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정릉이야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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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7-07-04 08:47 조회1,424회 댓글0건본문
정릉(중종) 정릉가기 성종과 정현왕후를 모신 선릉을 뒤로 하고 제법 동산의 모양새를 갖춘 언덕하나를 넘아야 정릉에 닿을 수 있다.드나드는 사람이 많아 공원의 분위기를 띠던 선릉과 달리 고개하나 차이로 정릉은 고요함 속에 묻혀 있다 중종은... 1488년(성종19년) 3월 5일 태어난 중종은 1494년 4월 6일 진성대군에 봉해졌다가 1506년 9월 2일 박원종 성희안 등이 반정을 일으켜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왕으로 추대 조선 제 11대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역 자는 낙천이다 .중종은 연산군떄의 여러 가지 폐정을 개혁하기 위해 새로운 왕도정치를 실천하고자 노력했다.. 신진사류인 조광조를 내세워 철인군주정치를 표방, 훈구파를 견제하는 동시에 신진사류를 중요직에 대거 등용하여, 지치주의적 이상정치를 행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들 신진 사람 세력의 과격하고 지나친 개혁정치는 기성 훈구파의 반발을 일으켰고, 중종 자신도 이들의 생각에 회의를 느끼지 시작했다. 이러한 중종의 심중을 읽은 남곤 심정등이 반정공신의 위훈삭제 문제를 졔기로 신진 사람 세력들이 숙청당하고 훈구파가 실권을 장악했다. 이렇게 개혁 정치의 기운이 꺽인 중종시대는 훈구파간의 내부싸움이 시작되면서 정치적인 혼란이 계속돼 각종 옥사들이 불이어 발생했다. 1521년(중종16년) 기묘사화의 여파로 신사무옥이 일어나 안처겸등의 사림파가 다시 제거되고 윤세창의 모역 사건이 일어나는가 하면 1527년 김안로의 아들 희가 심정.유자광을 제거하고자 일으킨 동궁의 작서의변으로 경빈 박씨와 복성군이 서인이 되어 쫒겨가는 등 훈구파 상호간의 정권 쟁탈전이 극심해졌다. 1531년 (중종26년) 김안로의 집권으로 정계는 더욱 혼란에 빠지고 이에 대립하여 윤원로 형제가 등장하여 정국은 훈신과 척신의 대립으로 치달았다. 이러한 불안은 국방정책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1510년 삼포왜란이 일어나 경상도 해안 일대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으며, 1522년 추자도 왜변 동래염장의 왜변, 1525년 전라도 왜변등 남부지방해안에 끊임없이 일본이 침략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북방 국경지대 야인들도 번번이 침략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나라 안팎으로 바람잘 날 없었던 세원이었다. 이러한 와중에서도 사회적으로는 유교주의적 도덕윤리가 정착되어 갔다. 한때 조광조 일파의 몰락으로 주춤하기는 했지만, 향약이 전국화되는 등 유교주의적 향촌질서가 자리잡혔던 것이다. 또 중종의 오랜 재위기간동안 인쇄술의 발달과 더불어 많은 편찬사업도 진행되었다. 1516년(중종 11년)설치한 주자도감에서 많은 동활자를 주조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속동문선) (사성통해)등의 문헌들을 편찬 간행했다. 경제적으로도 저화와 동전의 사용을 적극 장려하고 도량형의 일원화를 꾀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정치적 혼란과 잦은 외침으로 크게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조종에게는 세왕비가 있었는데 첫 번째 왕비는 봉해진지 1주일 만에 폐위된 단경황후이다. 연산군의 처남이자 단경황후의 아버지인 신수근이 연산군 축출에 반대하여 중종반정 도중 살해되자 그 형향으로 폐위되었다. 제 1계비 장경왕후는 윤여필의 딸로 세자 (인종)를 낳고 산후병으로 요절하였다 제 2계비에 오른 사람은 명종의 모후인 문정왕후. 윤원로 윤원형을 외척 세력으로 끌여들여 정치적 혼란을 야기한 장본인 이다. 중종은 세왕비와 후궁에게서 9남 11녀를 두었다. 중종이 병으로승하한 것은 1544년 1월 15일 창경궁에서였다 보령 57세 왕위에 있은지 39년 만이다. 이듬해 2월 3일 중종은 현재 서삼릉능역내에 있는 장경왕후 윤씨 능인 희릉 오른쪽 산줄기에 모셔졌다. 그로부터 7년뒤 1562년(명종17년) 9월4일 명종의 모후로 정권을 휘두르던 문정왕후는 봉은사 주지 보우와 의논하여 중종의 능을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풍수적으로 불길한 자리에 선왕을 모실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하지만 이것은 후세 역사가들의 비판대로 문정홍후가 자신의 훗일을 위해서 한 일이었다. 중종의 능을 옮겨놓고 보니 지대가 낮아서 여름철에는 재실까지 강물이 들어 보토하기에 많은 비용을 낭비해야했다. 그런중에 문정왕후가 승하했으므로 왕비릉은 부득이 다른 곳을 택할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세 명의 왕후를 두고도 중종이 단릉으로 모셔진 이유이다. 문정황후의 집착으로 이곳에 옮겨진 중종은 임진왜란때 선릉과 함꼐 왜병에게 파헤져지고 재궁이 불태워지는 변고를 당했으니 실로 해만 크고 득이 없는 천장이었다 정릉보기 정릉의 상설형식은 (국조오례의)를 충실히 따르되 선릉양식을 답습하여, 병풍석 12면,난간석12간,상석1,장명등1,망주석1쌍,문인석1쌍, 석마2쌍, 석양2쌍,석호 2쌍, 정자각,수라청,망료위 ,표석 1,홍살문으로 되어있다. 원찰은 보우가 주지로 있었던 봉은사이다. 본래 이 절은 794년(신라 원성왕 10년)에 연회국사가 창건하여 견성사라 했는데, 1498년(연산 4년)에 중창하여 봉은사라 개칭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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