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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과 우리가문 09 (金孝騫김효건, 金廷佶김정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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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2-05-29 03:36 조회2,02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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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과 우리가문 09 (金孝騫김효건, 金廷佶김정길)







안렴사공파 : 김사렴-김식-김자려-김린-김형손-김기-★김효건-김적



안렴사공파 : 김사렴-김식-김자려-김린-김형손-김기-김효증-김현-★김정길









<진천군지, 1994>

▣ 김효건(金孝騫)이 이끈 진천의병의 활약



김효건은 안동인으로 진천현감의 휘하에 執綱 (鄕約所 또는 鄕廳의 책임자로 현감의 자문역할을 함) 이었다.



왜군의 제3진인 黑田長政 軍은 경남 창원을 통해 성주, 김천을 지나 영동, 옥천, 청주를 점령하고 진천으로 쳐들어 왔다.



이때 진천현감인 洪趾는 內浦로 도망하여 지휘할 인물이 없었다. 그런데 집강 김효건이 의병을 모집하여 지금의 台洛里에서 院洞으로 넘어오는 고갯길을 매복하고 있다가 적병을 급습하여 타격을 주는 등 활약하였다.



그는 후에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진천군지 1994>

▣ 김효건 (金孝騫)



조선중기 임진왜란 때의 義兵, 고려조의 충신 안렴사 金士廉의 6대손이며 본관은 안동이다.



1592년 (선조25) 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군은 파죽의 세로 북상하여 올라왔다. 왜군의 3진을 맡은 黑田長政의 군은 경남 창원을 거쳐 4월 25일에는 성주에 이르고 김천을 거쳐서 추풍령을 넘어서 영동, 옥천, 청주를 지나 진천을 거쳐서 죽산을 지나 서울로 올라가게 되었다.



이때 왜군이 진천으로 들어오니 현감 洪趾는 內浦로 피난 도만하고 경내에는 지휘할 사람이 없었다. 당시에 執綱 즉 鄕約所 또는 鄕廳의 책임자로 현감의 자문역을 맡고 있었던 김효건은 진천현 안의 장정들을 모아 의병을 조직하고 山谷間 (지금의 태락리에서 원동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을 차단하고 복병을 대기시키고 있다가 고개를 넘어오는 왜병을 급히 몰아치니 상당수의 적이 포살당하였다.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적을 끝내 막아내지는 못하였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자 조정에서는 뒤에 좌찬성을 증직하였다.



문헌 상산지 진천군지











<충청북도인물지 (1987)>

▣ 김정길 (金廷佶)



본관은 안동이요, 안렴사 김사렴의 후손이다.



12세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병에게 잡히는 신세가 되었다. 그는 밤낮없이 울고 있으니 적장이 "그대는 어찌 우는가"하고 물으니, 그는 "어버이 생각하는 마음이 가슴에 맺혀 울고 있다"고 답하였다.



적장이 또 "너는 글을 배웠느냐?"고 물으니, 그는 "어찌 글을 배우지 않았겠느냐"고 답하였다. 왜장은 그에게 시를 지어 보라고 하였다.



그는 즉시

童子年將十有二 동자연장십유이

一朝庵作別, +宣  일조암작별?위

可憐夜夜思親夢 가련야야사친몽

長向吾家枕上飛 장향오가침상비 라고 지었다. 글의 뜻은



"저의 나이는 12살인데

하루 아침에 부모님을 작별하게 되었구나

가련하다 밤마다 부모를 생각하는 꿈을 꾸니

그 꿈은 멀리 나의 집으로 날아가 부모님 머리맡에 있노라" 이다.



적장은 이 시를 보고 그 효성에 감동하여 석방하였다.







그는 적장에게 말하기를 "만약 다른 일본 군사를 만나면 부모님을 뵈옵기가 어렵겠으니 다른 일본 병사들이 나를 잡지 말라는 표를 하여 달라" 고 하였다.



적장은 그의 손을 잡고 등을 쓰다듬으면서 "훌륭하도다. 표를 하여 달라는 말이여!" 하고 차고 있던 붉은 종이를 내주면서 다시 잡는 자가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끝내 그는 집에 돌아와 부모를 만나게 되었다.

그 뒤에 山東의 3개 면이 그의 덕을 입어 무사하게 잘 지냈다.



문헌 진천군지, 내고장 전통가꾸기 (진천군편)









▣ 김태서 -

▣ 김주회 - 참고로 위 내용중 김효건은 저의 14대조 김효증의 아우 되시는 분이고, 김정길은 저의 12대조 직계선조 이십니다.

▣ 김영환 -

▣ 김항용 -

▣ 김재원 -

▣ 김태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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