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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릉이야기(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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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7-07-04 08:51 조회1,48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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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속의 왕릉 - 선정릉

소위 삼릉공원이라고 일컬어지는 선정릉이 왜 삼릉공원이라 이름하게 된 것일까?
물론 사람들의 휴식의 장소로서도 이용되려는 목적이 있었겠지만 아무래도 선정릉의 위치에서부터 그것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본래 선정릉이 소재하고 있는 서울 강남구 삼성동은 조선시대 경기도 광주부의 한 고을이었다. 옛 문헌을 살펴보고 정확히 짚어 말하자면 경기도 광주부 학당리에 속해 있다.

시간이 점점 흐르면서 서울의 면적이 점점 넓어지게 되었고, 그에 따라 이 광주부의 일부였던 학당리도 자연스레 서울로 편입이 되어 버렸다. 그러다가 주변이 도시화가 되어가면서 선정릉 일대는 온통 고건물 사이로 뒤덮이게 되었고, 그러한 도시화는 선정릉을 교외로 옮기려는 계획까지 추진하게 하였다. 물론 막대한 재정지출때문에 백지화가 되긴 했지만 이 당시 도시화며 개발에 얼마나 집착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일화라 하겠다.

어쨌든 이러한 도시화에 따른 개발로 주변이 온통 고층 건물로 자리하게 되자 자연 일상생활에 지친 사람들이 마땅히 쉴만한 공간이 여의치 않게 되었고 결국 사람들은 근처의 선정릉을 휴식의 장소인 공원으로 삼았고 이것은 오늘날 삼릉공원이라는 명칭까지 등장시키게 되었던 것이다.

선정릉이 처음 자리하게 된 것은 성종이 세상을 뜨고 그 아들 연산군이 즉위한 다음 해인 1495년 4월의 일로 본래의 지명이 경기도 광주부 학당리라 일컬은 것은 앞서 말한 바와 같다.

보통 임금이 세상을 뜨면 5개월만에 국장으로서 장례를 치루는데 5개월의 장례도 장례려니와 왕을 능에 모시기 위해 그만큼의 시간동안 왕릉을 꾸미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또 그만큼 많은 인원들이 동원되어 능을 꾸몄으니 거기에 소요되는 경비또한 많이 들었을 것임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으리라.

능은 보통 제사를 지내는 정자각, 능의 주인을 알리는 비석을 세워 두는 비각, 제사를 지내기 위해 준비하는 수복방 및 재실이 있고 높다란 언덕으로 올라가면 문 무인석이 좌우에 시립해 있고, 그 외에도 왕릉 주변을 호위하는 여러 종류의 석수가 진열되어 있다.

그렇게 석수가 동그랗게 둘러쌓인 한 가운데 보통 사람 무덤의 봉분보다도 높은 봉분이 우뚝 솟아 있고 그 아래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둘렀다. 바로 왕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현실이 있는 봉분이다.

주변의 병풍석에는 화려한 무늬와 12 간지에 등장하는 동물신 (12지신이라고 한다)들이 새겨져 있는데, 죽은 왕에 대해서 그 신분에 맞게 위엄을 살려주는 그 자체야 말로 왕에 대해 그만큼 각별한 정성을 기울인 옛 사람들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장면이라 하겠다.

이러한 선릉과 정릉은 유난히 사연 많은 곳이기도 하다. 1592년인 선조 25년에 일어난 임진왜란으로 인해 두 능침이 침략해 온 일본군에 의해 훼손되는 수난을 겪는다. 특히 중종의 정릉 경우는 본래 경기도 고양군 (현재의 고양시) 서삼릉내의 희릉(중종의 첫 왕비인 장경왕후의 능)에 묻혀있었는데, 명종때 문정왕후의 쓸데없는 집착탓에 이곳으로 강제로 옮겨졌다가 이때에 이르러 시신이 훼손당하는 수모를 겪게 된다.

정릉의 주인공인 중종은 살아 생전에도 탈이 많았던 왕이었는데, 죽어서도 탈이 많아 이처럼 수난을 당한 것이다. 하긴, 기묘사화를 일으켜 조광조를 제거하고, 그 이후 혼란스럽고 복잡한 정국 속에 옥좌에 있었으니 어찌 탈이 없을 수 있겠는가?

그의 아버지(부왕)인 성종은 그나마 나은 셈이다. 경국대전 체제를 완성시키는 등 조선왕조 문물을 완성한 명군이지만, 성종은 선대의 세종이나 훗날 정조에 비해 조금은 좋지 못한 평가를 받았다. 자신의 집안 단속을 잘못하여 둘째 부인 윤씨가 투기가 심하다 하여 사사해 버린 것이다.

성종이 많은 업적을 남겼는데도 윤씨를 사사한 것이 왜 흠이 되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이것의 근본원인은 바로 성종 자신의 지나친 여색에서 비롯된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성종의 실패한 죄가로 인해 빚어진 비극인 것이다.

훗날 이 비극이 자신의 아들 연산군때의 피바람으로 되돌아 오리라는 사실을 성종이 왜 짐작하지 않았겠는가마는 그러한 성종의 선릉도 중종의 정릉과 함께 왜군에 의해 훼손당하긴 마찬가지였다. 두 부자의 왕릉이 일본에 의해 훼손당하는 수난을 겪는 것이다. 그러나 훼손의 정도에 있어서는 아들 중종의 정릉이 훨씬 더 심각했다.

그런 까닭에 선릉과 정릉은 현재 시신이 없거나 훼손된 왕릉이라고 하는데, 누구의 무덤이 빈 무덤이고 누구의 무덤이 약간의 훼손된 것인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밝힌 기록은 없다. 다만, 중종의 정릉이 훼손이 심각했다는 왜란 당시의 기록으로 살펴보면 아마도 중종의 정릉이 시신 없는 빈 무덤일 가능성이 높다.

일본에 의해 크게 훼손된 왕릉들이지만, 그래도 왕의 위엄을 잃지 않으려는 듯한 모습이 역력해 보인다. 그러한 모습이 역력해 보인 왕릉이지만 고층 건물에 둘러쌓여 각종 소음에 인파로 시달려 지하에서 무척 답답해 하고 있을 듯하다.
자신들도 조용히 쉬고 싶다는 뜻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무언으로 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출처 -
순천(historyjang) 역사와 문화, 그리고 또다른 나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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