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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군지순례8(진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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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만 작성일02-05-27 05:02 조회1,74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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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천군지(진천군지편찬위원회, 1994)





pp 1321. 4. 樓亭(루정) 息波亭(식파정)



--소재지 : 진천읍 건송리 775



--크기 : 전면 2간, 측면 2간 팔작집.



--시대 : 조선 효종 4년(1653) 창건, 고종 30년(1893) 중건.



--『息波亭詩文集(식파정시문집)』에 의하면 이 정자는 효종 4년(1653)에 陽城人



(양성인) 李得坤(이득곤)이 창건하고 그 호를 따라 식파정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栢谷(백곡) 金得臣이(김득신)이「식파정기」를 찬하였다. 고종 30년(1893) 그 후손



들에 의해 중건되고 韶山學人(소산학인) 閔瑾植이 「식파정중건기」를 쓰고 1954



년 다시 중수하였다. 최명길, 김득신, 송시열, 채지홍 등의 식파정 題詠(제영)이



전한다.



--이 정자는 원래 두건리 앞 냇가에 세워졌는데 지금은 진천의 백곡저수지 산정



에 자리잡고 있다. 건물구조는 목조와가로 전면 2간, 측면 2간, 팔작집이며 「息



波亭」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참고사항 : 식파정은 그 경관이 뛰어나 先賢(선현)들이 많은 시를 남겼다. 여기



에는 이득곤, 최명길, 채익선, 김득신, 송시열, 채지홍 등이 쓴 제영들을 소개한다.



이 시들은 『常山誌(상산지)』『鎭川郡誌(진천군지)』1974, 『내고장전통가꾸기』



(진천군,1982)에 실려 있다.





【息波亭(식파정)】백곡 김득신(pp1323 및 pp1368)



白雲深鎖處(백운심쇄처) : 흰 구름만이 깊이 스며 있는 이 고장에



高築逸民家(고축일민가) : 높다랗고 편안하게 지낼 집 마련했구려



赤梁今秋葉(적량금추엽) : 금년 가을에 나뭇잎은 빨갛게 물들었고



薰開舊菊花(훈개구국화) : 국화꽃은 옛 향기 그대로 풍기는구나



鏡中山影倒(경중산영도) : 거울 속엔 산 그림자가 거꾸로 섰고



 外柳絲斜(첨외유사사) : 처마 끝엔 수양버들가지 드리웠구나



一曲歌樽酒(일곡가준주) : 한 곡조 노래 부르고 또 술 마시니



胸襟動太和(흉금동태화) : 이내 심정 평화 속에서 오락가락하누나







pp 1349. 제6절 題詠(제영) 1. 개관



---題詠(제영)이라 함은 시의 형식에 대한 개념이 아니며, 시의 주제나 소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따라서 작가가 임의로 소재를 선택하여 吟詠(음영)한 일반



漢詩(한시)와는 다르다. 일정한 詩題(시제)나 어느 지방의 특정 소재를 대상으로



하되, 그 지방의 대표적 物象(물상)이나 특성있는 일정 지역의 개관 등을 吟詠(음



영)한 詩歌(시가)라야 題詠(제영)이라 할 수 있다.





2. 名勝(명승)에 대한 題詠(제영)(pp1350)



頭陀山(두타산)을 노래한 金得臣(김득신)의 詩(시)를 소개한다.





【12)頭陀山(두타산)】 백곡 김득신 (pp1364 및 pp1384)





行行路不盡(행행로부진) : 가도가도 길은 한량이 없는데



萬水更千峰(만수경천봉) : 이물 저물 건너다 보니 또 천봉이로구나



忽覺招堤近(홀각초제근) : 홀연히 절 가까와진 줄 알게 되었는데



林端有暮鍾(임단유모종) : 숲 저편에는 저녁 종소리 들리는 듯



(頭陀山 : 진천읍에서 동쪽으로 바라보이는 높은 산이 있다. 초평면과 괴산군 도



안면을 경계로 하는 해발 598m의 두타산이 그것이고 그 산허리인 초평면 영구리



542번지에는 고려 태조 원년(918)에 證通國師(증통국사)가 청건한 영수암이 있다.



이 절의 뒤편에 靈泉(영천)이 있었기 때문에 靈水寺(영수사)라고도 부른다. 조선



순조 30년(1831)에 僧(승) 妙益(묘익)과 지방민이 힘을 모아 중수하였고, 고종 5년



에 李韓(이한)이 다시 수축하였다. 이 절의 대웅전 앞에는 3층 속탑이 있다. 이절



을 감싸주는 두타산 상봉에서 청주가 눈앞에 가깝게 내려다 보인다. 산성터가 남



아 있는 산의 허리에는 하얀 갈대 숲이 우거져 예부터 절경으로 알려져 있다. 상



산팔경 중의 하나인 "頭陀暮鍾(두타모종)"은 바로 두타산과 영수암에서 흘러 나



오는 종소리를 말함이다)





3. 樓亭(루정)에 대한 題詠(제영)(pp1368)



(백곡 김득신의 【息波亭(식파정)】題詠(제영)은 앞의 소개로 생략함)





卜築幽居靜散中(복축유거정산중) : 그윽하게 살고자 한적한 곳에 복축을 하니



人疑千古夏黃公(인의천고하황공) : 사람들은 옛날 황공이었나 의심을 하는구나



今觀斗建風光美(금관두건풍광미) : 지금 이 고장 풍치의 아름다움을 관상하니



正與桃源臭味同(정여도원취미동) : 진정코 도화선경에 노는 취미와 무엇이 다르랴





pp 1421. 제1장 인물.



42. 金適(김적)



---조선 중기의 문신, 安察使(안찰사) 金士廉(김사렴)의 7대손이며 호는 牛川(우



천)이라 하였으며, 본관은 안동이다. 1610년(광해군 2)에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벼



슬이 이조정랑에 이르렀다. 광해군의 학정에 대하여 대의를 밝히고 정론을 바로



잡아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미움을 받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진천 서쪽 5



리 지점에 江亭(강정)을 짓고 살았다.(문헌 : 진천군지)





46. 金孝騫(김효건)



---조선 중기 임진왜란때의 의병, 고려조의 충신 안찰사 김사렴의 6대손이며, 본



관은 안동이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군은 파죽의 세로 북상



하여 올라왔다. 왜군의 3진을 밑은 흑전장정의 군은 경남 창원을 거쳐 4월25일에



는 성주에 이르고 김천을 거쳐서 추풍령을 넘어서 영동. 옥천. 청주를 지나 진천



을 거쳐서 죽산을 지나 서울로 올라가게 되었다. 이 때 왜군이 진천으로 들어오



니 현감 洪趾(홍지)는 내포로 피난 도망하고 경내에는 지휘할 사람이 없었다. 당



시에 執綱(집강) 즉, 향약소 또는 鄕廳(향청)의 책임자로 현감의 자문역을 맡고



있었던 김효건은 진천현 안의 장정을 모아 의병을 조직하고 산곡간(지금의 台洛



里(태락리)에서 院洞(원동)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을 차단하고 복병을 대기시키고



있다가 고개를 넘어오는 왜병을 급히 몰아치니 상당수의 적이 포살당하였다. 그



러나 중과부적으로 적을 끝내 막아내지는 못하였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조정에



서는 뒤에 좌찬성을 증직하였다.(문헌 : 상산지. 진천군지)





74. 金天章(김천장 : ? ∼1728(영조 4))



---金天株(김천주 : ? ∼1728(영조 4))



---金聲玉(김성옥 : ? ∼1728(영조 4))



---金聲秋(김성추 : ? ∼1728(영조 4))



--조선 후기 영조때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의거순절한 충신으로 진천군 문백



면 사석리에 있는 四忠門(4충문) 旌閭(정려)에 倂旌(병정)되고 있다.



--김천장과 김천주는 형제로서 안렴사 김사렴의 10세손이며, 김성옥은 김천장의



아들이고, 김성추는 김천주의 이들이니 형제이며, 부자간으로 사석리에서 누대를



세거하여 왔다. 본관은 안동이다.



--1728년(영조 4)에 청주에서 이인좌가 밀풍군을 추대하고 반란을 일으키고 청주



를 점령한 후 반란군을 이끌고 북상하여 가는 길에 진천지방에 다다랐다. 반군이



밀려오자 진천현감은 아무런 군비도 갖추지 못했으므로 싸우지도 못하고 달아났



으니 반군들은 아무 저항도 받음이 없이 懸衙(현아)를 점령하고는 逆徒(역도) 이



지경을 현감에 임명하고 진천 북방을 수비케하고 서울을 향하여 안성. 죽산 방면



으로 북상하여 갔다. 이지경은 현감을 자칭하고 지방 청년들을 잡아다가 반군에



편입케 하고 군량미 명목으로 재산과 곡식을 마구 빼앗아 들였다.



--이러한 상황을 본 김천장. 김천주 형제는 아들과 조카가 되는 김성옥과 김성추



를 불러놓고 "나라의 형세가 위기에 처했으니 일반 백성이라도 분발하여야 할 것



이어늘 하물며 충의가 혁혁한 김씨 집안의 자손으로 태어나 비록 國祿(국록)은



먹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어찌 이런때에 앉아만 있겠느냐"고 말하면서 동지들을



귀합하여 인솔하고는 懸衙(현아)로 쳐들어갔다. 당황한 이지경은 뒷 內衙(내아)로



피신하고 역졸들은 달려나와 일대 접전을 버렸다. 김천장은 진두에서 큰 소리로



"역적의 괴수놈은 나오너라, 내 너의 목을 베리라"고 외쳤다. 김천장은 용전분투



하며 적을 후려쳐 수명을 참살하는 동안 각 집에 나누어 주둔하고 있던 역도들이



몰려들어 矢石(시석)을 퍼부어 댔다.



--이때 김천장은 안부에 관통상을 입어 유혈이 낭자하였으나 이에 개의치 않고



싸우다가 쓰러졌다. 그의 아들 김성옥과 조카인 김성추는 김천장이 쓰러진 것을



보고 적군을 막아 싸우며 달려들어가 호위하며 衙門(아문) 밖으로 나와 퇴각하였



다. 김천주와 성추. 성옥 등도 반군과 싸우다가 안면이 깨지는 등 크게 다쳐 동지



와 가동 등에게 업혀 집까지 돌아왔으나 김천주와 성추 부자는 그날 밤에 숨지고



성옥은 3일후에 죽고 말았다.



--이인좌의 난이 평정된 후 이들의 의거순절한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자 김천장



에게는 좌승지를 증직하고 정려를 명하는 동시에 제수를 보내어 제사지내게 하였



다. 그의 아들 김성옥에게는 원종공신에 장사랑을 증직하였으며, 김천주. 김성추



부자에게도 각각 증직하고 복호를 명하였다. 1885년(고종 22)에 김천주와 김성옥



에게도 김천장의 정려에 병정케 하였으므로 이후 4충문이라 칭하였다. 이들이 인



솔한 의군들은 무기가 없어 칼, 도끼, 괭이, 쇠스랑을 들고 적소를 습격하였다고



하여 속칭 "쇠스랑 충신"이라고도 한다.(문헌 : 진천군지)





135. 金榮國(김영국 ? ∼1951)



--군인, 본관은 안동, 김규원의 장남으로 진천읍 사석리에서 태어났다. 1950년



6.25에 참전하고 1951년 중대장(중위)으로 김화지구 734고지를 사수하다 전사, 대



위로 추서되고 미국은성무공훈장을 받았다.(문헌 : 진천군지)





효열 60. 金景益. 金景稷과 누이 任滉의 妻(pp1486)



--본관은 안동이다. 이 3남매는 어머니가 병환에 손가락의 피를 드려서 소생하게



하였으며, 어머니가 종기로 고생하고 있을 때 경직 내외가 입으로 빨아서 낫게



하였다. 營門(영문)에서 3남매의 지극한 효성을 아름답게 여겨 김경익 등이 살고



있는 동네 이름을 三孝里(삼효리)라 명명하였다. 3남매가 모두 향천을 받았으며



지금까지도 그들의 효성을 칭찬한다.(문헌 : 진천군지)





pp.1507 8)안동김씨



--新羅(신라)의 大甫(대보) 諱閼智(휘알지)를 위시하여 38대 왕위를 계승한 경순



왕의 사남 諱殷說을 시조(옮기는이 註 : 시조라는 기록은 오기임) 하고 있는데 典



考大方(전고대방)에는 諱日克(휘일극 : 옮기는이 註 : 日兢이 바른 것임)을 시조로



하고 있으나 와전이다. 이 지방에는 제학공파. 정의공파. 안렴사공파. 익원공파.



개성윤공파의 후손이 살고 있으며, 그 중 안렴사공 후예가 대부분이다. 이에 래주



한 연대순으로 기록하자면 고려조의 충신 안렴사 諱士廉(휘사렴)의 6대손 監察



(감찰) 諱隣(휘린)이 진천군 진천읍 장관리로 내주하여 400여년 그 자손이 세거한



이래 많은 충효가 속출하여 번성하고 있다. 또한 8세손 상락부원군 諱方慶(휘방



경)의 5세손인 제학공 諱益達(휘익달)의 15세손 諱俊健(휘준건)이 근 200년전에



진천군 이월면 신일리로 내주하여 세거하고 있다. 이외에도 타파의 후손이 산거



하고 있다.(2002. 5.26)





▣ 김발용 -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김태서 - 좋은자료 감사드립니다.

▣ 김주회 - 감사합니다. 저의 고향 진천에 대한 내용입니다. 위 내용중 김효건은 저의 14대조 김효증의 아우되시고, 김적은 김효건의 아들이 되시는 분입니다. 감사합니다.

▣ 김영환 -

▣ 김항용 - 잘 읽었습니다. 연일 자료 발굴에 감사합니다.

▣ 김정중 - 감사해요^-^

▣ 김재익 -

▣ 김은회 -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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