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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인릉 이야기(1)-태종과 헌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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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7-07-05 10:00 조회1,49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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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릉지킴이 전문 카페이서 인용했습니다.
 

헌릉(태종)

헌인릉가기

강남구 내곡동 산 13-1 대모산 남쪽 기슭에 자리잡은 헌인릉 사적 제 194호로 지정된 이곳은 양재동에서 성남 방향으로 가는 널따란 헌릉로 옆에 위치하고 있다. 헌릉로에서 헌인릉 안내판을 딸라 들어가면 먼저 고풍스런 한옥을 한 채 엿볼 수 있는데 이것이 헌인릉의 재실이다.
현재는 관리사무소로 쓰이고 있다. 능입구엔 먼저 제 23대 순조와 순원황후를 합장한 인릉이 있고 인릉 앞을 지나쳐 울창한 숲길로 계속 걸어들어가면 조그만 매점을 지나 헌릉의 홍살문이 초록색 잔디 위에 선명하게 떠오른다. 태종의 그의 비 원경왕후가 나란히 누워 있는 곳이다.

태종대왕께서...
1367 5월 16일 태조 와 신의황후 한씨의 다서쨰 아들로 태어난 태종 이방원은 태조의 에 튼 공을 세웠다. 1392년 3월 이성계가 해주에서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중상을 입자 정몽주는 공양황에게 상소하여 전도전등 이성계파의 핵심인물을 유배시키고 이성계까지 제거하려고 했다.
이러한 낌새를 알아챈 이방원은 조영규등에게 정몽주를 제거하여 대세를 만회하고 왕대비를 강압하여 공양왕을 폐위하게 한 뒤 이성계를 긍위하게 하는 들 아버지의 오른팔 역할을 톡톡히 했다. 하지만 조선이 개국하자 그는 세자의자리를 이복동생 방석에게 빼앗기고 개국공신책록에서도 제외되었다 .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와 정도전등의 배척 때문이었다. 1398년 정도전에 의해 요동정벌계획이 적극 추진되면서 자신의 마지막 세력 기반인 사병마저 혁파당할 위기에 이르자 누적된 위기의식과 불만은 폭팔했다. 방원은 정도전, 남은, 심효생등이 밀모하여 신의왕후 소생의 왕자들을 일거에 살육할 계획을 하고 있다고 트집잡아 이를 미연에 방비한다는 명분을 세워 정도전 등을 습격하여 죽이고 이 변란의 책임을 정도전 일파에게 돌림으로써 숙원을 풀었다.

방원은 이에 그치지 않고 세자 방석을 폐위하여 귀양보내는 도중에 제거했으며, 방석의 동복형 방번도 함께 죽였다. 왕위 계승권을 둘러싸고 일어난 완자간의 이 싸움을 일컬어 제 1차 왕자의난이라고 부른다. 형제간의 왕위 다툼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1398년의 제1차 왕자의 난에 이어 1400에는 제 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다.
제 1차 왕자의 난 이후 논송행상에 불만을 품은 박포가 방원의 바로 윗형인 방간에세 방원이 장차 그를 죽이려 한다고 거짓밀고를 한 것이다.

방간은 왕위 계승에 대한 야심을 품고 있었으나 여러 면에서 방원에 미치지 못하여 항상 시의 불안속에 있었다. 그런데 박포가 거짓밀고를 하자 이 밀고를 믿고 방간이 사병을 동원하니 방원도 이에 맞서 병역을 동원하여 개경에서 교전을 벌였다. 결과는 방원의 승리였다.
방간은 방원의 군사에 잡혀 거병작란하여 형제를 모해했다는 되명으로 유배되고 박포는 사형을 당했다. 제 2차 왕자의난은 결국 방원의 왕위계승을 촉진시키는 경과를 가져왔다.


방원에 대한 반대세력은 거의 소멸되었고 그의 정치적 입지는 더욱 확고해졌다. 정종은 제2차 왕자의 난후인 그해 2월 방원을 세제로 삼고 같은 해 11월 왕위를 물려주어 방원이 즉위하니 이가 곧 제 3대 태종이다

왕위에 오른 태종은 철자한 배불숭유정책을 강행하고 관제를 개혁에 주역하며 새로운 완조의 기틀을 잡기에 노력했다. 우선 공신과 외척을 제거하여 왕권을 튼튼히 했으며, 의정부기능을 축소시키고 육조기능을 강화애 중앙집권제를 확립했다. 또한 저폐를 만들어 경제유통을 원활히 했고 신문고를 설치했으며, 호패법을 신설하는 등 제반제도를 정비했다.

 
특히 수리사업에 전념하여 벽골제의 부수를 대규모로 실시하는 등 많은 수리공사를 했다. 수리사업에 대한 태종 의 지대한 관심은 "태종우"에 얽힌 이야기를 낳았다. 이야기는 태종말년 계속된 심한 가문에서 비롯된다. 태종은 눈을 감으면서도 가뭄을 걱정하여 자신이 죽어 혼이 있다면, 이날 비가 오게 하겠다고 유언을 남겼다.


그 이후 해마다 태종의 기일인 음력 5월 10일이 되면 비가 왔는데 이 비를 태종우라고 불렀다. 한다. 태종은 1418년 무절제하고 방탕한 세자 제(양녕대군)를 폐하고 충년대군을 세자로 삼아 2개월뒤에 선위했다. 선위한 뒤에도 군권에 참여하여 세종이 왕권을 튼튼히 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태종이 이룩한 강력한 중앙집권제도는 세종대의 태평성세를 떠받치는 기반이 되었다. 태종은 슬하에 12남 18년를 두고 1422년 5월 10일 보령 56세로 승하했다.

철저한 숭유억불 정책을 폈던 태종은 능방에 불사를 두는 일을 폐지했고 국상에 법석을 폐지하는 등 고려때부터 계속되던 불교적 요소를 제거했다..


헌인릉 보기

능제는 태조의 건원릉 형식을 따랐다. 봉분 아랫부분에 화강암 병풍석을 쓰고 병풍석에 방울 방패 십이지신상을 새겨넣은 것 모두 건원릉을 그대로 모방했다. 2년 뒤 태종이 승하하자 세종은 모후의 능 옆에 부왕의 자리를 마련 나란히 봉분을 만든 뒤 난간을 연결하여 쌍릉으로 조성했다.

왼쪽에 보이는 봉분이 태종의 능이다. 능 앞의 석물들은 망주석만 빼고는 모든 석물을 또 한벌 갖춰 쌍으로 배치 했다. 이것은 고려왕조의 현릉과 정릉제도를 답습한 것이다. 문인석과 무인석의 크기와 모습도 대체로 건원릉과 유사하다. 하지만 바짝 다가가서 유심히 살펴보면 석인들의 머리가 좀더 커지고 조각의 표현은 단순해졌음을 느낄 수 있다. 건원릉에서 보이던 사실적이고 섬세한 수법이 다소 퇴화 된 듯하다.

문인석 무인석 모두 살짝 미소를 짓고 있다. 비각에는 신도비가 있는데 임진왜란때 손상된 것을 1695년 에 다시 세운 것이다. 태조를 도와 조선을 건국하는 데 큰 공을 세우고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실시하여 500년 조선왕조의 기반을 닦았지만 개인적으로는 1,2차 왕자의난으로 아버지릐 분노를 사고 형제에게 칼을 들이댔다는 오명을 남긴 태종 이방원, 정자각 그늘에 앉아 있으려니 그가 정몽주의 속마음을 떠보고자 술장르 보내며 읊었다는 (하여가)가 떠오른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쩌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어떠리

우리도 이같이 얽어져 백년까지 누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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