나 내버려 시신도 못 찾은 김시약의 만가를 지음
○ 김시약이 죽은지 63년후인 김시약을 따라 정묘호란을 종군한 종질인 김대곤의 아들로 재종손(6촌)인 진사 김정원이 김시약의 행장을 저술함 (숙종16년)
○ 숙종 22년에 고향이자 자손들이 살고 있는 괴산군 청천면 대전리 마을에 김시약의 충성과 두 아들의 효도를 기리는 충효3문을 세움
(충은 김시약을 말하고 효는 김시약을 따라 죽은 두 아들 김긍과 김규를 말하는 것으로 1충2효의 충효3문임)
⊙ 발간사 - 준비위원장 이춘우
공은 성은 金이요, 휘는 時若이요, 자는 巽吾(손오)요, 호는 琴軒(금헌)이다. 가계를 살펴보면 고려 충렬왕조에 金方慶(1212-1300)의 12대손으로 중중조에 괴산으로 낙향한 구안동김씨 제학공파의 金錫(1495-1534)의 손자이며, 안악군수를 지낸 구암 金忠甲(1515-1575)의 여섯 자제중 막내로 태어났다.
● 금헌 시약은 충무공 金時敏(1554-1592)의 庶弟(서제)이다. 비록 서제이긴 하나 충무공 시민 장군은 남달리 서제인 시약을 애지중지 아꼈으며, 모습이 골격이 자기를 닮아 더욱더 아꼈다.
● 따라서 그는 임진년(1592) 진주목사로 부임하면서 29세인 시약을 대동하였으며, 동년 10월 3만여명의 왜군을 맞아 시민장군 휘하에서 전 주민들과 함께 6일간의 전투에서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진주대첩을 이루었다.
● 그러나 애석하게도 형인 시민 장군이 시약을 대동 성을 순시중 시체 속에 숨어 있던 왜병의 발포로 총탄이 미간을 맞아 쓰러지며 급히 시약을 불러,
"너는 나를 대신하여 군중을 통솔하고 인심을 진정하라, 그리고 이 성을 보존하라" 하시고 순절하셨다. 그리고 형의 죽음을 발설치 않고 군대를 지휘 남은 왜적을 물리쳤다.
이때 왜적은 시민 장군의 순절함을 몰랐으니 두 형제의 외모가 얼마나 닮았는가를 짐작으로도 알 수 있다.
● 김시약은 순국한 형의 시신을 모시고 충주 살미면 무릉동에 장례를 모시고 와서 보니 원주에서 숙부인 金悌甲과 숙모 이씨, 사촌 金時伯이 순국한 것을 알았다.
● 이에 분개 선조29년(1596)에 의병을 이끌고 의병장으로 저 멀리 경상도 창원 옥포까지 왜적이 있는 곳이면 어디라도 찾아가 혁혁한 전과를 세웠다.
이로 인해 광해군 때에 암행어사 최기남의 장계로 관직을 수여토록 해 달라는 글월을 올렸고, 또 서애 유성룡의 천거로 인조반정후 동부승지를 제수받았으나 즉시 사양하였으며, 당시 북쪽 오랑캐 때문에 근심되어 선발된 명장 정충신, 임경업과 함께 선발된 명장 중의 명장이었다.
--- 후 략 ---
▣ 김윤만 - 임진왜란 당시 안동김씨 괴산문중의 활약상 주회 아우님이 주제를 삼아 연재할 만 하지요. 감사합니다.
▣ 김태서 - 자료 감사드립니다.
▣ 김재익 -
▣ 김항용 -
▣ 김영환 -
▣ 김은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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